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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13화)
六章 소요칠결(逍遙七訣)(2)
자신의 말에 침울해 하는 금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던 인자한 모습.
‘녀석, 그렇게 슬퍼할 것 없다. 육신의 장애가 클수록 마음의 공부에는 거름이 되는 법. 큰 깨달음을 얻고 나면 뼈와 가죽의 하찮은 장애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으리라.’
노인의 말대로, 금비의 몸에는 내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릇에 비유한다면, 일반 무림인들의 단전이 튼튼한 밥공기나 사발이라 했을 때 그의 단전은 여기저기 깨지고 구멍이 난 거대한 항아리 같은 것. 천혜의 재능에 더해 깊은 깨달음으로 깊고 거대한 항아리를 빚어냈으나 애초에 그것은 사방에 금이 가고 구멍이 뚫려 있으며 또한 종잇장처럼 얇기까지 한 것이었다.
차라리 범부들처럼 밥공기나 사발만 한 크기라도 튼튼하고 새어 나감이 없다면 거기에 맞는 내공을 운용하고 또 키워 나갈 수 있으련만, 애초에 불구인 것을 고치지 못한 채 그는 그저 키워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구 새어 나가는 물독에 물을 담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라고는 독이 넘치도록 물을 계속 부어 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금비가 사용하고 있는 무공들이 바로 그런 방법을 통한 것이었다.
전신 세맥에 흩어진 내공을 억지로 끌어 모아 단전에 운용하면서, 자꾸만 흐트러져 가는 내공들을 유지하기 위해 한계 이상으로 내공을 모아들이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세맥 속에 퍼져 있는 내공은 거의 삼 갑자가 넘었고, 만약 제대로 내공을 모을 수 있었다면 깊이 닦아 온 단전에 쌓인 공력이 얼마나 될지는 그 자신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온갖 영약을 써 가며 쏟아 부은 부모의 지극한 정성과(사실상 모친의 노력이 구 할을 차지했다) 무명노인과의 생활을 통한 점수(漸修)의 깨달음 끝에 얻은 공력은 그의 나이 또래의 무림인에게 거의 불가능하다 할 만한 수준이었으나 또한 쓸모없는 불구의 것이기도 했다.
마구 금이 간 단전에 억지로 끌어 모은 내공을 담아 운용할 때면 당장이라도 산산이 조각 날 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단전은 그의 온몸을 상상 못 할 고통으로 떨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을 통해, 금비는 전신의 삼 갑자 공력을 짧게나마 겨우 일 갑자 수준의 공력으로 변화시켜 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치로 금비를 처음 보았던 풍음전이 그를 전혀 무공을 모르는 백면서생으로 오해했고, 외할아버지인 사마충양은 그의 비어 있는 단전과 뚫려 있는 임독양맥을 보고 기이한 신공(神功)을 익히고 있는 듯 착각했으며, 응초형과 두향응 역시 처음 금비를 대했을 때 얕잡아 보았던 것이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단전은 위태롭게 발버둥 치며 당장이라도 깨어질듯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한계까지 짜 낸 내공들로 세맥은 타들어 갈 듯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육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금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몸이라는 것은 그저 나를 감싸고 있는 껍질에 불과한 것. 그것이 아프거나 고통스럽더라도 마음이 평화로우면 불길 속에서도 나비의 날갯짓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법…….’
“크어어어…….”
세 구의 고루강시가 그의 발밑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허공으로 신형을 띄워 올려 공세를 피한 금비의 옥루고검이 광채를 흩뿌렸다.
퍼퍼퍽!
검이 격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시들은 비틀거릴 뿐 별다른 타격 없이 금비의 신형을 쫓아 다가들고 있었다.
날렵하지는 않으나 검의 타격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포위를 좁혀 오는 고루강시들. 두향응의 외호(外號)에 고루(?뀜)란 단어가 붙은 것은 바로 이 강시들의 공포스러운 포위 공격 때문이었다.
허공에서 몸을 움직이는 금비에게 마화가 날아들었다.
삼십육방을 차단하며 조여드는 마화강연의 기세!
다시 한 번 금비의 몸이 사라지는 듯 움직이더니, 마화들의 틈새로 빠져나가며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 순간, 금비가 나아갈 방향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두향응의 오죽흑관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
금비의 얼굴에 당황 어린 표정이 어렸다.
어떻게든 내공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위기를 벗어나려던 그에게 두향응의 이 갑작스러운 공격은 속수무책일 뿐. 억지로 허공에서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꾸려 하는 금비에게, 두향응의 오죽흑관이 시커먼 강기에 둘러싸인 채 정면으로 부딪쳐 들었다.
이것이 두향응이 자랑하는 오관광무였다. 마화강기를 가득 실은 흑관이 금비의 옆구리어림을 강타했다.
터엉!
“크윽!”
훌훌 날려 가는 금비의 신형. 사력을 다해 허공에서 신형을 바로잡으며 내려서는 금비의 입가에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끝나는가…….’
금비의 마음에 탄식이 어렸다.
어느새 다가와 무시무시한 기세로 팔을 휘두르는 강시의 공세를 두전성이로 받아 내 다른 쪽의 강시에 맞부딪치게 하고, 금비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에게 몸의 고통은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죽음의 느낌은, 금비로 하여금 극심한 자괴감을 느끼게 했다.
‘큰 뜻을 품고 세상에 나와, 이런 곳에서 이렇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머릿속에는 두향응의 회유의 말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대체 너는 무엇 때문에 너와 상관없는 일로 목숨을 거는 것이냐? 네놈의 얼굴이나 알 수 없는 무공들로 보아 무황성의 사람은 아닌 것이 확실한데, 위지소진이든 위지천우든 간에 네 목숨과 바꿀 이유가 없지 않느냐?’
‘소진과 천우, 그들을 위해 내가 목숨을 잃어야 한단 말인가? 은원에 연연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살부지수(殺父之讐)의 자식들……. 우리 부자(父子)가 무슨 죄가 있기로 위지가의 사람들 때문에 차례로 죽어 가야만 하는가?’
쐐애액!
두향응의 마화가 허공을 가득 메우며 날아들었다.
그 마화들은 이미 서로 간의 간격을 좁혀 금비가 빠져나갈 틈조차도 없었고, 눈앞 상하좌우를 모두 점하여 한둘을 베어 흐트러뜨리더라도 나머지들의 공격에 온몸이 뚫릴 수밖에 없을 듯했다.
피할 곳이 없는 상황. 금비가 옥루고검을 불끈 거머쥐더니,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옥루고검을 눈앞에 반듯이 세워 들었다.
“세우결.”
나직하게 내뱉는 듯한 한 마디.
옥루고검이 눈부시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금비의 손 안에서 고검이 수십 개의 검영(劍影)을 만들며 마치 허공에 떨어지는 가랑비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그의 검영이 앞을 가로막는 이십여 개의 마화들을 가득 뒤덮어 가고 있었다.
단정하게 선 금비의 앞을 비의 장막처럼 가득 채운 검영들이, 두향응의 마화를 수백 조각으로 갈라 버렸다.
수십, 수백 조각으로 산산이 흩어진 마화들은 조금 후 다시 뭉치며 온전한 모습을 갖춰 갔으나, 이미 금비의 신형은 그 사이로 환상처럼 빠져나간 후였다.
“대단하구나! 마치 검막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어 운용하는 듯한 절기로다. 하나 안타깝다. 그 정도의 공력으로는 내 마화를 잠시 멈출 수 있을 뿐 사라지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두향응의 경탄에 찬 목소리와 함께 나선으로 회전하며 부딪쳐 오는 오죽흑관의 공세에, 금비의 힘겨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과찬이오. 유요결(柳搖訣).”
애초에 대비하고 있었던 공격. 금비의 신형이 허공에서 모로 눕더니, 회전하는 오죽흑관의 공세 위로 흔들거리며 미끄러지듯이 타 넘어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잎처럼, 바위도 깨뜨릴 듯한 두향응의 돌진 위로 몸을 눕힌 채 오죽흑관에 닿을 듯 떨어지면서 흔들리며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눕힌 몸이 흑관을 스쳐 지나간 순간, 금비는 단전이 크게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격통을 참지 못하고 기침을 내뱉었다.
“쿨룩!”
그 순간 유요결의 오묘한 진기의 운용이 흐트러지면서, 두향응의 오죽흑관의 끄트머리에 금비의 등이 닿았다.
그저 살짝 부딪친 듯한 순간,
터엉! 하는 소리와 함께 금비의 등이 바깥쪽으로 홱 휘어지며 입과 코에서 핏물이 터져 나와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의 몸이 앞으로 쭈욱 밀려 나갔다.
“커헉!”
“흐하하! 드디어 걸렸구나! 제아무리 초식의 운용이 오묘한들 그것을 뒷받침하는 내공이 모자란다면 무슨 소용이랴? 더 이상 버텨 봤자다, 얌전히 죽어라!”
득의만만한 두향응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금비는 쓰러질 듯이 땅에 내려섰다.
어느새 흘러내린 문사건 아래 풀어헤쳐진 머리칼,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입가로 흘러내리는 선혈.
비칠거리며 정신없이 물러나는 그의 모습은 처음의 담담하고 맑던 표정은 사라지고 번뇌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지금 금비의 마음속에는 수없는 번뇌와 후회가 들끓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따위 짓을 하다 죽어야 하는 건가. 소진, 천우, 너희는 내 아버님께서 어떻게 죽어 가셨는지 모르겠지? 너희 아비가 내 부친에게 어떤 음모를 뒤집어씌워 오명 속에 돌아가시게 했는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을 것이다. 오직 너희 무황성 위선자들의 말만을 믿고, 그처럼 빛나던 내 아버님의 모습에 반역자의 그림자를 덧씌워 기억할 뿐이겠지. 내 죽음을 두려워한 적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나, 이런 곳에서 이런 자에게 허무하게 죽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거늘, 여기서 결국 너희들 때문에 하릴없이 죽어 가는구나…….’
처음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 없이 태어난 조그마한 번뇌는, 이제 금비의 온몸을 뒤덮고 이성마저 잃게 하는 거대한 화마(火魔)로 변해 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선 금비의 모습, 술 취한 사람처럼 조금씩 비틀거리는 그의 마음 가득 번져 가는 번뇌는 분명 극도의 심마였다.
위이잉!
코앞까지 다가온 고루강시의 팔이 금비의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 들었다.
그 순간 고개를 든 금비의 눈은 온통 핏발이 오른 채 광기를 뿌리고 있었다.
“으아아!”
괴성과 함께, 그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눈앞의 고루강시의 머리를 뛰어넘고 다시 한 구의 어깨를 밟고 재도약한 후, 두향응의 흑관으로 빛살처럼 날아드는 금비의 신형.
“으헛!”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하던 금비가 화살처럼 날아들자, 두향응은 경악성을 내뱉으며 마화들을 조종해 전면을 방어했다.
파파팟!
금비의 몸 여기저기에 마화가 스치며 핏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몸의 상처도 아랑곳없이 다가서는 그의 모습은, 나한 같던 당당함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은은한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따다다다당!
벼락처럼 쏟아지는 낙수결!
허겁지겁 뒤로 물러서는 오죽흑관 위로 금비의 칼날이 불똥을 튀기며 떨어졌다.
까앙!
육 검(六劍)째에 오죽흑관에 금이 갔다.
입가로 선혈을 뿌리며 부릅뜬 눈, 풀어헤쳐진 머리칼을 허공에 날리면서 그림자처럼 두향응의 흑관을 따라가며 낙수결을 시전하는 금비의 모습은 말 그대로 군요희룡(群妖戱龍), 요마들에게 희롱당해 정기를 잃어버린 신룡의 모습과 같았다.
까앙!
칠 검째에, 오죽흑관의 앞면에 커다란 금이 새겨졌다.
“으아아! 이, 이 괴물 놈!”
미칠 듯한 두향응의 비명 소리. 그 순간 눈빛을 번득이며 팔 검째를 시전하던 금비의 몸이 갑자기 허공에서 뚝 멈췄다.
“커헉!”
한 줄기 신음과 함께 허공에 뿌려지는 핏물. 금비의 신형이 무너지듯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웅!
지금까지 아무리 타격을 입어도 깃털처럼 소리 없이 떠오르고 내려서던 금비의 몸이, 던져진 통나무처럼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쓰러진 채 미동도 없이 누운 금비의 귀에, 커다랗게 금이 간 오죽흑관 속에서 두향응의 득의만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크하하하하! 드디어 힘이 다했구나! 사십 년 동안 강호를 횡행(橫行)하면서 너 같은 괴동(怪童)은 처음이로다. 하나 이제 그것도 끝이다. 단칼에 죽여 주마!”
엎드린 금비의 몸 주위를 고루강시들이 에워싼 채 다가들고 있었고, 두향응의 마화가 허공을 가득 에워싸고 금비의 머리 위로 모여들어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이 기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 마화들 위에서, 두향응의 오죽흑관이 마기를 뿌리며 금비의 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때, 금비의 몸이 꿈틀 하며 움직였다.
그 자그마한 움직임만으로, 오죽흑관이 놀란 듯 허공으로 일 척가량 솟구쳤다.
천천히 일으켜지는 금비의 신형.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로, 옥루고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돌아온 담담한 기도. 만신창이가 된 몸과 상관없이 입가에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를 띤 금비의 모습은,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잊은 듯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맑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