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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10화)
四章 월하검무(月下劍舞)(3)
“안녕하세요? 저는 제갈화봉(諸葛花鳳)이라고 해요. 공자께서는 금비, 금 공자가 맞으시죠?”
“제 이름이 금비입니다.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흐흠…….”
제갈화봉, 제갈운학의 여동생이자 강호에 무림사미(武林四美) 중 하나라고 알려진 이 소녀는 과연 아름다웠다.
금비는 이미 무림사미 중 하나인 심은의 미모를 익히 알고 있었다.
심은의 아름다움이 고고하고 정숙한 아름다움이라면 제갈화봉의 미모는 한껏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아름다움과 같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은 매(恩妹)가 난초라면 이 소녀는 모란이로군.’
금비가 혼자 그렇게 생각할 때, 제갈화봉 역시 금비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위지천우가 약간 짜증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갈 형, 지금 우리가 이렇게 소일할 때입니까? 내 누님의 실종이 형에게는 별다른 큰일이 아닌 듯싶군요?”
존댓말만 쓴다뿐이지 아랫사람에게 하는 듯한 어투. 제갈운학이 눈쌀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하다가 다시 웃는 낯으로 돌아왔다.
“하하. 위지 공자, 그럴 리가 있겠소? 누님의 일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어찌 우리가 사흘 밤늦을 이렇게 달려왔겠소?”
제갈운학이 몸을 돌리며 금비에게 말했다.
“금 제, 지금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 무황성으로 가는 중이니 당장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겠군.나중에 다시 만나 밤새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어 보세나. 아우도 무황성 쪽으로 가는 중인가?”
“글쎄요. 아직 특별히 정한 목적지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쨌거나 무황성으로 오게나. 도착해서 나를 찾아 주면 내 언제든지 달려 나감세. 지금 무황성의 소공녀(小公女)이신 분이…….”
“제갈 형! 어찌 그 신분도 불분명한 자에게 말이 이리 쉬운 겁니까? 계속 이렇게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라면 나는 먼저 떠나겠습니다!”
겨우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한 위지천우의 불손한 말투에, 제갈운학뿐만 아니라 제갈화봉까지도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위지천우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제갈운학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짧은 한마디와 함께 위지천우의 뒤를 따랐다.
“저 애송이 녀석……. 미안하네, 금 제. 다음에 만나면 오늘 일을 사과함세.”
말없이 금비를 훑어보고 있던 제갈화봉이 마지막으로 몸을 날려 그들의 뒤를 따르며 금비에게 전음을 날렸다.
“심(沈) 언니에게 당신에 대한 말씀을 조금 들었어요. 그토록 고고하던 언니의 마음을 빼앗아 간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는데…… 당신은 무어라 판단해 말하기 힘든 분이시군요. 다음에 다시 만날 때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꼭 나눠 보고 싶어요.”
전음이 끝날 때쯤 벌써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금비는 계속 그렇게 서 있었다.
금비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우 녀석…… 정말 잘 자랐구나.”
五章 강호삼괴(江湖三怪)와의 조우(1)
걸음을 재촉하던 중 밤에 이르러, 금비는 관도 자락의 한 마을로 들어섰다.
사십여 호 정도 될까 하는 조그마한 마을. 금비는 하룻밤을 묵어 갈 만한 주루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며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저기 불이 켜 있기는 하나 별다른 인기척 없이 조용하기만 한 마을을 가로지르며 금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마을의 입구를 지나 조금 안쪽으로 들어서자 조그마한 주루가 보였다.
걸어 들어가던 금비의 몸이 흠칫 멈춰 섰다.
주루의 입구, 언제 나타났는지 보통의 세 배는 될 듯한 덩치의, 늑대 같기도 하고 개 같기도 한 짐승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앉아 있었다.
희번덕거리는 눈, 드러낸 송곳니를 타고 뚝뚝 떨어지는 침은 피가 섞인 듯이 검붉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금비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 그 짐승은, 개나 늑대라고 하기보다는 거대한 한 마리 맹수였다.
금비는 힐끗 그 짐승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눈앞에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앞을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이 마을 사람들은…….”
짐승은 금비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당장 달려들 듯했으나, 금비의 부드러운 시선을 받자 앉은 채로 일어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눈으로만 좇았다.
마치 유혹하는 듯한 주루의 불빛 앞에 다다르자, 금비는 싱긋이 웃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온통 불을 밝힌 주루 안, 사람은 아무도 없고 텅 빈 탁자들만 가득했다.
금비는 천천히 걸어 들어가 한가운데 놓인 탁자에 앉았다.
한가로이 주루 안을 둘러보는 금비의 시선 앞에, 탁자의 위에 새빨간 형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핏물과 같이 새빨간 형상. 그것은 탁자 위에서 조금씩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한 글자를 만들어 냈다.
사(死)
그 글자를 바라보던 금비가 한숨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금수혈괴(禽獸血怪) 응초형(鷹礎亨)이 숨어서 이런 장난질을 치는 사람으로 전락했을까?”
금비의 말이 끝나자, 탁자 위의 글자가 흐릿하게 사라져 갔다.
그와 함께, 쩌렁거리는 목소리를 울리며 한 사람이 허공중에서 내려섰다.
팔 척은 될 듯한 장대한 체구에 사람 머리통만 한 주먹, 온몸에는 호랑이 가죽인 듯한 옷을 둘렀고, 손에는 보통의 서너 배는 될 듯한 크기의 낭아봉(狼牙棒)을 들고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무슨 수작이냐? 이 금수혈왕(禽獸血王) 응초형 님이 숨어서 그 따위 수작을 부릴 것이라 생각했단 말이더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어느새 입구에 서 있던 맹수가 그의 곁에 서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금비가 탁자에 앉은 채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내가 잠시 잊고 있었지. 금수혈왕께서 이런 장난질을 치는 분이 아니라는 걸. 그렇다면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금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새파란 마화(魔火)들이 응초형의 뒤쪽에서 너울거리며 나타나더니, 그 가운데 새카만 흑관(黑棺)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금비가 흑관을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이런 장난을 좋아할 사람이라면, 고루혈왕(?뀜血王) 두향응(杜香凝) 당신뿐이라 생각했소.”
금비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여기 있다면…… 강호삼왕(江湖三王) 중 나머지 한 사람, 잔비혈왕(殘臂血王)께서는 어디 계신지……?”
강호삼괴(江湖三怪)!
독특한 신체와 거기에 걸맞은 무공으로 강호에 널리 알려진 세 명의 마도고수들.
금수혈괴 응초형.
천생의 신력과 야생동물의 반사신경을 타고나 한 자루 낭아봉을 사용한 수왕봉법(獸王棒法)과, 호랑이와 늑대 사이의 변종이라는 마수(魔獸) 음혈호(飮血虎)와 함께하는 공격으로 강호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인물로, 질풍노도처럼 몰아치는 낭아봉의 공세와 도검(刀劍)이 불침(不侵)한다는 음혈호의 합공은 막아 낼 자가 드물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고루혈괴(?뀜血怪) 두향응(杜香凝).
새파란 귀화와 함께 나타나며, 스물두 개의 귀화를 조종해 공격하는 마화강연(魔火綱燃)의 수법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오죽흑관(烏竹黑棺)을 이용해 펼치는 오관광무(烏棺狂舞)로 그 명성을 확인받은 마도고수.
잔인한 행사로 셋 중 최고라 알려져 있고, 수없는 생사고비를 넘기면서도 아직 그 무공을 다 보이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심계(心計)가 깊다.
강호출도 시부터 흑관 안에 든 채였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관 밖으로 나온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잔비혈괴(殘臂血怪) 도충량(屠?量).
오른팔밖에 없는 불구의 몸으로 펼치는 천잔도법(天殘刀法)은 극랄함과 쾌속함을 생명으로 하며, 얼마나 많은 정파의 고수들이 그의 칼끝에 고혼으로 사라져 갔는지 모른다.
무공만으로는 강호삼괴 중 최강이라 평가되며 잔인함으로는 셋 중의 두 번째로 쳐 주고 있다.
이 세 사람을 합쳐 부르기를 강호삼괴라 하며, 평상시에는 독자적으로 행동하나 거사(巨事)를 치를 때는 함께 모여 일하기를 즐긴다.
하나하나라도 상대하기 극히 힘들다는 세 사람이요, 셋이 함께일 때는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 하여 붙여진 별호가 견삼괴(見三怪) 주불회(走不悔)이다.
강호에 알려진 이들의 별호에는 모두 혈괴(血怪)란 말이 들어가 있으나, 금비는 응초형이 자신을 혈왕(血王)이라 부르는 것을 듣고 그가 원하는 대로 괴(怪) 자를 왕(王) 자로 바꾸어 불러 준 것이다.
두향응의 귀화가 일렁이더니, 관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송이 녀석, 어디서 나타난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본좌(本座)의 경고를 무시했으니 죽어도 불만이 없으렷다…….”
“글세…… 잔인한 데다가 살인에 이유 없기로 명성이 자자한 고루혈왕께서 나 같은 애송이를 죽이는 데 미리 경고까지 하다니 너무 자비로운 행사가 아니신지?”
금비의 말에, 두향응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그러자 응초형의 짜증 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고루 이놈, 아까부터 이따위 애송이를 두고 뭐가 그리 복잡하냐? 일장에 때려 죽여 버리면 될 일을, 문 앞에 음혈호를 내놓고 겁을 줘서 도망가게 하라더니 이제는 대놓고 도망가라고 풀어 주는 것이냐?”
말과 함께 응초형이 낭아봉을 휘두르며 금비를 향해 덮쳐 온다.
그 순간, 두향응의 목소리가 응초형을 막아섰다.
“초형, 잠시만 기다려라.”
그 소리에 움찔 멈춰 선 응초형이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툴툴거리자, 금비는 고소를 지었다.
심계나 복잡한 머리싸움에 소질이 없는 응초형이었기에, 셋이 함께 움직일 때면 무조건 고루혈괴나 천잔혈괴의 명령을 듣겠다고 약속한 뒤였다.
“애송이 놈,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마. 당장 이 자리를 떠나면 목숨은 살려 주도록 하겠다.”
“흐흠……. 이건 정말 의외로군. 하지만 떠나라고 하신다면 못 떠날 것도 없소. 그전에, 내가 몇 가지 궁금해 하는 것을 이야기해도 되겠소?”
“……말해 봐라.”
“첫째, 당신들이 왜 여기에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오.”
기묘한 대치. 강호의 인명부에 이름 한 자 올라 있지도 않은 금비는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탁자에 앉아 있고, 하나만 나타나도 강호를 떨게 만든다는 강호삼괴 중 둘은 어정쩡하게 선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다.
“강호삼괴가 어떤 중대한 일이 아니면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오. 그런데 두 분께서 여기 함께 계시는구려. 잔비혈왕께서는 보이지 않지만 일단 두 분이 계시다면 그분도 멀지 않은 곳에 계신다는 것. 결국 이곳에서는 세 분이 함께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군요.”
“…….”
“그리고 두 번째. 여기는 무황성(武皇城)에서 하루 거리 안의 마을이오.”
금수혈괴 응초형의 안색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손에 든 낭아봉을 돌려 쥐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고루혈왕의 오죽흑관만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말만 떨어지면 금비를 척살해 버리겠다는 표정이 얼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금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리 당신들이라도 무황성과 정면으로 맞붙어서야 살아남을 리가 없다는 것은 강호의 코흘리개도 알 만한 일인데, 당신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곳에서 귀신놀음을 하고 있구려. 그렇다면 머리 위의 물건이 귀찮아졌기에 이제 내려놓고 싶은 것이거나, 아니면…….”
묵묵부답. 싱긋이 웃는 금비의 미소와 함께 말이 이어졌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것이 함정이라면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겠지요?”
“재미있구나. 계속해 봐라. 네놈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냐?”
살기 가득한 고루혈괴 두향응의 목소리. 응초형의 얼굴에는 서서히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세분께서 마련한 일회용의 함정……. 만의 하나라도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애써 마련한 함정이 들통 나 헛수고가 되는 일은 피하고 싶겠군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의문은 한 가지……. 대체 누구를 기다리며 이런 함정을 준비하셨을까?”
웃음 띤 금비와 얼굴 가득 살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금수혈괴 응초형, 그리고 점점 늘어나 이제 십여 개가 된 고루혈괴 두향응의 귀화.
주루 안은 팽팽한 살기로 숨쉬기도 힘들어지고 있었으나 금비의 태연자약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나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 세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소. 그 중 하나는 무황성의 막내공자 위지천우……. 그들은 무황성의 금지옥엽인 위지소진이 실종되었다고 말하더구려.”
금비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가셔 갔다.
“누가 그녀를 위기에 빠지게 할 수 있었을까? 무황성의 네 자녀들은 이제 장성해서 자주 강호 나들이를 하곤 했지만 무공의 성취가 남달라 감히 그들을 건드릴 세력이 없었기에 아직까지 별다른 위험이 없었소.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실종되었고 어떻게 알았는지 그 소식을 들은 위지천우는 지금 별다른 호위도 없이 움직이는 중이오. 아마 무황성에 거의 다다른 상황에서 당신들의 꼬임에 넘어가 이리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겠지.”
금비가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게다가 잔비혈괴가 보이지 않고, 당신들 둘만이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고 있군. 참으로 담대한 자들……. 무황성의 금지옥엽을 납치해 한 명은 그녀를 인질 삼아 도주하고, 두 사람은 함정을 파 다른 한 명까지 사로잡을 생각인가?”
일어선 금비의 몸에서 부드럽지만 엄엄한 기도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