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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14화)
七章 검극추월(劍極追月)(1)
머릿속이 새하얗게 빈 듯했다.
단전이 깨어지든 말든 자신의 몸조차 돌아보지 않고서 공세를 펼치게 했던 금비의 마음속에 똬리 튼 심마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금도 그의 마음을 삼킨 채 노화를 태우고 있었다.
엎드려 쓰러진 채, 금비는 자조했다.
‘개죽음……. 이렇게 죽기 위해 강호에 나와 힘든 길을 걸어온 걸까……. 위지가의 사람들이여, 너희를 저주한다……. 너희를 위해 이렇게 속절없이 죽어 가야 하다니. 아아, 하늘이여…….’
일렁거리는 심마 속에서, 금비의 마음은 불길에 싸인 낙엽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그 순간, 금비의 머릿속을 울리는 부드러운 한 마디.
‘그러하냐?’
이제는 죽고 없는 무명노인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마치 살아서 금비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움찔!
금비의 손가락 끝이 그 목소리에 반응해서 움직였다.
금비의 광기 어린 대답이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어르신! 어르신! 어디 계신가요? 저를 보고 계신가요? 부끄럽습니다! 부끄럽습니다! 큰 뜻을 품고 강호에 나왔건만 원수의 자식들 때문에 이렇게 죽어 가고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허허. 진정 그러하냐?’
일렁거리는 불길 위로 뿌려지는 빗줄기처럼, 금비의 마음속 심마를 씻어 주는 청량한 목소리. 금비의 풀 죽은 대답이 이어졌다.
‘사실 꼭 그들 때문만은 아니지요……. 능력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비도 없이,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함정에 뛰어든 제 아둔함 또한 이유이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어르신!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을 위한 죽음인 것은 변함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다니, 억울할 따름입니다.’
‘허허 그렇구나……. 한데, 진정 그러하냐?’
세상에서 단 한 사람, 그를 포용하고 가르쳐 주었던 사람……. 금비가 마음을 열고 사부처럼, 조부처럼 따르며 투정 부릴 수 있었던 단 한사람.
무명노인의 웃음 밴, 똑같은 물음이 다시 금비의 마음속에 메아리쳤다.
어느새 씻겨 사라지는 심마. 마음 가득 차오르는 평화로움을 느끼면서, 평소처럼 부드러움을 회복한 금비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부끄럽습니다……. 어찌 이 사태가 그들의 탓이겠습니까. 조그만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티끌 같은 깨달음으로 세상 누구라도 상대할 수 있을 듯 들떠 있던 제 마음 탓이지요. 여기 이 자리에 누워 있는 제 모습조차도 제가 이어 온 인연의 결과인 것. 제 손으로 죽인 두향응과 음혈호 역시 죽는 순간 저보다 덜 억울했겠습니까…….’
이제 마음은 명경(明鏡)처럼 맑기만 하고 심마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상태. 금비는 다가온 육신의 죽음을 차분히 관조했다.
무명노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이제 온전히 마음을 다스린 채 평온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하……. 아버님이 언제 위지가의 사람들을 원수라 원망하셨더냐? 네 얕은 수양으로 인연에 연연치 않겠다 했으나, 마음속 깊이 그들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더냐? 내공조차 제대로 운용 못해 적 앞에서 부모님의 연시(戀詩)를 읊어 가며 위기를 모면했던 못난 네가, 죽어서까지 너를 거두신 부친의 은혜로 얻은 하릴없는 깨달음 하나로 호승심을 이기지 못해 위기 속에 뛰어들었던 것 아니더냐? 금비야, 금비야……. 네 어찌 보잘것없는 목숨 하나가 그렇게 귀중하다고 억울해 발버둥 친단 말이더냐?’
실로, 부친이 돌아가신 현장을 찾은 그날 밤 달빛 아래서 얻은 깨달음 이전에는 지금의 일 갑자의 내공조차 운용할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적의 힘을 운용하는 두전성이의 절기와 심득으로 깨닫고만 있던 부친의 소요칠결뿐. 내공도 운용할 수 없는 몸으로 강호를 헤쳐 나갈 일이 불안하고 아득하기만 했던 금비에게 그날 밤의 깨달음은 지금과 같이 내공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심득을 가르쳐 주었고, 그날 밤 처음으로 무공을 시전했던 것이다.
금비의 몸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조금씩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쓰면서, 금비는 웃었다.
‘하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오늘 여기에서 내 천명이 다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나면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영차. 내 수족들아, 아직 움직일 만하거들랑 조금이라도 움직여 주려무나. 어찌 당당한 장부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적을 바라보지 못하고 엎드려 죽어 갈 수 있을까…….’
비틀거리면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는 금비의 눈에, 새하얗게 빛을 발하는 옥루고검이 비쳐 들었다.
눈부시게 빛을 반사하는 칼날. 그 칼날을 바라보는 금비의 머릿속에는 그날 밤 휘황하게 떠 있던 달빛만이 가득 떠오르고 있었다.
옥루고검을 바라보는 금비의 눈빛이 맑고 깊게 가라앉았다.
구름 위의 천선(天仙) 같던 그날 밤의 금비와 아수라 지옥에 던져진 듯한 지금의 모습은 천지차이건만, 그 깊고 그윽한 눈빛만은 그날 밤과 다름없이 깨달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금비의 모습, 처참하기 이를데 없는 몰골로 금비는 옥루고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느새 돌아온 담담한 기도, 만신창이가 된 몸과 상관없이 입가에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를 띈 금비의 모습은 눈 앞에 다가온 죽음을 잊은 듯이 여느때처럼 부드럽고 맑기만 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허공에 뜬 오죽흑관을 바라보던 금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말해도 되겠소?”
“……곧 죽을 놈이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냐?”
두향응의 차가운 목소리. 살기 가득한 한마디와 함께, 오죽흑관이 마화강기를 가득히 끌어올리며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사방을 포위한 채 다가오는 강시들과 허공을 가득 메운 마화,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금비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공이라고는 쓸 수 없는 몸이었다오.”
“……그래서?”
“그런데 하늘의 도우심으로, 어느 날 밤 한 가지 심득을 얻고 나서 어렵게나마 일 갑자 정도의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소.”
“계속하거라.”
금비에게 말하면서, 두향응은 고루강시들을 조종해 그를 완전히 포위하게 한 후 마화들을 삼십육방에 가득 배치했다.
그런 후 다시 마화 위로 자리 잡아 금비의 머리 바로 위에서 오관광무의 절초, 마관압천(魔棺壓天)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억 관(億貫)의 무게처럼 느껴지는 흑관이 금비의 머리 위로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크흐흐. 놈, 이번에야말로 하늘을 무너뜨리는 재주가 있다 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두향응의 흉계를 전혀 모르는 듯, 한가로운 금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일이, 나는 그 심득에 힘입어서 내공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도리어 그 깨달음 자체는 놓쳐 버리고 말았소. 월하(月下)에서 얻었던 나의 깨달음은 마치 손안의 화분(花粉)처럼 애써 잡으려 할수록 새어 나가더니 결국 아침을 맞은 달빛처럼 내 마음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었소.”
손에 닿을 듯이 다가선 고루강시, 두향응의 마화들이 금비를 향해 내리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나는 한 올의 내공도 운용할 수 없는 지경이오. 그런데도…… 내 마음은 맑기만 하고, 그날 밤의 깨달음은 한 조각이나마 머릿속에 환하구려.”
등줄기에 흘러내리는 식은땀. 금비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 두향응의 온몸 신경이 위험하다 날뛰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놈이 몇 번이나 죽음 문턱에서 되돌아와 형세를 역전시켰던가? 어찌 아직도 그를 얕보고 몸을 추스를 시간을 주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금비의 말에 홀린 듯 공격을 늦춘 자신을 저주하면서 마화들을 쏟아 붓는 두향응의 귀에, 금비의 웃음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한 자락 공력도 쓸 수 없는 몸으로나마 다시 얻은 내 깨달음을 펼쳐 보려 하오. 당신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려. 하하, 그저 죽음 앞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내 마음일 뿐이니…….”
웃음과 함께 후들거리는 팔로 옥루고검을 들어 올리는 금비의 귀에, 미친 듯 총공세를 펼치는 두향응의 악에 받친 고함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 죽어라, 이 괴물 같은 놈아!”
허공을 가득 메우며 유성처럼 떨어지는 마화강연, 처절한 함성과 함께 금비의 몸을 덮어 버린 고루강시들, 그리고 산도 찌그러뜨릴 듯한 기세로 떨어지는 오죽흑관의 마관압천!
옷깃 한 자락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향응의 공세 속에 휩싸인 금비의 모습. 그러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루강시들의 포효를 헤치고 두향응의 귓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원월(圓月).”
옥루고검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며, 금비의 몸 주위에 조그마한 원을 그렸다.
그리고 옥루고검이 움직이는 대로, 원은 금비의 몸을 감싸고 천천히 돌아가며 허공에서 조금씩 커져 가기 시작했다.
퍽! 퍼퍽!
금비의 몸을 도는 원에 닿은 고루강시들이 먼지처럼 터져 나갔다.
어린아이 주먹만 하던 그 원은 금비의 몸을 감싸고 돌면서 조금씩 커져 나갔고, 그것을 이끄는 옥루고검의 인도에 따라 허공에 춤추며 흘러갔다.
닿지도 않았건만 흘러 지나간 원에 닿은 마화강연들이 물에 닿은 소금 모양 녹아내리듯 사라져 갔다.
검 끝에 달을 달고서[劍極追月], 금비는 그 자리에서 너울너울 춤추며 허공에 달빛을 수놓았다.
속절없이 먼지로 변해 날려 가는 고루강시들과 달빛에 씻겨 사라진 마화들. 휘황한 월광에 감싸인 금비의 몸이 그 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천애무극검결의 첫 번째 초식인 원월결(圓月訣), 강호의 호사가들이 검극추월(劍極追月)이라는 별명까지 붙이며 칭송하는 신공의 초현(初現)인 것이다.
하릴없이 사라지는 자신의 필생의 공세를 바라보면서, 두향응은 몸서리를 치며 울부짖었다.
오죽흑관이 터질 듯이 마화강기를 가득 채운 채, 두향응은 발악하듯 금비에게 부딪쳐 가며 소리 질렀다.
“크아아아! 이놈! 죽어라! 제발 죽어 다오!”
다가오는 흑관을 바라보는 금비의 검이 천천히 허공을 가로질렀다.
검날 끝에 매달린 달은 이제 사람의 머리만큼이나 커져 있었고, 그것은 금비의 손끝을 따라 허공에 한 줄기 선을 그은 후 칼끝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휘황하게 비치던 달빛 같던 검광마저 씻은 듯이 사라진 후, 금비는 조용히 옥루고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쩌어억―
두향응의 흑관이 가로로 길게 갈라지고 있었다.
허공에서 두 쪽이 난 흑관이 금비의 머리 위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떨어져 내렸다.
그 어떤 신병이기(神兵利器)로도 흠집조차 난 적 없다는 오죽흑관, 그것이 매끈하게 두 쪽으로 갈라져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금비의 눈앞에는 두향응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지금까지 강호의 그 누구도 본 적 없다는 오죽흑관 속 두향응의 모습.
그 몰골은 불쌍하기까지 했다.
바싹 마른 몸은 팔다리가 나뭇가지처럼 가늘었고, 다 떨어져 나간 의복은 여기저기 부스러져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오랜 세월 햇빛을 보지 못한 얼굴은 시체처럼 새하얗기만 했다.
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떠는 그에게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느냐……?”
그를 바라보는 금비의 시선은 부드럽지만 착잡함이 배어 있었다.
“가시오.”
“무슨 말이냐……?”
“당신의 마화강기는 오죽흑관에서 나온 시점에서 이미 파괴된 상태, 다시는 무공을 쓰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가시오.”
두향응의 몸이 멈칫거리더니, 이내 음침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핫핫핫! 호생지덕을 발휘해 목숨만은 살려 준다는 것이냐? 그런 거냐?”
“무어라 말해도 상관없는 일. 어서 가시오.”
“위지소진은 어쩔 거냐? 나를 살려 보내면 위지소진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녀를 구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할 것이나, 당신을 살려 보냄으로써 그녀가 위해를 입는다면 그 또한 그녀 몫의 운명……. 나는 결정을 내렸으니, 당신은 어서 가시오.”
두향응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금비를 잡아먹을 듯이 살기를 흘리는 눈길로, 그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어쭙잖은 자비심을 발휘해 목숨을 살려 준다니 고맙기 그지없구나. 하지만 명심해라, 내 언젠가 네놈의 심장을 씹어 먹고 말 것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드는 금비를 향해, 두향응은 저주를 퍼부으며 비틀비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금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초연하게 서 있기만 했다.
스르르―
두향응의 모습이 문 밖으로 사라지자, 금비의 몸이 미끄러지듯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진력이라고는 한 방울도 남지 않았고, 심력마저도 한계까지 짜내 쓴 상황.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금비는 천천히 의식을 잃어 갔다.
방금 전까지 금비에게는 정말 칼을 들어 올릴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