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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6화)
二章 혈전(血戰)(3)


“그리고 두 번째 초식의 이름은, ‘야랭리노근(夜冷狸奴近)’입니다.”
“풋!”
결국 심은의 입에서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천청연자고(天晴燕子高) 야랭리노근(夜冷狸奴近). 갠 하늘에 제비는 높이 날고, 추운 밤에 고양이는 가까이 붙어 드누나. 이거야 어딘가 낙방선비의 입에서 나올 한시(閑詩) 구절이지, 무공 초식에 붙일 법한 이름이란 말인가?
아마도 여인인 자신의 보호를 받으며 숨고 있을 수 없어 앞에 나서기는 했지만 죽기 전에 자신이 지은 시 한 자락을 읊어 보고 싶었나 보다 하고 심은이 생각하는 동안, 금비와 풍음전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할 말을 다했으니 시작해 볼까요 하는 듯한 금비의 여유로운 표정과 무얼 생각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금비를 바라보고 있는 풍음전.
그 순간, 풍음전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누, 누구냐!”
심은과 금비, 제갈운학까지 풍음전의 이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바라보는 순간, 풍음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시 소리쳤다.
“어디의 누구기에 정정당당히 나서지 못하고 전음으로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썩 나타나라!”
검기를 끌어올린 채 주위를 돌아보며 소리치던 그가 금비와 심은을 한차례 쏘아보며 말했다.
“어린놈들이 운이 좋구나……. 암중(暗中)의 누군가가 방해를 놓는 듯하니 오늘은 이만 물러서 주마. 하지만, 다음 번에 마주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말과 함께, 풍음전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주루의 창을 뚫고 빠져나갔다.
“우우우! 어떤 놈인지 모르겠으나 나를 방해하고서 목숨을 부지할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순식간에 풍음전이 사라지자, 다섯 사람은 아무 말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쨍강!
금비의 손에서 검이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지자, 그제야 일동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금비는 비틀거리며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새하얘진 얼굴에 입가에는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머, 금 공자님! 내상을 입으신 건가요?”
“이, 이것이 내상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가슴이 답답하고 울혈(鬱血)이 생긴 듯하군요…….”
“금 제, 그것이 내상이 맞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네가 풍음전 같은 고수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고 서 있었으니, 그 정도의 내상은 오히려 가볍다고 할 만하네.”
단청하와 제갈운학이 이야기하는 동안, 심은이 가만히 금비의 손목을 잡았다.
주저앉은 와중에서도 금비가 놀란 표정으로 팔을 빼려 했으나 심은은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당당한 장부께서 한낱 계집의 손길에 어찌 이리도 놀라시나요? 지금 공자님은 기혈(氣穴)이 막히고 내상이 제법 심하니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상황입니다. 마음을 편히 하시고 제 손에 따르세요.”
“아, 저는 제법 버틸 만합니다……. 저보다도 다른 분들의 상세가 더욱 엄중한 듯한데, 그분들을 먼저…….”
“금 제, 아무 소리 말게. 우리는 강호의 사람들이니 자신들의 상세 정도는 스스로 돌볼 줄 아네. 다행히 심 소저는 가문의 의술을 깊이 터득하고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하시게나.”
“그래요, 공자님. 지금은 금 공자님의 상세가 제일 치료가 필요하니, 아무 말씀 마시고 심 언니의 도움을 받도록 하세요.”
자유로운 나머지 한 손마저 단청하에게 잡히자, 금비는 웃었다.
“그, 그럼, 죄송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 금비의 말에, 그의 손목을 잡고 있던 심은이 마주 웃어 보이며 부드럽게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 곁을 지켜보던 단청하의 안타까운 물음이 이어졌다.
“어, 언니, 공자님의 상세가 어떤가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내상이 매우 깊은 것 아닌가요?”
“걱정 마, 동생. 금 공자님의 내상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은 것 같아. 일단 응급치료를 하고 며칠 휴식을 취하면 건강에 이상은 없으실 거야. 그보다, 동생의 상처가 훨씬 위중한 듯한데……. 일비의 몸 역시 즉시 치료하지 않으면 큰일 날 거야.”
“누나, 너무한 거 아니우? 하나뿐인 동생은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금비 형님만 이렇게 신경 쓰다니……. 아버님께 꼭 고해 바치고 말 테야.”
“쓰, 쓸데없는 소리! 너란 아이는 날이 갈수록 입버릇이 고약해지니, 대체 어쩌려고 그러니?”

***

“무, 무어라 했느냐? 다시 읊어 보아라!”
“천청연자고(天晴燕子高) 야랭리노근(夜冷狸奴近). 이 두 구절이었습니다.”
화려한 궁등(宮燈)과 회화(繪畵)가 가득 찬 거실 안. 오체복지(五體腹肢)한 풍음전이 고개도 들지 않고서 대답했다.
그의 앞, 휘황찬란한 야광주(夜光珠) 아래에서, 윤기 나는 검은 경장을 걸친 미부(美婦)가 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면사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눈, 번쩍이는 신광(神光)을 흩뿌리며 풍음전을 노려보던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분명, 분명 그 두 구절이었단 말이지?”
“어느 안전이라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분명 그 두 구절의 시구를 자신이 익힌 초식의 이름이라 말했습니다.”
“어찌, 어찌 그 두 구절 시구를 안단 말인가…… 설마, 설마…….”
“…….”
풍음전은 아무 대답 없이 머리를 처박은 채 엎드려 있었다.
‘모 아니면 도다……. 오늘 사지가 잘려 나가든지, 아니면 성고의 마음에 들어 교(敎)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든지 둘 중 하나렷다!’
모질게 마음먹으며 중얼거리는 풍음전의 사지가 가늘게 떨렸다.
‘분명히, 어딘지 모르게 성고를 닮은 데가 있었어…….’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 기억 속의 금비의 모습을 떠올리며 되뇌는 그의 등에 식은땀이 한 줄기씩 솟아나고 있었다.
억겁같이 느껴지던 몇 초가 흐른 후, 미부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어떻게 그 시구를 듣고서 거짓 연기를 하며 몸을 뺄 생각을 했느냐?”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 풍음전은 자신의 도박이 팔 할 이상 성공했다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토해 냈다.
“작년 교주님의 생신 때, 본교(本敎)의 고수님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실 때 저도 말석이나마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성고님께서, 교주님의 생신 축하 선물로 검무(劍舞)를 추시면서 나직하게 읊조리는 이 시구를 듣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날따라 감회가 치솟아 그 구절을 읊었어……. 네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더냐?”
“다행히 우둔한 머리가 기억을 해 주었습니다.”
“어찌 우둔하다 하랴……. 그날 모인 고수들 중에 그 시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아버님 한 분뿐이셨고, 그 시를 기억하고 있는 자는 너뿐일 것이다……. 과연 이름은 틀릴 수 있으나 별호는 틀릴 수 없다는 강호의 속담이 맞구나.”
미부의 말에, 풍음전이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과분한 칭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잘했다……. 그 물건이야 잃어도 다시 찾으면 될 일이나, 행여 너 아닌 다른 자가 그 아이를 만났다면…… 생각하기도 싫구나…….”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풍음전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살며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뒤돌아선 여인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여인이 돌아서자 풍음전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곧 원래의 냉정함을 되찾은 목소리가 울렸다.
“수고했다, 너는 이만 가 보아라.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될 것,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와 그 시구가 알려진다면 네 목을 자를 것이다!”
“존명(尊命)! 어찌 속하가 가벼이 입을 놀리겠습니까!”
“오늘부터 너는 만마당(萬魔黨)으로 옮기거라. 부당주 자리가 공석이라고 들었다, 내 일러 놓을 테니 그리로 몸만 옮겨 가면 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성고! 속하 분골쇄신(粉骨碎身),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만마당의 부당주라면, 지금의 그의 지위에서 두 계급은 족히 오른 자리다.
‘거마효웅(巨魔梟雄)들이 즐비한 만마당의 부당주라니, 꿈이냐, 생시냐? 역시, 그렇다면 그 아이는…… 아서라, 생각이 많으면 말이 되어 나오는 법, 혹여 입에 올렸다가 저 열화(熱火) 같은 성고에게 들켰다간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질 일이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엎드린 채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풍음전이 나간 후, 여인은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가에 조그맣게 이슬이 맺혔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술에 취해 누각에서 노닐다가, 내가 취흥이 돋아 한 자락 검무를 추어 올리자 그이는 웃으며 ‘천청연자고(天晴燕子高)’ 한 줄기를 지으며 나를 가리켰지. 그 시구가 너무 마음에 들어 나는 그이의 품에 안겼고, 그러자 그는 나를 놀리며 다시 ‘야랭리노근(夜冷狸奴近)’ 한 구를 지었어. 그날 동침하여 너를 가졌고, 네가 잠들 때면 언제나 그이는 그 두 구절을 노랫가락에 맞추어 불러 주며 너를 재웠지. 아직까지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여인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무너지듯 의자에 내려앉으면서, 여인은 가늘게 오열하며 중얼거렸다.

***

금비는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어림에 뻐근한 통증이 전해져 오자, 금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슴을 어루만졌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으나 내상이 제법 깊었고, 거의 완치된 것 같으나 아직 움직일 때면 통증이 전해져 왔다.
‘그래도, 내 도박이 맞아 들어갔구나…….’
처음 풍음전이 마교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때는 그를 본 직후였다.
그리고 그의 짐작이 맞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격투 중 그가 내뱉은 말,

‘내 무어라 오늘 일을 말씀 올리겠느냐?’

이 한마디였다.
풍음전 정도의 노련한 인물이, 자신의 말마따나 죽을 때까지 제대로 발 뻗고 잘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드는 것. 그가 원하는 보물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아무리 천하의 기보(奇寶)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가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살계(殺戒)를 펼치려 하는 그의 행동과 말에서, 그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명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를 이렇게 부릴 수 있는 곳이라면 당금 강호에서는 오직 마교가 있을 뿐이었다.
스치는 인연이지만, 심은 일행이 죽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던 금비에게, 풍음전이 내뱉은 한 마디는 낮은 확률이지만 일행을 구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읊은 두 구절의 시구였다.
풍음전이 마교의 고수라 하더라도, 금비가 읊는 시의 뜻을 알고 있을 확률은 극히 적었고, 다행히 그가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냉정하게 판단하여 공격을 멈추어 줄 것인지는 또한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믿을 것이라고는 풍음전의 별호에 ‘효(梟)’자가 들어갈 정도로 영리하고 눈치 빠른 노강호라는 것뿐이었다.
생강은 그냥 묵지 않는다. 육십을 넘기도록 강호에서 살아남은 자는 절대로 우둔할 수 없는 법이라는 오랜 강호의 속담을 금비는 믿었다.
그리고 첫 구절을 읊었을 때 순간적으로 안색이 변하는 풍음전을 보며 확신을 가졌고, 그는 금비의 기대대로 암중인(暗中人)이 있는 듯한 연기를 하면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만약 풍음전이 그 시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금비는 그저 풍음전의 풍마질검 아래에 한줌 고혼(孤魂)이 되었을까?
그것은 오직 금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천천히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식이 새어나왔다.
“어머니…….”
지금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고 오열하고 있으리라.
열 살의 나이에 혈겁을 피해 혼자 살아났을 때, 처음 가진 마음은 그 혈겁의 씨앗이 된 어머니에 대한 분노였다.
찾아가려면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산에 묻혀 풀뿌리를 캐먹으며 연명했던 나날은 어머니에 대한 울분의 표시였다.
남편을 잃은 아픔으로는 모자란다. 자식까지 잃어 그 슬픔을 평생 곱씹으며 살아가라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금비의 복수였다.
열두 살에 산속에서 굶어 죽어 가다 무명노인(無名老人)을 만나 그와 함께 살아오면서 모친에 대한 미움을 버렸으나, 이미 노인과 함께 평생을 산속에서 은거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그는 더하여 모친에 대한 미련 또한 버렸었다.
그러나 노인이 죽고, 그의 마지막 충고대로 세상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 산을 나온 후로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친의 일이었다.
불꽃같은 정열, 열화 같은 성격, 마음먹어 해치우지 못하면 울화병에 걸리고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를 닮아 그저 점잖고 유순한 금비와 부친을 싸잡아 샌님 부자(父子)라고 윽박지르면서도 아버지의 부드러운 몇 마디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신을 끌어안고 서러운 듯 울어 대던 그녀.
굳이 풍음전에게 그 시를 읊었던 것은, 그로 인해 어머니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내비친 것이기도 했다.
“아직도 내 수양은 너무 모자라다…….”
얼핏 눈물이 비치는 듯하던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금비가 되뇌었다.
침상 위에 단정히 정좌하고 앉은 후,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명상에 빠져 들어갔다.
무명노인과의 어렸을 적 한때가 머릿속을 아련히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