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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9화)
四章 월하검무(月下劍舞)(2)
“비 오라버니, 아까의 무공은 무엇이었죠?”
진지해진 물음에, 금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글쎄…… 그것은 내가 순간적으로 얻은 깨달음의 표현이야. 만약에 내가 그림을 그리는 화공(畵工)이었다면 땅바닥에라도 그렸을 것이고,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樂工)이었다면 악보로 옮겼겠지. 역시 무부(武夫)의 길을 가기로 한 터였는지, 아니면 아버님의 검을 손에 든 터라 그리했는지 모르지만…… 어설프나마 나도 이제 내 무공을 갖게 되었군. 하하.”
“어설프다구요? 그런 무예는 이 조해연(趙海燕)이 태어나서 이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니 그 비슷한 것도 본 적 없어요. 숱한 마공절기를 배워 왔고 정파의 신공들을 구경했지만, 오빠가 보여 준 무예는 뭐랄까……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차원이 다른 어떤 것이었어요.”
조해연(趙海燕).
마중마 사마충양에게는 아들 없이 두 딸이 있었다.
큰딸 사마추상(司馬秋霜)이 정파의 기린아로 떠받들리던 유자성과의 열애 끝에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마교를 나가 버리자, 사마충양은 둘째딸 사마옥상(司馬玉霜)을 그가 패배시킨 전대 마교주 조중기의 외아들 조일기(趙一基)에게 시집보냈다.
마교의 단합을 위해 전대 교주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고 그 자식으로 자신의 후계를 잇게 한다는 그의 호방한 구상은 당시 마도인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게 했다.
이후 사마옥상은 일남 일녀를 낳았는데, 그들이 바로 조해연과 그 두 살 위 오빠, 금비와 동갑내기인 조천악(趙天岳)이었다.
사마옥상과 조중기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남매를 낳고 오 년 내에 병으로 죽었고, 그 후 사마충양은 둘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난 네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여덟 살 나이에 처음 만났을 때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이던 조천악의 첫 마디가 귀에 선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조해연이 친오빠인 조천악보다 금비를 더 좋아하며 따른 반면, 조천악은 금비에게 무조건적인 적의를 드러내며 함께 놀려 하지도 않았다.
무공이라고는 건강을 위해 겨우 내공심법만 익힌 금비를, 제법 위력적인 마공들로 괴롭히던 그였다.
바람처럼 부드러운 금비와 대조적으로 산악처럼 굳건한 조천악의 기상은, 사마충양에게 좋은 비교거리가 되고는 했다.
‘한 녀석은 구름이요 한 녀석은 바위니, 두 녀석이 서로 친해질 리가 없지. 요 두 놈은 친해지게 하느니 차라리 경쟁하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득이 될 듯하구나.’
서로 티격태격하는 금비와 조천악을 바라보며 사마충양이 웃으면서 던진 말이었다.
아련히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어 있는 금비에게, 조해연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오빠, 그 무공을 오빠가 직접 창안한 것이라구요? 어떻게 오빠 나이에 그런 무공을…… 지금 다시 한 번 보여 줄 수 있나요?”
“음……. 그럴까? 나 역시 아까부터 그 무예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중이었다. 어디, 다시 한 번 시전해 보마.”
말과 함께 금비가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옥루고검을 뽑아 들었다.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바라보는 조해연의 앞에서, 금비는 잠시 검을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잠시 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던 그는 두어 번 검 끝을 치켜올렸으나 그뿐, 더 이상 동작을 이어가지 못하고 검을 거두어 들였다.
“왜…….”
“글쎄, 도저히 펼칠 수가 없구나. 지금 그 무예를 펼친다면 비슷한 무언가는 될 수 있겠으나 아까의 무예를 온전히 펼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불완전한 것을 펼치려 하다가는 조금 전의 깨달음마저 완전히 놓칠 것만 같아서 두렵다.”
“그럼 어떻게 하죠? 기껏 창안한 무예를 다시 잃어버리다니, 그럴 순 없는 일 아니에요?”
“하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결국 깨달음의 문제인 것, 내 이미 깨달았으니 몸에 익히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앞으로 언젠가 인연이 닿았을 때 이 무예는 온전히 내 것이 될 것이다.”
“오빠의 그 알 듯 모를 듯이 사람 헷갈리게 하는 말투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요? 하지만 해연은 그런 오빠가 좋아요.”
“다 자라서 시집갈 때가 된 계집아이가 어찌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리느냐? 네 무서운 오라비가 안다면 경을 칠 거다.”
웃으며 말하는 금비를 바라보며, 조해연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치이, 목석. 내 마음도 모르면서…….”
“무어라 했느냐?”
대답 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는 조해연의 귓가에 마교를 나올 때 자신을 불러 당부하던 금비의 친모, 사마추상의 당부가 맴돌았다.
‘해연아, 네가 어릴 때부터 나는 너를 우리 비아(備兒)의 짝으로 점찍었단다. 너도 비아를 좋아하지? 그놈의 유씨(劉氏) 집안은 대대로 명이 짧기가 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집안이야. 비아의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마흔을 못 넘기셨고, 나 때문이긴 하다만 내 남편 역시 갓 서른을 넘겨 죽었다.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우리 비아 역시 그 집안의 핏줄이니 불안하기만 해. 이번에 비아를 만나거든, 어떻게든지 교로 끌고 와서 결혼식을 올리든지 그게 안 된다면 일단 동침이라도 해서 가문을 이을 수 있도록 노력해 다오. 이모가 오죽하면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하겠니? 부탁한다, 해연아…….’
자신도 모르게 새빨개지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으며, 조해연이 중얼거렸다.
“이모도 참…… 어떻게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그런 말을…….”
“뭐라고? 나한테 하는 말이면 알아듣도록 이야기해 주려무나.”
화들짝 고개를 저으며, 조해연이 말을 돌려 물었다.
“아, 아녜요! 그보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저와 함께 교로 돌아가서 이모님을 뵈어야죠? 그런 후 할아버님의 도움을 받아 이모부님의 복수를 하면 될 거예요.”
“해연,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아버님의 복수를 생각하고 있지 않아.”
“왜요? 이모부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잊으셨어요? 이모님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이모부님의 죽음을 잊으신 적이 없어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모님께서는 오직 이모부님의 복수를 위해 살아오고 계세요. 정파 놈들이 방비를 철저히 하는 데다 근래 우리 마교의 힘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복수의 시기가 늦춰지고 있긴 하지만, 이모님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의 대가를 받아 내시고 말 거예요. 그런데 오빠가 이모부님의 복수를 생각하지 않으신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연 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야. 복수를 하겠다는 어머님의 마음까지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만약에 어머님의 생각대로 정파무림과 마도무림의 결전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 또한 무림의 생리인 것. 하지만 내가 아버님의 복수를 위해 행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오라버니는 왜 세상에 나오신 거예요? 부친의 복수를 할 생각도 없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도 없는 거라면 왜 다시 강호에 나오셨냐구요! 그냥 아무도 모르게 심산에 묻혀서 유유자적하다 늙어 죽을 것이지, 무엇 때문에 고고하신 몸께서 이 풍진 속에 내려오셨나요?”
점점 흥분해서 이제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금비에게 따져 묻는 조해연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 듯이 살벌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던 금비가 이내 말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인연이 다하지 않았고, 내가 해야만 할 일이 있다는 선사(先師)의 말씀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네 앞에 있는 것이지.”
“하! 선사라구요? 그 잘난 무공을 가르친 사람인가 보죠? 그 사람의 한마디 말이, 누명을 쓰고 수십 번 칼질에 난도질당해 돌아가신 부친의 원한보다 더 귀중한가 보죠?”
‘아니, 그분은 내게 무공 따위는 가르치지 않으셨다. 스승이라 부르는 것도 그분 생전에는 허락하지 않으셨던 일, 돌아가신 이제야 내 의지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금비의 마음속 되뇜을 깨뜨리며, 조해연의 분노 섞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한 번 물어보겠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정녕 부친의 복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계신 건가요? 혹여 비밀리에 진행 중인 복수의 계획이 있고, 그것이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일이라 거짓으로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다고 한 말씀만 해 주세요. 그러면 이 해연,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아는 척하지 않으며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드리겠어요. 오라버니, 어느 쪽인가요?”
“연 매, 나는 처음부터 네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나는 아버님의 복수를 위해 강호에 나온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것을 위한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르르.
조해연의 온몸이 떨리더니, 그 몸에서 불같은 살기가 타올랐다.
온몸을 휘감으며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빛나는 강기는 사마충양의 호심내공(護心內功)인 천마심공(天魔心功). 조해연이 온몸으로 분노를 뿜어내며 금비에게 소리쳤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네요! 유운비(劉雲備), 아니 금비라고 불러 드릴까요? 어찌 사람으로 태어나 부모의 복수를 외면하고 그렇게 얼굴을 치켜들고 다닐 수 있지요? 마음대로라면 사지 중 하나를 끊어 내서 이모님이나 외조부님을 대신해 벌을 내려야 마땅하지만, 이 일을 고한 후에 그분들이 당신께 벌을 내리시는 것을 기다려 주겠어요. 다시 만날 때는 오늘처럼 말로써만 징계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각오하세요!”
폭포 같은 독설 이후 조해연은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듯이 금비를 노려보다가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런 뒷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던 금비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 열화와 같은 성격과 앞뒤 가릴 것 없는 독설, 마치 어머님이 오셨다 가신 듯하구나. 유순하셨던 이모님의 딸이 어찌 성정(性情)은 저렇게도 내 어머님을 닮았을까…….”
조해연이 사라져 간 허공을 말없이 바라보던 금비는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손에 검을 쥐고 풀숲을 헤치며 내려가는 금비의 입에서 낭랑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산 기운 저녁이라 더욱 고운데[山氣日夕佳]
나는 새 짝을 지어 돌아가누나[飛鳥相與還]
이 가운데 참된 뜻 있으나[此中有眞意]
말하려 하니 이미 말을 잊었구나[欲辨已忘言]
술에 취하면 언제나 검날을 튕기며 부르곤 하던 유자성의 애시(愛時)인 도연명의 시구를 노래하는 금비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깃들어 있었으나, 그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본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아무도 없었다.
금비는 묵묵히 관도(官道)를 걸었다.
이 길은 개봉으로 이어지고, 무황성에 연결되는 길이었다.
걸어서는 사흘 이상 걸리는 거리, 금비의 걸음은 서두름이 없었고, 손에 든 옥루고검은 헝겊으로 감싸여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듯 오후를 지나 저녁으로 접어드는데도 햇살은 꽤나 따가웠다. 그는 길가 주막에서 은전 몇 푼을 주고 산 초립(草笠)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느 순간, 금비는 등 뒤로 달려오는 신법의 기세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힐끗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이남 일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순간,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어렸다.
‘제갈 형…….’
이남 일녀 중 한 사람은 바로 제갈운학이었다.
금비는 아는 체하지 않고 앞만 보며 계속 걸었다.
남녀들은 금비를 발견했을 법하나 신법을 줄이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대로나 관도에서는 무공을 펼치지 않고, 신법을 펼쳐 이동할 때는 일반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한다는 무림의 묵계를 모를 리가 없으련만, 지금 저렇게 신법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매우 급한 길을 재촉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들은 바람처럼 금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금비는 제갈운학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조금은 다행스러워했다.
굳이 그를 피할 필요까지는 없었으나 별로 다시 만나 인연을 맺고 싶지 않은 것이 금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금비를 스쳐 십여 장을 달려 나가던 제갈운학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이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가운 목소리.
“금 제! 금 제 맞지?”
그가 말과 함께 몸을 날려 금비에게 다가오자, 함께 달려가던 두 남녀 역시 몸을 멈추고는 금비와 제갈운학을 바라보았다.
반갑게 손을 맞잡으며, 제갈운학이 말했다.
“역시 금 제로군? 금검파에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 못내 아쉬웠건만, 여기서 이렇게 우연히 만나는군? 하하. 역시 우리의 인연은 질긴 것 같아.”
“오랜만입니다, 제갈 형님. 그사이 별고 없으셨죠?”
“안타깝게도 큰일이 생겼다네. 그러고 보니 자네를 만날 때면 꼭 큰일이 생기는군? 어디, 이번에도 자네의 덕으로 일이 해결되려나?”
웃으며 이야기하는 두 사람에게, 일남 일녀가 다가오더니 남자 쪽이 말했다.
“제갈 형, 이분은 누구십니까? 갈 길이 급한데…….”
제갈운학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금 제, 인사 나누시게. 이쪽은 무황성의 넷째 공자, 위지천우(尉遲天羽) 공자일세.”
위지천우.
당금 무림을 대표하는 여러 세력 중 가장 강대한 힘을 자랑하는 무황성의 주인 가문, 위지가(尉遲家)의 막내.
장남인 위지신우(尉遲神羽), 둘째인 위지검우(尉遲劍羽), 셋째 딸인 위지소진(尉遲少珍)에 이은 넷째이며, 제왕가(帝王家)라는 별명을 가진 위지가의 자식답게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도 그 총명함과 무명을 강호에 날리고 있는 소년이었다.
제갈운학이 다시 한편에 서 있는 소녀를 소개하려 할 때, 여자 쪽이 말을 가르며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