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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11화)
五章 강호삼괴(江湖三怪)와의 조우(2)


“위지소진을 납치한 것으로 모자라 위지천우마저 건드릴 생각이라면 대체 당신들이 요구할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군. 아니면 아무래도 여식(女息)으로는 불안했던가? 무황성주 위지강(尉遲岡)은 냉정하기로 이름난 사람, 딸자식 정도는 냉정하게 끊을 수도 있는 사람이지. 어쩌면 애초에 그녀를 건드린 것 자체가 위지천우를 사로잡기 위한 포석이었는지도 모르겠군.”
금비의 손에서 검을 싸고 있던 천이 풀어져 흘러내리며 옥루고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더없이 음산해진 고루혈괴의 목소리가 관 안에서 흘러나왔다.
“초형, 더 이상 기다릴 것 없다…….”
고루혈괴의 관을 둘러싼 귀화는 이제 스무 개로 늘어나 있었고, 그것들은 천천히 오죽혈관의 주위를 돌며 귀광(鬼光)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응초형이 낭아봉을 고쳐 잡으며 천천히 다가섰다. 음혈호의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살기에 가득히 물들어 있었다.
스르릉―
맑은 검명(劍鳴), 금비가 검을 빼 들며 처음으로 엄숙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주루 안을 온통 물들인 산공독(散功毒)의 냄새와 발아래에 느껴지는 고루강시(?뀜f屍)들, 온 마을 내에 살아 있는 사람의 느낌은 하나도 없고 온통 독과 시신의 느낌뿐, 들은 바와 같이 참으로 악랄한 행사들……. 잔비혈괴는 어디 있소? 과연 당신들이 위지소진을 납치해 데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직 위지천우를 사로잡기 위해 거짓을 꾸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게 될 일, 어느 쪽이든 오늘 이 악랄한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오!”
“이런 애송이 놈 때문에 그토록 공들인 거사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다니……. 위지천우는 포기한다. 죽여라, 초형!”
“크어어어!”
마치 짐승의 포효처럼 주루를 울리는 기합성과 함께 날아드는 응초형의 낭아봉.
그리고 응초형의 등 뒤로 허공을 온통 새파랗게 물들이며 날아드는 두향응의 마화.
탁자를 부수며 그를 향해 이빨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드는 음혈호.
어느새 허공에 둥실 떠올라 금비를 향해 마기를 쏘아 내고 있는 흑관.
사방을 가득 메우며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절기들을 향해, 어느새 다시 담담한 안색을 회복한 금비의 손에 들린 옥루고검이 검로를 열었다.
쑤와아앙―
금수혈괴 응초형의 낭아봉이 허공을 가르며 금비의 이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실, 응초형은 고루혈괴 두향응의 반응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뜯어봐도 그저 백면서생, 손에 검을 쥐고 있기는 하지만 십년내공이라도 지녔나 싶을 정도로 가소로운 몰골의 금비에게, 무엇 때문에 두향응이 그렇게 조심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일장에 때려죽인 후 시체를 수습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함정을 준비하면 될 일을 무엇 때문에 처음부터 어렵게 돌아가려는 건지……. 이래서 대가리 굴리는 놈들과는 같이 일하기 싫다니까.’
금비를 얕잡아 보고 별다른 초식조차 운용하지 않은 채, 응초형은 신력(身力)만으로 그의 머리를 부숴 버릴 요량으로 낭아봉을 휘둘러 갔다.
그 순간, 금비의 검이 움직였다.
치르르―
검과 봉이 부딪치는데도 호쾌한 타격음이 울리지 않고, 그저 부드러운 마찰음만 일었다.
응초형의 낭아봉이 마치 자석에 끌리듯 금비의 검신을 따라 아래쪽으로 흘렀다.
잡아끄는 흡자결(吸子訣)이라면 끌려들어 가는 느낌이라도 들겠건만 금비의 검신(劍身)은 마치 그의 힘을 물꼬를 트는 듯 방향을 바꾸어 주었고, 응초형은 애초에 그곳을 때리려 했던 것처럼 아래를 후려치고 있었다.
목적을 잃고 바닥을 후려치고는 비틀거리는 응초형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두, 두전성이(斗轉星移)…….”

천하에 다시없는 공부의 끝. 무공구결로 적힌 수법도 아니요, 어옹(漁翁)이나 초동(草童)이라도 그 뜻을 깨우치면 펼칠 수 있으나, 또한 무림사에 이 수법을 펼칠 수 있었던 이는 스물을 넘지 못했다는 이화접목(移花接木) 수법의 궁극, 두전성이가 눈앞의 미청년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무공을 배워 자매판(紫梅板)을 지나 백연탄(白煙炭)에 이른 고수라면 누구나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의 수법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수법은 굳이 무공수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그저 무예의 이치를 알게 되면 넉 냥[四兩]의 힘으로 능히 천근을 옮기는[發千斤]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깨우침의 단계는 수없이 깊고 어려운 것, 똑같은 이화접목의 수법이라도 얕게 배운 자가 상대의 힘을 그저 감소시킨다면 깊이 배운 이는 상대의 힘을 무위로 돌려 버릴 수 있다.
또한 이치를 터득했다면 상대의 힘을 이용해 오히려 당사자에게 타격을 입힐 수도 있는 것이요, 그 오의(奧義)를 깨달았다면 그 힘을 마음대로 이용해 돌려줄 수도 거두어들일 수도 파훼할 수도 있으며, 원하는 목표에 마치 자신의 무공인 양 그 기세 그대로 쓸 수 있으니, 이 깨달음의 끝을 따로 칭해 두전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처음 무공을 배울 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을 수없이 두들겨 맞아 가며 외웠던 사부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응초형의 발아래 음혈호의 숨넘어가는 비명성이 울렸다.
“캐애앵!”
퍼뜩 정신을 차린 응초형의 눈에, 그의 낭아봉에 머리를 맞고 바닥에 나뒹구는 음혈호의 모습이 비쳤다.
그 정도의 타격으로 죽을 리 없는 음혈호였으나 고통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것, 게다가 믿고 있는 주인에게 온 힘을 다해 얻어맞은 탓에 음혈호는 바닥에 나뒹군 후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응초형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위기감은 음혈호의 낭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온몸의 사혈(死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상황, 어느 곳으로 금비의 칼날이 헤집고 들어올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응초형은 온몸의 내공을 끌어올려 치명적인 사혈들을 금종조(金鍾?)의 공력으로 보호하며 고개를 들어 금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금비는 응초형의 목에 칼날을 후려치는 대신 허공으로 몸을 띄우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놓아 버리는 행동에 의아해진 응초형의 눈에, 금비의 온몸을 둘러싼 두향응의 마화가 비쳐 들었다.
금비가 응초형의 낭아봉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음혈호의 머리 위에 놓아주는 순간, 이미 두향응의 마화들은 금비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살짝 털어 버리듯 응초형의 낭아봉을 떨어낸 금비의 몸이 뒤쪽으로 훌훌 날아갔다.
먹이를 쫓는 독사처럼, 새파란 불길을 흘리면서 그를 따라가는 도깨비불.
마화강연이 극성에 이르면 서른여섯 개의 마화가 나타나며, 이것들은 상대의 삼십육방(三十六方)을 차단하고 그 몸을 관통했다.
삼십육방이라 함은 공격할 수 있는 모든 방위. 한꺼번에 모든 방위를 방어할 수 있는 절기라면 대홍락의 수준에 오른 강호의 몇몇 절기들이거나 검막(劍幕)정도일 뿐,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마화강연의 공세를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지금 금비를 둘러싼 마화들은 모두 스무 개, 이 스무 개의 마화만으로도 두향응은 웬만한 적수 없이 강호를 활보하고 다닐 수 있었다.
금비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는 듯하더니 이내 그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두어 개의 마화가 금비의 칼날에 닿자 슬쩍 흐트러지는 듯하더니, 다시 제 형체를 찾으며 처음과 마찬가지로 금비에게 달려들었다.
“크하하하! 나 두향응의 마화는 벨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는 것, 얼마든지 피해 보거라!”
오죽흑관 속에서 두향응의 득의만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비의 몸은 거의 주루의 한쪽 벽에 부딪힐 듯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고, 두향응의 마화가 금비의 전면(前面)을 포위한 채 서로의 사이를 좁히며 다가들고 있었다.
그 순간, 금비가 다리를 움츠리며 검을 등 뒤로 돌렸다.
등 뒤로 뻗은 그의 손에 들린 고검이 주루의 벽에 닿는 순간, 나무로 만든 벽에 닿은 금비의 검은 벽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고무로 만든 칼인 양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말발굽처럼 휘어지는 고검. 금비의 몸을 지탱하면서 부러질 듯 휘어졌던 검이 한순간에 튕겨 펴짐과 동시에 금비의 낭랑한 기합이 울려 퍼졌다.
“핫!”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는 금비의 신형.
미처 좁히지 못했던 마화의 틈새로, 그의 몸이 빛살처럼 빠져나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는 응초형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난 금비가 순식간에 두향응의 흑관에 다가서며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나무로 만든 관이건만, 부딪치며 나는 것은 쇳소리다.
금비의 몸이 서로 부딪치는 힘을 받아 다시 사선으로 떠올랐다. 두향응의 오죽흑관이 충격으로 부르르 떨렸다.
순식간의 공방 끝에, 금비의 신형이 깃털처럼 바닥에 내려섰다.
금비의 경공(輕功), 아니 이것을 경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몸을 띄울 때는 별다른 내공의 운용도 없이 날개를 가진 듯 자유자재로 허공을 누볐고, 땅에 내려설 때면 떨어진다는 말보다는 천천히 가라앉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듯했다.
나한(羅漢)이 구름 위에 내려서듯, 금비가 바닥에 내려섰다.
손에 든 고검을 등 뒤로 돌려세운 금비에게 두 사람의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두, 두전성이더냐?”
“궁신탄영(弓身彈影)? 그 신법은 궁신탄영의 일종이냐?”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물음에 금비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하하, 설마 나 같은 필부가 어찌 두전성이를? 그저 한순간 펼친 이화접목의 수법이 시기적절했던 것뿐이지. 그리고, 궁신탄영이라……. 그런 고도의 신법은 알지 못하오. 도리어 모자란 신법을 보충하려 궁여지책을 짜낸 것뿐이오.”
웃으며 대답하는 금비를 바라보는 응초형의 얼굴에는 불신이 떠올라 있었으나,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 역시 함께 보이고 있었다.
흑관 속의 두향응은 묵묵부답, 무슨 생각인지 모를 상태.
그때, 금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두 사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어떠한지……?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벌이는 짓은 마치 불속에 뛰어드는 나방의 모습 같은 것. 지금이라도 음모를 포기하고, 혹여 위지소진을 납치했다면 그녀를 풀어 주고 사라지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일 것이오.”
“흐흐. 맹룡과강(猛龍過江)이라 했느니, 여기서 포기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을 일…….”
음산하게 흘러나오는 두향응의 목소리. 금비의 탄식 섞인 대답이 이어졌다.
“알겠소…….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오? 어서 손을 쓰시오.”
“잠깐,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말씀하시오.”
“대체 너는 무엇 때문에 너와 상관없는 일로 목숨을 거는 것이냐? 네놈의 얼굴이나 알 수 없는 무공들로 보아 무황성의 사람은 아닌 것이 확실한데, 위지소진이든 위지천우든 간에 네 목숨과 바꿀 이유가 없지 않느냐? 어쭙잖은 정의감에 우리 강호삼괴에 겨루어 목숨을 걸 이유가 있느냐?”
금비는 아무런 대답 없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두향응의 흑관을 바라보았다.
두향응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발걸음을 돌려 이곳을 나간다면 우리의 이름을 걸고 너를 곱게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하마. 뿐만 아니라, 이번 일은 우리가 빚진 것으로 치고 앞으로 우리 강호삼괴가 너의 부탁 하나를 확실히 들어준다면 어떻겠느냐?”
“아니, 향응. 그게 무슨 말이냐? 무엇 때문에 우리가 저따위 녀석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단 말이냐?”
“잠자코 있어라, 초형!”
잠시간, 서로가 말이 없다.
툴툴거리는 응초형과 음산한 마기 속의 오죽흑관 앞에서, 금비는 허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찌 이렇도록 마기가 골수에 깊은 것인지……. 내 너희에게 살아날 방법을 일러 주었건만, 너희는 오히려 나를 회유하려 하는구나……. 소진을 납치하고 거기에 더해 나이 어린 천우까지 잡아들이려는 너희 같은 악인들에게 내가 무슨 빚을 지운단 말이냐? 지금까지 참고 있었다만 너희 손에 잡혀 있을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시간을 지체한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당장 그녀의 행방을 고하고 물러가지 않는다면 내 오늘 처음으로 살계(殺戒)를 열 것이다!”
어느새 하대로 바뀐 말투, 추상같은 질책과 함께 부드럽기만 하던 금비의 온몸에서 서리서리 위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위엄에 눌려 흠칫거리는 금수혈괴의 귓가에, 고루혈괴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으냐, 초형? 절초를 아끼지 말고 최대한 단시간 내에 죽여야 한다. 저놈의 무공이 괴이하여 오래 끌수록 초식의 우위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시선을 금비에게 고정한 채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응초형.
“나는 아까의 교전으로 내상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저놈 또한 내 마화강기(魔火|氣)에 맞부딪쳤으니 태연한 척해도 내상이 클 터, 어린놈이라 공력은 아직 미흡한 듯하니 내공 싸움으로 몰고 가서 말려 죽여 버리면 될 것이다.”
“걱정 마라, 저놈이 제아무리 잘났대도 고작 스물 남짓의 애송이가 아니냐? 우리 둘의 협공에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보다, 도충량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돌아올 시간이 지났지 않느냐?”
“글쎄, 어떻게 된 것인지……. 어쨌거나 지금은 눈앞의 저놈에게 집중할 때다. 준비되었느냐? 간다!”
살기를 가득 끌어올리며 다가오는 응초형과 허공에 천천히 떠오르는 오죽흑관을 바라보면서, 금비가 천천히 고검을 겨누며 말했다.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