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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4화)
순식간에 세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괴인이 눈을 지긋이 감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뱉었다.
“하……아. 때리는 너희들이나…… 맞는 아이들이나…… 서로 힘들고, 괴롭고 또한, 비능률적이지 않느냐?”
한껏 숨을 들이마신 괴인이 몸서리를 치며 서서히 눈을 떴다.
“고통 없는 죽음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마(魔)를 숭상하는 교도로써 몸소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니라!”
아이들이 극에 달한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오줌을 지렸다.
“천마신교에 입교한 것을 환영하는 바이다!”
괴인이 밝은 얼굴로 모두에게 선언했다.
조금 전 살인을 했던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 못할 표정이었다.
잠시 이 상황을 음미하는 듯 눈을 감고 미소를 짓던 괴인의 얼굴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사람들은 힘들 때, 고통스러울 때, 배고플 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 지옥 같다고 이야기한다. 헌데, 과연 지옥에 가본 자가 있느냐? 가보지도 않은 자들이 지옥 같음에 대해 어찌 안단 말이냐! 이 모든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 너희가 지옥을 아느냐! 지옥의 고통과 절망을 아느냐!”
괴인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희번득거리는 눈이 아이들을 하나하나 쓸어갔다. 극한의 공포로 인해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부터 너희는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곳이 바로 지옥이니라!”
괴인이 팔을 들어 올렸다.
“총교령(摠敎令)으로서 명한다. 일계를 실행하라!”
온 광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명령한 지옥곡 총교령 혈섬(血蟾) 홍탁이 물러나고 육십 명의 조교들이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조교들은 백 명 단위로 대를 만들어 열 개의 대로 아이들을 나누었다.
그리고는, 각 대의 인원에 일호부터 백호까지의 번호를 부여했다.
“앞으로 너희는 이름이 없다. 오로지 지금 받은 번호로 호칭될 것이다!”
조교들이 아이들 각각의 무복에 붉은색 주사(朱砂)로 번호를 적었다.
번호를 다 적은 조교들이 연단 쪽으로 가 사방 석 자 정도 크기의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나무 상자 안에는 수갑이 들어 있었는데, 수갑의 양쪽이 두 자 정도 길이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뒷번호와 한쪽 팔을 수갑으로 채워 연결하라!”
아이들은 팔에 닫는 쇳덩이의 차가움에 몸서리쳤지만 조교들의 구타가 무서워 얼른 명령에 따랐다.
수갑에 열쇠는 없었다. 열려져 있던 수갑을 채우면 다시 열 길이 없었다. 열쇠는 조교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두 명씩 수갑으로 한쪽 팔이 연결되었다.
왕오와 네 아이들은 십대에 속해 있었다.
왕오는 십칠호, 왕오와 수갑으로 연결된 아이는 왜소한 채구의 여덟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였는데, 집합 때 꾸물거리다 조교에게 맞아 온몸에 피멍이 가득했다.
얼핏 보기에도 힘이 없어 보이는 아이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왕오는 잠시 십팔호를 쳐다보다,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부터 너희에게 환단을 나누어 줄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힘을 몇 배로 키워주는 영약이다. 받자마자 삼키도록 해라! 만일 삼키지 않는 놈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벨 것이다!”
조교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환단을 나눠주었다.
이 환단이 그들의 말대로 영약인지, 아니면 마단일지는 어차피 중요치 않았다.
왕오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고 바로 삼켜 버렸다.
환단을 삼키자 갑자기 온몸이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고, 참을 수 없는 흥분이 신경을 지배했다.
이대로라면, 무슨 일이든 해낼 것 같은 자신감이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저들의 말대로 분명 힘이 세진 것 같았다.
흥분된 왕오의 손에 조교가 한 자루 단도를 쥐어주었다.
둘러보니 모든 아이들에게 한 자루씩 단도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이지.’
그동안 훈련으로 단련된 왕오의 감각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설마 이걸로 서로 싸우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
왕오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주위의 아이들이 순식간에 적으로 돌변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십팔호는 단도를 쥔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아무리 환단을 먹었으나 두려움이 쉽게 가시지 않는 것이다.
이 년간 혹독한 훈련을 받은 왕오와는 달리 평범한 아이들은 처음 잡아보는 단검에 지레 겁을 먹기 마련이었다.
단검을 나눠준 조교들이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광장에는 아이들만 영문을 모른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층에 오른 조교들이 일층과 연결된 계단들을 끌어올렸다.
불길한 느낌이 왕오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준비!”
“준비하라!”
철컹! 철컹!
조교들이 사방에 신호를 보내자 계곡 입구를 비롯해 갈래길들로 통하는 모든 입구들에 철문이 내려와 막혀 버렸다.
갑작스럽게 고립된 상황에 아이들이 소리치며 우왕좌왕했다.
“열어라!”
책임자인 듯한 조교의 외침이 광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저 절벽이라 생각되었던 곳이 반으로 갈라지며 검은 구멍을 드러냈다.
그런 구멍이 사방에 여섯 개가 있었는데, 그 검은 구멍으로부터 노란 불빛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코를 찌르는 누린내가 광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
검은 구멍으로부터 서서히 머리를 드러내는 그것은 송아지만 한 덩치를 가진 회색 늑대였다.
한 마리가 몸을 드러내고 그뒤를 이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늑대의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오랜 시간 굶주린 듯 늑대들의 주둥이에선 침이 흥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구멍에서 오십 마리씩 총 삼백 마리의 늑대가 광장에 풀려 나왔다.
열 살 아이들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천천히 한 걸음씩 움직이던 늑대들이 어느 순간 쏜살같이 아이들을 덮쳤다.
크아아앙!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이 열리고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회색 늑대였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들개 하나 감당할 수 없는 아이들에겐 심장이 얼어붙을 일이었다.
왕오는 십대에 속했기에 오른쪽 가장 끝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연히 늑대와 가장 먼저 맞닥드려야 할 위치였다.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
약기운 때문인지 그간의 훈련 때문인지 왕오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른손에 단도를 쥐고 자세를 잡았다.
철컥!
왕오는 당황했다. 왼손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갑이 채워져 연결된 십팔호가 넋이 나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런, 젠장! 정신 차려!”
왕오가 십팔호에게 소리쳤다. 혼자라면 충분히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짐덩어리 십팔호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십팔호가 죽게 된다면 시체를 달고 늑대와 맞서야 한다.
십중팔구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십팔호와 함께 늑대에 맞서야 했다.
늑대들이 어슬렁거리며 점점 다가왔다.
늑대들이 보기엔 인간의 무리가 훨씬 숫자도 많고 뭉쳐 있기에 일단은 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한 명이라도 열을 이탈하는 녀석이 있다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이대로 죽을 거냐? 바보같이 질질 짜지 말고 일어나!”
짝!
왕오가 십팔호의 뺨을 때렸다.
정신이 돌아온 십팔호가 비명을 지르며 두려운 눈으로 왕오를 바라보았다.
이마에 십자 흉터가 새겨진 왕오의 모습이 마치 악귀와 같았다.
“너 하나 죽는 건 괜찮지만, 네놈 때문에 나까지 죽게 생겼다! 이렇게 방해만 될 거면 차라리 내가 네놈을 죽여주마!”
서슬 퍼런 왕오의 호통에 십팔호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은커녕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하고 죽게 될지도 몰랐다.
“잘 생각해 봐! 지금 나한테 맞은 게 아팠는지!”
왕오가 십팔호의 얼굴을 잡아 흔들며 물었다.
십팔호는 잠시 생각하는 듯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
“그…… 그러고 보니 하나도 안 아팠어!”
십팔호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 펄쩍 뛰었다.
“우리가 방금 먹은 환단은 무적환단이라는 거야! 다쳐도 고통도 없고! 힘도 몇 배로 세진다! 그러니 저깟 늑대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십팔호에겐 효과를 발휘했다. 분명 힘이 넘치고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오가 이때다 하고는 더욱 십팔호를 부추겼다.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지! 저놈들은 조금 큰 개새끼에 불과해! 거기다 우린 몽둥이가 아니라 칼까지 가지고 있다!”
십팔호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약효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그래! 맞아! 개새끼! 죽여 버려!”
십팔호가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때, 배고픔을 참지 못한 늑대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컹! 컹!
아이들이 기겁을 하고 뒤로 도망쳤다. 하지만 도망쳐 봤자 갈 곳도 없었다.
사방에서 늑대들이 덮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십팔호가 그랬듯 주저앉아 버렸고 어떤 아이들은 약기운에 늑대와 맞서기도 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십팔호가 자신에게 맞춰 움직여 줄 리는 없으니 자신이 맞추어야 했다.
당연히 행동 반경이 커지고, 한 번 움직일 것을 두 번 움직여야 된다. 조금의 실수라도 있다면 둘 다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늑대 한 마리가 두 아이를 향해 달려왔다.
십팔호는 약기운에 용기를 내긴 했으나, 실제로 늑대가 달려들자 다시 움츠려들고 있었다.
“저 개새끼를 때려잡자! 내일이면 우리 뱃속에 들어가 있을 거야!”
왕오가 고함을 쳤다.
자신의 두려움까지도 억누르려 더욱 거칠게 소리쳤다.
자극받은 늑대가 몸을 뛰어 왕오와 십팔호를 덮쳤다.
“후……읍!”
크게 심호흡한 왕오가 재빨리 십팔호 쪽으로 몸을 날렸다.
반대쪽으로 움직여 봐야 수갑이 걸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왕오가 십팔호를 밀어냈다.
그 위로 늑대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났다.
왕오의 등에 불에 댄 듯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늑대의 발톱이 스치고 지난 듯했다.
이 정도 상처에 머뭇거릴 여유 따윈 없었다.
“어서 일어서! 해볼 만하지! 힘내고 또 온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말들을 왕오는 쉴새없이 떠들어 댔다.
십팔호와 자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이다.
몸을 돌린 늑대가 입을 크게 벌리고 왕오의 목을 노렸다.
“엎드려!”
십팔호에게 소리 지른 왕오가 재빨리 몸을 숙인 채 단도를 치켜 올렸다.
스악!
단도에 무언가 걸린 느낌이 들었지만, 너무 약했다.
늑대의 겉 가죽만 스친 것이다.
오히려 화만 돋군 꼴이다.
“칼을 휘둘러! 저 개새끼를 죽이자! 십팔호, 우린 할 수 있어!”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