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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5화)
二章 혈전(血戰)(2)


째애앵!
찢어지는 쇳소리와 함께 제갈운학의 소리비도가 튕겨 나갔다.
오성밖에 이르지 못한 미숙한 공부(功夫)와 풍음전에 비해 월등히 달리는 내공 때문에 그의 소리비도는 풍음전의 검기를 타고 흐르면서도 급격히 속도를 잃었고, 칼날이 코앞에 다다른 순간 풍음전은 그것을 쳐 낼 수 있었다.
“훌륭하구나! 하지만 거기까지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어오며 자신을 향해 펼쳐지는 질마검의 공세에, 제갈운학은 온몸이 삽시간에 칼의 그림자에 갇혀 버린 듯 느꼈다.
그때, 드디어 심은이 출수했다.
쩌러렁∼!
한꺼번에 서너 개의 종을 울리는 듯한 맑은 금속성을 뿌리며 두 팔을 크게 펼쳤다 모으는 동작 속에, 심은의 양손에서 황금색 서기와 함께 두 줄기 장력이 서로 꼬이며 허공에 뜬 풍음전의 옆구리를 노리고 쏟아져 갔다.
“쌍류금(雙流金)! 쌍류금이로구나! 이이이익! 질마회강(疾魔回剛)!”
놀라 외치는 풍음전의 목소리와 함께, 제갈운학에게 짓쳐 들던 그의 몸이 허공에서 맹렬히 회전하며 검기를 온몸에 둘렀다.
십이식 질마검식 중 단 하나의 구명절초(求命絶招), 목숨이 위험할 때마다 펼쳐서 막아 내지 못한 적이 없었던 질마회강이 펼쳐지고 있었다.
쩌저저정!
“크으윽!”
“아흑!”
풍마질검과 쌍류금의 공세가 서로 부딪치더니, 신음 소리와 함께 풍음전의 몸이 회전을 멈추지 않은 채 탁자 너머로 훌훌 날려 갔다.
그러나 심은의 가녀린 신형 역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새하얗게 질린 그 입술 사이로는 핏물이 내비치고 있었다.
“하 매! 일비!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다급한 제갈운학의 외침에, 공방을 바라만 보던 두 남매가 순간적으로 칼을 뽑으며, 날아 가는 풍음전을 따라 공격해 갔다.
그 순간, 짧은 탄식을 내쉬는 심은의 중얼거림을, 금비는 들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인가요…….”
금비는 자신도 모르게, 휘청이며 쓰러지려 하는 심은을 등 뒤에서 부축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힘없이 금비의 품속에 안겨 들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금비를 올려다보는 심은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할 짧은 순간, 그를 바라보는 심은의 눈빛 속에서 깊은 유정(有情)을 느낀 그가 입을 열려 했을 때, 단씨 남매의 기합성이 울렸고 금비는 다시 전장(戰場)을 바라보았다.
“이야압!”
기합성과 함께 단일비의 검이 풍음전의 단전을 노리며 찔러 들어가고, 단청하의 검 역시 풍음전의 하체를 쓸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합공은 완벽해 보였고, 풍음전의 몸은 금세라도 두 동강이 날 것만 같았다.
거기에 더해, 어느새 장검(長劍)을 빼어 든 제갈운학 역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주루를 쩌렁쩌렁 울리는 풍음전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살기가 극성에 오른 그의 웃음소리는, 처음의 사람 좋은 노인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마굴(魔窟)에서 솟아나는 웃음소리처럼 주루 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크핫핫핫! 좋다! 아주 좋다!”
동시에 풍음전의 몸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더니, 다시 반대편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질마경혼(疾魔驚魂)!”
온몸을 강기로 두른 질마회강에 이어, 다시 허공에서 회전하는 풍음전의 신형!
그와 함께 몸에 둘러진 질마회강의 검푸른 검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수십 가닥으로 뻗은 검기들은 어떤 것은 굵고 어떤 것은 가늘며, 어떤 것은 천장에 닿고 어떤 것은 일 척(一尺)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검기에 닿는 것은 탁자고 기둥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있었다.
꽈과과광!
“아으윽!”
“아악!”
황급히 공세를 거두며 사력을 다해 풍음전의 검기를 막아 내던 단씨 남매가 팔다리에 검상(劍傷)을 입고 비명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따다다당!
몸을 날려 공격해 들어가던 제갈운학이 순식간에 십여 번의 검변(劍變)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날아드는 풍음전의 공세를 막아 냈지만, 그 역시 입과 코로 피를 토해 내며 밀려나고 있었다.
질마검법의 후삼식(後三式) 중 두 초식, 풍음전이 강호에 나온 이래 단 네 번 펼쳤던 비기인 질마회강과 질마경혼의 연속기가 펼쳐진 것이다.
순식간에, 주루 안은 자욱한 먼지와 비산물로 가득 찼다.
그런 와중에, 허공에서 회전을 멈추고 내려서는 풍음전의 눈빛만이 새파란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흐흐흐…… 내가 이 두 초식을 함께 펼쳐 죽인 놈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강호의 친구들이 믿어 주기나 하겠는가? 과연 제갈세가의 무공은 놀랍고, 성수곡의 절기는 무섭구나…….”
순간, 심은이 자신을 부축해 안고 있는 금비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마왕 같은 기도를 풍기는 풍음전을 바라보면서도 흔들리지 않던 금비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렸다.
“공자님, 저희는 최선을 다했지만 제 수련이 모자라 오늘 이 자리에 뼈를 묻어야 할 듯합니다. 제가 전신전력(全身全力)을 다한다면 저 마두를 백여 초는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그 틈을 타 어서 달아나세요.”
“어찌 저 혼자 살자고 여러분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목숨이란 귀한 것이나 그 정리 또한 인연에 따르는 법, 제 명이 여기까지라면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천천히 가라앉는 흙먼지를 헤치며 풍음전이 다가서고 있었다.
“크흐흐…… 쌍류금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너는 성수곡(聖手谷)의 아이로구나? 그 나이에 백연탄(白煙炭)을 훨씬 지난 성취라니, 그렇다면 아마도 너는 성수곡 가주의 딸인 황의소성녀(黃衣小聖女) 심은이겠군?”

성수곡!
당금 무림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구파일방(九派一幇) 이외에 일성(一城)과 일교(一敎), 삼은(三隱)과 삼패(三覇)가 있다.
그 삼은 중 하나가 바로 성수곡이며, 이곳의 현 가주는 성수초은(聖手草隱) 심일평(沈逸平)이었다.
이미 대홍락의 경지에 이른 달인이면서 자애로운 마음씨로 의술을 베풀고 있어 강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그의 딸인 심은 역시 의술과 무공, 미모 모두가 출중해 강호사미(江湖四美) 중 하나로 꼽혀 관심을 받아 왔지만 그 행동이 은밀하고 강호에 잘 나오지 않아 알려진 바가 극히 적은 상황이었다.
풍음전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금비의 손을 더욱 꼭 쥐며 심은이 다시 속삭였다.
“공자님, 목숨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저희는 여기서 죽더라도, 이렇게 작은 일로 공자 같은 분께서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스러져서야 결코 안 될 일, 어서 달아나세요.”
“저는 소저가 생각하는 그러한 큰 그릇이 못 됩니다. 또한 오늘 이 자리에서 혼자 벗어나기도 힘든 노릇, 소저야말로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저자가 요구하는 물건이란 무엇입니까?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귀중한 것은 그리 많지 않은 법, 더군다나 지금은 목숨을 바치더라도 그 물건을 지키기는 어려워 보이니 일단 그것을 주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금비의 말에, 심은이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목숨보다 귀한 보물이란 것이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우리를 쫓은 것이 저 사람 정도의 마두가 아니었다면 우리들 가문의 후광으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련만…….”
‘만천과해(瞞天過海)…… 무슨 보물이기에 이 젊은 사람들에게 목숨을 건 모험을 강요했을까…….’
마음속으로 탄식하는 금비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심은에게, 풍음전이 질마검의 검기를 일 장(一丈) 가까이 늘이며 성큼 다가왔다.
“흐흐, 오늘 강호에서 이름난 세가의 자식들 넷을 한꺼번에 죽이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편하게 다리 뻗고 잘 일은 그른 듯하구나. 그렇지만 그 따위 일을 걱정해서 손속을 멈춘다면 내 무어라 오늘 일을 말씀 올리겠느냐? 이제 너는 죽을 준비가 되었겠지?”
심은이 고개를 돌려 금비를 바라보았다.
힘없는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며 살며시 웃어 보인 그녀가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키며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심은의 양손에 금빛 서기가 다시 어리기 시작했다.
성수곡의 독문내공(獨門內功), 금천선공(金天仙功)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결전에 대비하고 있는 심은의 모습에, 금비는 다시 탄식했다.
다음 순간, 금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심은의 앞을 막아섰다.
심은이 놀라 외쳤다.
“공자님! 물러서세요!”
금비는 심은의 외침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듯 우뚝 서서 풍음전을 바라보았다.
“으응? 네 녀석이 나를 막아 보겠다는 말이냐? 흐흐, 무공 한 줄기 익힌 것 없는 네놈이 나를 막겠다고?”
조롱하는 듯한 풍음전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금비는 바닥에 떨어진 심은의 장검을 주워 들었다.
검을 흔들면서, 금비가 말했다.
“내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말이오? 어떻게 당신이 그걸 확신하오?”
“클클…… 무릇 내공을 익혔으면 눈빛과 태양혈(太陽穴)을 통해 그 성취가 드러나고, 손과 팔다리를 통해 수련의 흔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네놈의 온몸에 내공의 기운 하나 보이지 않고, 팔다리가 희고 깨끗하니 수련을 한 것도 아니다. 어찌 그것을 모르겠느냐?”
“당신의 말은 틀렸소. 실로 사람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예외란 무수히 있는 법, 눈빛에 내공이 드러나지 않고 손에 수련의 상처자국이 없더라도 무예를 익힐 수 있는 법이오.”
“클클클…… 그래서 네놈의 무공으로 나를 막으시겠다?”
“물론이오. 당신은 내 검을 받아 보시겠소?”
풍음전은 잠시 말을 멈추며 다시 금비의 온몸을 살폈다.
허허로운 자세, 한 손을 뒷짐 지고 한 손에 든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부드러운 미소까지 띠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어디를 봐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백면서생의 모습, 자세는 빈틈으로 가득 찼고 검 끝이 흔들리는 것이 내공이라고는 한 줄도 들어가 있지 않다.
‘젠장할, 차라리 저 심가(沈家)의 계집이 계속 나섰다면 적당히 한두 군데 병신으로 만드는 수준에서 몸을 뺄 생각이었건만……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라 못 본 채 살려 주려 했던 놈이 무덤 자리를 파는군.’
풍음전은 황화예의 경지에 이른 고수다.
그리고 수십 년 강호에서 구른, 눈치 빠르고 교활한 노강호였다.
그는 모르는 척하면서도 심은과 금비의 대화를 모두 들었고 그들이 몸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헛수고를 한 것이라고 이미 판단을 내렸다.
이제 모두 죽고 나면 어차피 밝혀질 일, 지금 순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자 지금 자신의 입장을 계산해 보기 시작한 그는 얻는 것 하나 없이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 한창 세력을 넓히고 있는 신흥방파인 금검파, 게다가 삼은 중 하나인 성수곡과 철천지원수가 될 자신의 입장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청사검 인당과 질마검효 풍음전이 자발적으로 함께 움직인다고 하면, 강호의 사람들이 웃으며 놀릴 것이다.
‘어떻게 그 두 사람이 합작을 할 수 있는가? 자네는 올빼미와 독사가 협력한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만약 지금 이 순간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는 네 사람의 몸을 뒤져 물건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친절하게 약을 써서 치료까지 해 주고 사과의 말을 남기고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성고(聖姑)께서 친히 지휘하시는 일, 이 상황에서 내 맘대로 물러났다가는 팔다리 중 하나는 잘릴 판국이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네 만용을 탓하거라…….’
풍음전이 내공을 가득히 끌어올리며 금비에게 다가섰다.
일 검(一劍)에 그를 척살한 후, 심은과 맞붙어 사지 중 어느 한 군데를 잘라 내 병신을 만들어 놓은 뒤 물건이 없음을 확인하고 사라지리라 맘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금비가 입을 열었다.
“나는, 한때 인연이 있어 두 초식의 검술을 배웠소.”
“흥, 그래서?”
“일단 이 두 초식을 펼칠 테니, 막아 보시기 바라오. 당신이 이를 받아 낼 수 있다면 내가 진 것이겠지요.”
“흐흥, 마음대로 펼쳐 보거라! 오늘 이 자리가 네 묏자리라는 것은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니…….”
금비는 풍음전의 냉랭한 대답에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 두 초식의 이름을 알려 드리겠소.”
“필요 없다! 그 잘난 초식이나 어서 펼쳐 보이거라!”
금비는 그의 노골적인 무시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우선, 첫 번째 초식의 이름은 ‘천청연자고(天晴燕子高)’라고 하오.”
금비의 말에, 혹시나 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심은의 입에 아연한 미소가 어렸다.
‘천청연자고라니, 갠 하늘에 제비가 높이 난다? 어찌 검술 초식에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웃음이 나올 듯한 마음을 다잡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에 떨어진 유엽비도를 수습한 후 단씨 남매의 상세(傷勢)를 보아 주며 이쪽을 주시하던 제갈운학 역시 그 엉뚱한 초식명에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청하와 단일비는 상세가 매우 엄중한 듯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눕거나 엎드린 채 금비와 풍음전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고, 제갈운학은 거동은 가능한 듯 비도를 추슬러 기습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듯했으나, 이 묘한 대화에 절로 어안이 벙벙해진 듯했다.
그러나 이 순간 당장이라도 출수(出手)할 듯하던 풍음전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금비 외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으나 그의 얼굴에는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풍음전을 바라보는 금비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