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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7화)
二章 혈전(血戰)(4)
‘할아버지, 왜 저를 거둬 주셨나요?’
‘허허…… 큰 기둥을 깎아 보고 싶어졌었단다.’
‘그런데요? 제가 그 기둥이에요?’
‘글쎄, 기둥으로 쓸 나무는 일단 베어야 하는 법이지…….’
‘무슨 말씀이세요?’
‘너를 베고 다듬어서 무림을 떠받치는 재목으로 삼을지, 그대로 놓아두어 하늘을 떠받치는 거목(巨木)으로 클 토양을 만들어 줘야 할지 아직 모르겠구나…….’
‘저는 그냥 할아버지와 이렇게 평생 살고 싶어요. 산과 하늘을 친구 삼아서요.’
‘그래, 그래……. 하지만 세상에서의 네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三章 유정(有情) 또 유정(有情)(1)
금비는 금검문을 나서고 있었다.
좀 더 쉬어야 한다는 단씨 남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함께 제갈세가를 방문하지 않겠냐는 제갈운학의 권유도 웃음으로 거절한 후, 금비는 길을 떠나는 중이었다.
금검문의 문주, 금검일존(金劒一尊) 단우천(丹羽天)은 처음부터 금비에 대해 별다른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단청하가 금비에게 야릇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자마자 알게 모르게 금비가 빨리 떠나 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드러내곤 했다.
무황성의 인물들은 아예 만나 보지도 못했다.
사실 무황성의 인물들을 만나는 것이 귀찮기까지 했던 금비로서는 그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사흘 동안 금검문에 머무르면서 금비는 딱 두 번 단우천을 만났는데, 두 번 다 별다른 대화 없이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는 만남이었다.
하기야 강호의 신흥방파의 주인으로서 무공 하나 익힌 흔적 없어 보이는 백면서생에게 하나밖에 없는 외딸이 관심을 보인다면 어느 아버지인들 반가워하랴.
해가 뜨기도 전에 짐을 꾸리는 금비의 모습에, 얼굴에 아쉬움을 가득 담으며 꼭 떠나야 하느냐고 몇 번을 물어보던 단청하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꼭 가셔야 하나요? 물론, 물론 언제까지나 머무르실 수는 없겠지만…… 제 마음을 헤아려 조금 더 머물러 주실 수 없나요? 이렇게 급하게 가셔야만 하나요?”
“하하. 단 낭자, 강호세가의 금지옥엽께서 한낱 필부에게 너무 관심을 두시면 아니 됩니다.”
“……제 마음을 아시면서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하나요?”
“그저 스치는 인연도 있는 법입니다…….”
시선을 돌리며 대답하는 금비의 말에, 눈빛 가득 어떤 의지를 담고서 그를 바라보던 단청하였다.
금비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소녀의 방심(芳心)에 잠시 스쳐 가는 바람 정도인 것,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잊히리라…….’
이것이 훗날 단심낙화(丹心洛花)의 애사(哀史)라 일컬어지는 비극의 시작, 단청하의 성격을 좀 더 알았다면 금비는 그녀와의 인연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오히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사흘 내내 자신의 곁을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단일비의 모습이었다.
금검파에 들어간 이후 사흘 내내, 단일비는 금비의 곁에 붙어 살았다.
둘째 날부터는 아예 잠자리까지 쳐들어와 금비의 침상에서 함께 잠들었던 것이다.
“헤헤. 형님, 전 금비 형님이 너무 좋아요.”
“하하…….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할 만하냐?”
“음…… 글쎄요, 꼭 집어서 말하긴 힘들어요. 하지만 형님은 내가 이때까지 본 그 어떤 무인보다도 당당하고,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학자보다도 지혜로우세요. 그러면서도 곁에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이야기를 나누면 가슴이 툭 터지는 것 같아요.”
“하하. 네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나.”
“어어? 정말이에요. 아아, 왜 형님이 무공을 익히지 않으셨을까요? 형님이 무공 고수라면 전 형님을 따르며 함께 마음껏 강호를 주유했을 텐데…….”
“녀석, 금검파의 대를 이을 인물이 강호에 나돌아 다니기만 한다면 그 또한 걱정거리일 것이다.”
“형님, 저 단일비가 이깟 자그마한 금검파에 매여 살아갈 것 같은가요? 저는 자라면 이 좁은 금검파를 떠나 강호를 훨훨 날아다닐 거예요.”
“하하. 인연이 따른다면, 너라면 그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인연이 따라야 하나요?”
눈을 빛내며 묻는 단일비에게, 금비는 아무 대답 없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키워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다……. 그 자질과 성정, 갈고닦으면 대기(大器)가 될 만한 마음의 그릇……. 내가 조금만 더 연륜이 있었다면, 내 앞일이 조금만 덜 위험했다면 공을 들여 가르쳐 볼 만한 아이련만…….’
훗날 결국 단일비는 금비의 단 하나뿐인 직계 제자가 되고, 타고난 재능에다 단청하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진 금비의 애정을 받아 그의 의발(衣鉢)을 전수받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 훗날의 이야기,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운명은 서로를 헤어지게 하고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각, 금비는 대로를 벗어나 숲으로 난 소로(小路)를 접어들고 있었다.
한가로이 유람하듯 걸어가는 금비의 시선에 커다란 고목(古木) 아래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심은이 거기 서 있었다.
천천히 멈추어지는 금비의 발걸음. 금비는 자신도 모르게 심은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소리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두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위험한 길인가요?”
“하하. 필부의 길에 따르는 위험이라야 별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가만히 금비의 눈을 바라보는 심은의 시선.
호로록 한숨을 내쉬더니, 심은이 고개를 숙였다.
“금검천의 단가주는 참으로 멍청한 사람……. 그는 공자님의 진가를 천 분지 일도 알아보지 못했어요.”
“…….”
그저 웃음을 띤 채, 금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황성에서 온 사람들은 삼대 봉공(奉公) 중 하나와 그 수하들……. 그 사람들이라면 공자님의 숨기고 있는 능력을 어렴풋이 눈치 챌 수도 있었을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일부러 그들에게 공자님의 이야기를 대강 전하고 말았어요.”
금비의 얼굴에서 어느새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심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것이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제 생각이 틀렸나요?”
“소저의 안온(安溫)한 배려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부탁이 있어요.”
고개를 들며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심은이 말했다.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던 금비가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무엇인지요? 소저의 부탁이라면 불초, 부족한 능력이나마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그를 바라보는 유정 가득한 시선……. 금비는 풍음전과의 사투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심은의 눈빛을 다시 느꼈다.
“저를…… 저를 은 매(恩妹)라고 불러 줘요.”
아무 대답 없이 금비는 심은을 바라보았다.
심은 역시 말없이 금비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간 시간이 흐른 후, 심은이 결국 점점 붉어지는 얼굴을 숙이려 했을 때 금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하시오, 은 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심은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심은이 대답했다.
“비(備)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도 항상 건강하세요. 저는, 저는 오라버니를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이것이 정해(情海)란 것인가…? 이것이 심마(心魔)보다 무섭다고 했던 선인의 말씀을 내 믿지 않았더니, 오늘에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구나…….’
두 눈 가득 눈물을 담은 채 금비를 바라보는 심은의 마음 가득한 시선에 벅차게 차오르는 애정을 느끼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그런 그에게, 심은이 옷자락으로 눈가를 닦으며 웃어 보였다.
“이제 가세요.”
“은 매…….”
“어서 가세요. 소녀 역시 어리나 강호의 사람, 장부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막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부디 몸을 보중하시라는 제 말만은 잊지 말아 주세요.”
“은 매 역시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오.”
무정하기까지 한 간단한 작별인사와 함께, 금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금비의 등을 바라보며, 심은은 나무 아래 서 있었다.
저녁까지 걸은 끝에, 금비는 산을 거의 벗어날 수 있었다.
어스름히 해가 지려는 시각, 조그마한 시냇가에 접어든 금비가 물을 마시려 몸을 굽히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아이야, 잠시 날 좀 보겠느냐?”
고개를 돌린 금비의 눈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백발에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금비가 놀란 기색도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렇단다, 아이야. 네 이름은 무엇인고?”
“저는 금비라고 합니다.”
그의 대답에, 노인은 찬찬히 금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그런 노인의 시선에 금비는 일말의 불쾌감도 드러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잠시 후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너는 금씨(金氏)가 아니야. 네 본명은 무엇이지?”
“그것이 제 본명입니다.”
“네가 진정 금씨라고?”
말과 함께, 노인이 다시 금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는 적의는 찾아볼 수 없었고, 마치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만이 가득한 것을 금비는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노인이 웃으며 물가의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래, 이름이 무슨 상관일까. 내 너를 처음 보자마자 알 수 있었거늘, 쓸데없는 이름자 따위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 잠시 앉아 보련?”
부드러운 말에, 금비는 조용히 노인의 곁에 앉았다.
노인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누군 줄 알겠느냐?”
“아마도 알 듯합니다.”
“나를 안다……. 정녕 내가 누군지 알겠단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허허. 그런데도 너는 내게 제대로 인사 한 번 않고 있단 말이냐?”
노인의 말에, 금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노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건강하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허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더냐?”
“다행히 어렸을 적 기억을 별로 잊고 있지 않아 두어 번 뵈었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어렸을 적부터 네 총기(聰氣)는 따를 사람이 없었지……. 건강하게 자랐구나.”
말없이 웃는 금비를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노인이 말을 이었다.
“네 어미는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오늘까지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죄스러워 도저히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다고 하더구나.”
“그러실 필요 없는 일을……. 어머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죄스러워 마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네가 만나서 말하지 않고? 어미를 만나러 가지 않을 작정이냐?”
“언젠가는 만나 뵐 것이나 지금은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네가 무슨 할 일이 있다는 말이냐? 이 험난한 강호에서 무공 없는 몸으로 어떻게…… 아니, 잠깐?”
노인이 갑자기 무언가 느낀 듯한 얼굴로 금비를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는 시선을, 금비는 말없이 받고 있었다.
“맥문(脈門)을 줘 보겠느냐?”
금비가 말없이 웃으며 손목을 내밀었다.
살며시 그 손목을 잡고 눈을 감고 있다가 잠시 후 눈을 뜬 노인의 얼굴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임독양맥(任督兩脈)이 뚫려 있고 세맥(細脈)까지도 막힘이 없구나. 단전(丹田)은 비어 있으나 넓고 깊어 바다와 같다……. 세상에 이런 괴이한 내공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번쩍!
노인의 눈에서 한순간 신광(神光)이 폭사되더니, 이내 부드럽고 깊은 눈빛으로 되돌아왔다.
“사문(師門)이 어디냐?”
“사문이라 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네 일신(一身)의 무공은 대성한 것이냐?”
“무공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공부는 이제 문턱을 넘어선 듯합니다.”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잡은 손목을 놓아주며 노인은 금비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면서, 이 괴이한 노소(老小)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노인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네 아비 또한 정파무림이 낳은 천고기재(千古奇才)란 소리를 들었었지……. 내 핏줄 또한 마도일맥(魔道一脈), 어찌 네 성취가 범부(凡夫)와 같을 수가 있을까…….”
노인이 금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하하핫! 구십을 넘기며 후세를 염려하던 시간들이 오늘 한순간에 씻겨 나가는 듯하구나! 그래, 공부를 게을리 말고 사명(使命)을 다하거라. 네가 가려는 길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이 사마충양(司馬衝陽), 너를 위해서라면 본교를 통째로 들어 바치겠다!”
오오, 사마충양!
십 세에 마교에 입문해 사십 세에 부교주로 등극, 오십오 세 되던 해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기존 교주 조중기(趙中基)를 몰아내고 힘으로 마교를 장악한 마도 최고의 풍운아(風雲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