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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8화)
三章 유정(有情) 또 유정(有情)(2)
과감한 결단력과 어떤 열세도 뒤집어 버리는 불길 같은 투혼, 수많은 마도고수 중 홀로 우뚝 서서 붙여진 별호가 마중마(魔中魔), 중원 천하에 맞상대할 이가 없다 하여 불가대적(不可對敵)이라 불리는 이가 바로 이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사마충양이 몸을 일으키며 금비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가야겠다.”
“벌써 가시렵니까?”
“네가 살아 있고, 이렇게 훌륭히 자랐음을 확인했으니 가야지……. 가서 네 어미를 어서 안심시켜 줘야겠구나.”
“그럼, 살펴 가십시오.”
담담하게 말하는 금비를 향해, 갑자기 사마충양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네 이놈! 네놈이 정녕 끝까지 나에게 할아비란 말 한 번 안 할 작정이더냐?”
섬전처럼 폭사되는 신광, 수염 한 올 한 올이 일어서는 듯하더니 보통 체구의 몸이 마치 태산처럼 크게 보였다.
석년 눈짓 하나로 강호를 진동하던 마중마의 위엄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금비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래도 이놈이! 볼기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이어지는 사마충양의 질책에 금비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보중(保重)하십시오, 할아버님.”
엎드려 절하는 금비를 바라보는 사마충양의 눈길은 다시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금비가 고개를 들었을 때 사마충양의 신형은 이미 허공에 떠올라 멀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금비의 귓가에, 바로 곁에서 말하는 듯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강호는 말 그대로 도산검림(刀山劍林), 네가 상상할 수 없는 흉험함이 곳곳에 가득하니 언제나 마음을 놓지 말 것이며 주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언제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만 하거라……. 어디서든지 네가 부르기만 한다면 할아비는 달려갈 것이다.”
시선에서 사라져 가면서도, 금비의 귓전에 들리는 사마충양의 목소리는 또렷하기만 했다.
“네 어미에게 네가 살아서 세상에 나왔다는 말을 듣고 나 말고도 한 녀석이 더 너를 보겠다고 교(敎)를 나왔느니라. 나나 네 어미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골칫덩이라, 만나게 되면 좋은 낯으로 대해 줬으면 한다…….”
사마충양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금비가 조용히 말했다.
“건강하십시오……. 일간 찾아뵙고 조손(祖孫)의 예를 다해 오늘의 불민함을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만남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지 못했다.
四章 월하검무(月下劍舞)(1)
며칠 후, 금비는 하남성(河南城)에 들어서고 있었다.
하남성 중심에는 개봉(開封)이 있고, 개봉에는 무황성이 있다.
그의 목적지는 무황성이었던 것일까?
또한 하남성에는 숭산(嵩山)이 있고, 숭산 소실봉(小室峯)에는 구파일방의 수좌라 할 수 있는 소림(少林)이 있다.
금비가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하릴없이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유유자적 강호유람을 나온 선비의 모습일 뿐, 어떤 목적의식이나 서두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금비의 발걸음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다시 이틀이 지난 후 해가 뉘엿뉘엿 져 갈 즈음, 그는 개봉에서 사흘 거리의 조그마한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의 초입에 이르러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눈길이 왠지 모를 비감(悲感)에 젖어 있는 듯했다.
금비는 마을에 들어서지 않고, 마을 한편으로 뻗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중턱에 다다를 즈음에는 이미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금비는 마치 제 집 앞을 걷는 듯 산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정상의 십여 리 아래, 금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온통 잡초가 자라 있고 어지러이 흩어진 잔해들로 무성한 분지였다.
한때 사람이 살았던 곳인 듯 분지 여기저기에는 집의 잔해로 보이는 파편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은 무성히 자라난 초목에 둘러싸여 있었다.
분지의 한쪽 구석, 사람 허리만 한 돌을 깎아 만든 비석이 서 있었다.
무림공적(武林公敵), 유자성(劉慈成) 척사비(斥邪碑)
백도무림의 괴멸을 꾀하여 마도와 내통하고 조사(祖師)를 판 천하죄인 유자성의 음모를 분쇄하고 그를 척살한 후, 여기에 경고비를 세우노라.
비석에 쓰인 글이었다.
제법 오랜 세월이 흐른 듯 비석은 비와 바람에 여기저기 마모되어 가고 있었으나 웅혼한 내공으로 파내 쓴 글씨는 또렷했고, 밝은 달빛 아래에서 읽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금비는 잠시 동안 비석의 글귀를 음미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비석을 향해 절을 올렸다.
일 배, 이 배, 다시 반 배.
절을 올린 후 그 자리에 꿇어앉아, 담담한 눈길로 비석을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당신을 보낼 때 소자(小子) 어리고 아둔하여 뼛조각 하나 살점 하나 수습하지 못했으니, 이는 자식으로서 죽을죄입니다. 이제 예전 살던 곳을 찾아 지난 세월의 흔적을 보려 하나 어디에서고 찾을 길 없고, 그나마 당신의 이름자라도 새겨져 있는 이 비석으로 묘(墓)를 대신하려 합니다. 늘 소자에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길 공명(功名)은 부운(浮雲) 같고 세상사 어지러워도 당신 혼자 구름 위에 노닐겠다 하셨으니, 묘위에 적힌 글귀 어떠하든 유쾌하게 선계(仙界)에서 노니시리라 믿습니다. 채 펼치지 못하신 큰 뜻을 소자 각골명심하고 있사오니, 아버님, 편히 쉬십시오.”
낭랑하게 읊어 가는 금비의 목소리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이 맑고 청량했고, 그 얼굴은 슬픔의 빛을 찾을 길 없이 부드럽고 맑았다.
말을 마친 후 몸을 일으킨 그는 다시 한 번 폐허를 둘러보고는 이내 걸음을 옮겨 그곳을 벗어났다.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한 금비는 한 식경이 지나 산의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정상에 올라서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곧 한쪽의 돌무더기를 향해 다가갔다.
그다지 완력이 강해 보이지 않는 그의 몸, 팔을 걷어붙이고 돌무더기를 하나 둘씩 걷어 내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에는 곧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고 손가락 끝에는 핏자국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금비는 한 마디 말이나 힘든 표정 없이 묵묵히 돌을 하나하나 치워 가고 있었다.
돌무더기를 다 치워 내고 바닥의 땅이 드러난 것은 그가 일을 시작한 지 거의 반 시진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곧이어 그는 주변의 튼튼한 나뭇가지를 꺾어 그것을 삽 삼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일 장가량을 파 들어갔을 때, 무언가가 흙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금비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다시 손을 놀려 땅을 파내자 흙 속의 물건이 온전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금비는 그 물건을 땅속에서 꺼내 손에 쥐었다.
흙이 묻어 더러워진 흰 보자기에 싸인 물건, 그가 겉을 감싼 천을 풀어내자 한 자루 고색창연한 칼이 나타났다.
새하얀 검경(劍經)에 옥빛 검집, 별다른 장식 하나 없었으나 은은한 기품이 서려 있는 검이었다.
스르릉.
금비의 손에 칼이 뽑혀져 나왔다.
월광에 은은하게 빛나는 장검. 검신(劍身)은 특이하게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하얀 손잡이와 역시 하얀색 검격(劍格)에 조화되어 칼은 마치 달빛으로 빚어 낸 듯 반짝이고 있었다.
검신에는 흘러내리는 초서체로 단 한 자, ‘고(古)’가 새겨져 있었다.
이검이 바로 과거 유운신검(流雲神劍) 유자성(劉慈成)의 독문병기(獨門兵器). 옥루고검(玉淚古劍) 이라 불린 신검이자, 이후 금비의 평생 동안 함께 강호를 헤쳐 나가는 애병(愛兵)이었다.
마치 연인의 손을 쓰다듬듯 검신을 쓰다듬던 금비는 문득 칼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쏟아지는 달빛 속에서, 금비의 몸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 손에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검결을 짚으며, 허공에 몸을 띄운 채 금비의 몸은 춤추듯 흘러가고 있었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금비의 몸 주위를 돌다가 허공을 가로지르고, 다시 물결치듯 흐르다가 달빛처럼 쏟아지는 휘황한 검광(劍光). 수십 개의 원을 그렸다가 하나의 극(極)으로 모이고, 불꽃처럼 터져 허공을 가득 메우더니 이윽고 둥글게 뭉쳐 달과 함께 밤하늘을 떠가는 검로(劍路).
깃털처럼 허공에 뜬 채, 금비의 검무(劍舞)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달빛 아래 노니는 신선처럼 산 정상을 가득 메웠다.
금비 평생의 성명절기(盛名絶技)가 되는 천애무극검결(天涯無極劍訣)의 탄생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감(悲感), 달빛 속의 뜻 모를 깨달음, 다시 세상에 나왔으나 무엇 하나 확실한 것 없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젊은이다운 자신감……. 한꺼번에 들이닥친 수많은 번뇌(煩惱) 속에서 금비가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얻은 이날 밤의 돈오(頓悟, 깨달음)는 그가 이후 창안한 수많은 절기(絶技)들 중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절정(絶頂)의 무예. 그 역시 이날 밤의 환상 같은 깨달음을 다시 온전히 체득하기 위해 앞으로 오랜 시간 고련하며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금비의 춤사위가 잦아들며, 그의 몸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섰다.
검신을 등 뒤로 세워 들고 발끝으로 사뿐히 땅을 밟으며 내려선 그는, 눈을 감고 쏟아지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열리며, 흘러나오는 웃음 섞인 목소리.
“고(古)야, 고(古)야……. 내 너를 잡지 않고 평생 초부(樵夫)로 늙으려 했지만, 결국에 너를 쥐고 또한 깨달아 버렸구나…….”
그가 눈을 뜨고 몸을 돌리는 순간, 산아래 풀숲에서 나직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아…….”
금비는 아무 말 없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고 섰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무표정하던 금비의 얼굴에 조금씩 웃음이 번져 갈 때쯤 한 인영이 몸을 날려 금비의 일 장쯤 앞에 내려섰다.
새카만 경장에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긴 머리칼. 금비와 거의 비슷한 키의 늘씬한 흑의 미녀가 눈앞에 서 있었다.
달빛 속에서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며, 소녀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가가(呵呵)?”
금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내 어찌 귀여운 사촌누이를 잊을 수가 있겠소? 그동안 잘 지냈소, 소연(小燕)?”
소연이라 불린 미녀가 해맑게 웃으며 금비의 품에 안겨 들었다.
“정말 유 오빠로군요? 유 오라버니! 살아 있었군요? 이모랑 할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세요? 그리고 저도요! 살아 있었군요, 정말로 살아 있었어요! 으아앙…….”
품속을 마구 파고들며 울음을 터뜨리는 소녀의 육탄공세에, 하늘이 무너져도 당황할 것 같지 않던 금비의 얼굴에 당황함이 어렸다.
“소, 소연. 연 매(燕妹), 잠깐, 잠깐 이것 좀 놓고…….”
“싫어, 싫어요! 얼마나 걱정했는데, 살아 있었으면서 연락 한 번 안 주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빠요, 오라버니. 정말 나빠요.”
“하, 하하. 이것 참…….”
금비는 벌게진 얼굴로 하늘만 쳐다보며 소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소녀, 소연은 눈물로 금비의 앞섶을 적시며 막무가내로 그의 품속에서 바동거렸다.
바람과 달빛만이 두 사람을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
“그런데, 오빠. 이름을 바꾸셨다구요?”
“하하. 이름자 따위가 뭐 중요할까, 신경 쓰지 말아라.”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어요? 이모님이 얼마나 슬퍼하셨는데. 자기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시며…….”
“어머님 때문이 아니야. 그리 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
어머님이란 말을 입에 담는 금비의 표정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래, 이제 어쩌실 거예요, 오빠? 이모부의 복수를 시작하실 거죠? 정인군자(正人君子)의 탈을 쓴 정파의 위선자들, 이제 오빠가 강호에 나오셨으니 모두 몰살해 버려야죠!”
꽃잎처럼 아름다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살벌하고 격정적이었다.
금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저 불같은 성격, 역시 어머니와 꼭 닮았어……. 외할아버님의 혈통은 아마도 모계(母系)로 유전되나 보다…….’
담담한 목소리로 금비가 대꾸했다.
“아니, 연 매. 나는 아버님의 복수를 위해 강호에 나온 건 아니다.”
“무, 무슨 말이에요? 비명에 가신 이모부님의 복수를 안 한다니, 자식으로서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아니…… 혹시 비밀리에 복수를 계획하고 계신 거예요? 맞구나, 그래서 이름도 바꿨구나! 아니면, 혹시 무공이 모자라 그러시나요? 그렇다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맞아요! 아까 시전하신 무공은 대체 뭐죠? 지금까지 그런 무예는 본 적이 없어요. 아니, 그것이 무예가 맞긴 맞나요? 어떻게 그런 검로가 있을 수 있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말에, 금비는 대답 없이 웃고만 있었다.
마구잡이로 질문을 쏟아 내다가 그저 웃고만 있는 금비를 본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또 저 웃음……. 오빠가 열 살도 채 안 되었을 때도 저 웃음만 보면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 고개를 돌리곤 했었지. 저 부드러운 웃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고개를 돌려 금비를 바라보며, 다시 그녀는 자신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