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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15화)
七章 검극추월(劍極追月)(2)
만약 두향응이 죽이려 들었다면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금비는 정신을 잃어 가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정말로 나는 흑관 속의 두향응까지 함께 베고 싶진 않았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를 일……. 하지만, 소진. 당신에겐 미안하나 아직까지 살인은 내게 너무 힘겹다오…….’
콰당!
문을 나선 두향응은 원한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죽인다……. 죽이고 말 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을 죽이고야 말 것이다!”
원한 가득한 저주를 되뇌면서, 비틀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주루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한 줄기 파공음과 함께 한 사람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누, 누구? 누구냐?”
당황한 두향응에게, 그 사람은 조용히 다가섰다.
흰 머리가 희끗희끗 난 초로의 남자. 등 뒤로 비껴 멘 장검 아래로, 텅 빈 왼팔의 소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내의 기세를 감지한 두향응이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충량? 도충량(屠?量) 자네로군! 어디서 지체하다 이렇게 늦은 건가!”
“미안하이……. 그럴 일이 있었네.”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야! 주루 안, 주루 안에 있는 애송이를 죽여야 해! 그놈이 응초형을 죽이고 나까지 이 꼴로 만들어 놓았어! 어서 가세. 지금 그놈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지만 자네도 절대 방심하면 안 되네! 크크크. 이놈, 이렇게 빨리 복수의 시간이 찾아올 줄이야! 약속했지? 내 네놈의 심장을 씹어 먹고 말겠다!”
잔비혈괴 도충량. 강호삼괴 중 무공으로는 최고이며, 겉으로 보이기에는 고루혈괴 두향응이 그들 중 우두머리이나 사실상 셋이 모였을 때 그들을 이끄는 것은 도충량이었다.
두향응을 바라보는 도충량의 눈길에는 약간의 미안함이 어려 있었다.
“왜 그러나? 어서 가야 해! 저 괴동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지금 바로 죽여야만 해. 안 그러면…… 커억!”
말을 잇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는 두향응의 등 뒤로, 도충량의 도(刀)가 삐죽 솟아 나와 있었다.
두향응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도충량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왜……?”
냉정한 표정으로 두향응을 바라보는 도충량의 눈빛에는, 이미 한 점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발밑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가는 두향응을 바라보던 도충량은 완전히 숨이 끊어진 그를 들쳐 업은 후 걸음을 옮겨 다시 주루로 향했다.
삐걱―
문을 열고 들어선 도충량의 눈에, 사투의 흔적들이 비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 쓰러져 죽어 있는 응초형의 시신과 그 곁에 머리가 쪼개진 채 죽은 음혈호, 주루 여기저기 뿌려진 핏자국과 다른 한쪽에 누워 정신을 잃은 금비의 모습.
도충량은 장내를 한번 훑어본 후, 두향응의 시신을 주루 한가운데 놓았다.
그런 후 응초형과 음혈호의 시신까지 끌어 와 두향응과 함께 쌓아 놓더니, 여기저기서 나뭇조각을 모아 주위에 쌓았다.
도충량이 주머니에서 화섭자(火攝子)를 꺼내 불을 붙이자, 내공을 받은 화기에 휩싸인 나뭇조각들이 삽시간에 시신들을 삼키고 타올라 주루 여기저기에 옮겨 붙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불길을 잠시 바라보던 도충량의 시선이 금비에게로 향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금비의 모습.
천천히 그에게 다가선 도충량이 그를 들쳐 업었다.
금비의 손끝에 떨어진 옥루고검을 주워 든 그는 잠시 감회 어린 표정으로 그 칼을 바라보고는 품에 갈무리한 후 경공을 펼쳐 주루를 벗어났다.
금비를 업은 채 어두운 숲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 뒤로, 새빨간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주루의 모습만이 남았다.
八章 애련(愛憐)(1)
금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두운 동굴 안, 그는 한쪽 구석에 누워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는 금비의 눈에, 동굴 입구에 앉아 안쪽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달빛이 밝아 주위를 둘러보기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남자 쪽에서는 달빛과는 다른 밝은 빛이 조금씩 비쳐 드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 동굴 안쪽을 바라보자, 의외로 깊은 동굴의 내부가 보였다.
달빛조차 동굴의 깊은 곳까지 비쳐 들지 못해 입구에서 이삼 장 안쪽은 한 치도 구별 못할 정도로 깜깜했다.
“허억!”
갑자기 가슴에 몰려오는 격통에 금비는 명치어림을 붙잡고 고개를 숙이며 신음성을 삼켰다.
팔과 다리를 비롯해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온몸을 훑어보자 곳곳이 크고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으나, 그 상처들은 깨끗이 닦여 지혈되어 있고, 피에 젖은 문사건마저도 단정히 이마에 매어져 있었다.
누운 곁에 반듯이 놓인 옥루고검을 확인한 후 힘겹게 동굴 벽에 기대면서 금비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의 귓가에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소?”
금비는 목소리의 임자를 바라보았다.
화강암처럼 굳건한 등, 굵은 목과 근육으로 뭉친 팔, 그리고 텅 비어 흔들리고 있는 왼팔 소매.
등 뒤로 비껴 멘 폭넓은 도가 바람에 수실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무 대답 없이 등을 바라보고만 있는 금비에게 도충량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찌 그리 무르신 거요?”
쓴웃음을 짓는 금비의 입에서 조용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역량을 가늠하지 못하고 사지에 뛰어들었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것을 묻는 게 아니오. 어찌 그리 무르냐고 묻고 있소.”
다시 입을 다문 금비의 귀에 조금은 노기가 실린 듯한 도충량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고루혈괴 두향응이라면 심사가 사갈(蛇蝎) 같고 원한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 자. 그런 자들에게 호생지덕을 베풀다니……. 덕을 베풀 요량이면 강호에 나오지 않고 죽림에 묻혔어야 할 일, 그런 무른 심성으로 무슨 큰일을 하시겠다는 거요?”
“부끄럽습니다…….”
부끄럽다 대답하고 있으나 말투에는 웃음이 배어 있었다.
그런 기색을 느낀 도충량의 목소리가 드디어 확연한 노기를 띠었다. 곧 갑작스러운 하대와 함께 질책이 쏟아졌다.
“도대체 너는 어찌 그리 네 아비와 다른 듯이 닮았단 말이더냐? 자성(慈成) 그놈 역시 한량처럼 호기만 가득할 뿐 무르기 짝이 없더니, 네 녀석은 아예 불전의 보살 모양 너그럽기만 하구나. 너희 부자를 보고 있자면…….”
“오랜만입니다, 충(?) 아저씨!”
불같이 노화를 쏟아 붓는 도충량의 말 사이로 부드러운 웃음기를 띤 금비의 인사가 잘라 들어왔다.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 노기와 함께 눈길 가득 반가움을 담고서 도충량이 웃고 있었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로구나. 나를 기억하고 있었더냐?”
“어릴 적 한 팔로 저를 안아 주시던 그 모습을 아직 어렴풋하게나마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그래,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눈가에 물기를 머금은 채 기뻐하는 도충량의 얼굴을 바라보는 금비 역시 웃고 있었다.
***
어느새 금비는 도충량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금비가 사투를 벌인 주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등성이의 동굴이었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주루가 새빨간 불꽃에 휩싸여 불타고 있었다.
도충량이 불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강호삼괴 중 일인이란 것을 알고 있었더냐?”
“전혀 몰랐습니다.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아저씨의 이름 석 자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충 아저씨로만 기억하고 있었고, 강호삼괴의 무용은 서책으로만 읽었을 뿐, 금수혈괴나 고루혈괴 역시 오늘 처음 만난 것이니까요.”
“허허. 그렇겠구나. 강호초출인 네 검에 강호삼괴 중 둘이 죽어 나간 것이 알려진다면 내일부터라도 강호가 네 이름으로 들썩거릴 것이다.”
은근한 자랑이 섞인 도충량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조금 우울한 말투로 금비가 물었다.
“충 아저씨……. 왜 강호삼괴란 이름까지 얻어 가며 살겁을 행하시는 겁니까?”
금비의 물음에 도충량의 눈에서 신광이 튀며 온몸에 살기가 흘렀다.
“왜냐고? 그거야 당연한 일. 자성이 그렇게 죽어 갔거늘 내 어찌 정파 놈들을 도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더냐? 네 아비는 제 목숨이라 그렇게 마음대로 버렸을지 몰라도 내게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의제(義弟)다. 자성의 목숨 값을 치르기에는 무황성 놈들 모두의 목숨으로도 모자라다!”
“…….”
“네 어미가 나를 찾아와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었다. 지아비의 원수를 갚는 일에 힘을 빌려 달라는 그 말을 내가 어찌 거절한단 말이더냐? 아니, 추상(秋霜) 그 아이의 부탁이 없었더라도 내 스스로 자성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섰을 것이다!”
금비가 가늘게 탄식했다.
그런 금비의 한숨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도충량의 강개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마교에 입교했고 나 스스로 두향응과 응초형을 찾아 비무를 벌였느니라. 수족처럼 부릴 수 있으면서도 무황성의 위명에 겁먹지 않을 자들로 고른 놈들, 그들을 굴복시켜 갖은 보답으로 달랜 후 함께 활동하며 정파 놈들을 주살하면서 무황성을 쓰러뜨리기 위해 십 년을 노심초사했다. 그동안 내 별호가 잔비혈괴로 바뀌고, 강호삼괴로 불리면서 온갖 악명을 뒤집어썼으나 내 한 번도 이 길을 걸은 것을 후회해 본 적 없느니라!”
도충량의 별호는 원래 잔비마도(殘臂魔刀). 십 년 동안 강호삼괴의 일원으로 악행을 쌓으며 어느새 바뀐 별호가 잔비혈괴였다.
도충량과 금비의 부친 유자성은 거의 스무 살 차이의 나이. 하나 나이를 잊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의형제간이라는 사실은 원래 강호의 일에 관여치 아니하고 유유자적하는 유자성의 생활과 이렇다 할 지인이라고는 없는 도충량의 상황에 맞게 아는 이가 드물었다.
금비의 기억 속의 도충량은 언제나 호탕한 웃음과 함께 술단지를 지고 불쑥불쑥 찾아와 부친과 함께 삼 주야(三晝夜)를 술독에 빠져 노는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투덜거리면서도 꼬박꼬박 안주를 해다 바치는 금비의 모친에게 매번 농을 걸고, 어느 날인가 만취한 채 모친 사마추상의 엉덩이를 후려쳤다가 새파랗게 노화를 피워 올리며 휘두르는 장검에 머리털을 절반이나 잘린 채 그 자리에서 싹싹 빌며 절하던 모습을 부친 유자성의 품에 안긴 채 깔깔거리며 바라보던 추억. 그런 금비의 기억 속 호탕하던 도충량과 지금 살기와 원한만이 가득한 도충량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무어라 말하려던 금비는 곧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 또한 아버님과 충 아저씨의 인연인 것. 지금 말린다 한들 말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복수 또한 아저씨의 몫이니 그대로 흘러가게 둘 일이다…….’
그런 금비에게, 도충량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상세는 어떠하냐?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와 두향응의 싸움이 끝날 무렵, 네 몰골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괜찮습니다. 큰 이상은 없는 듯하군요.”
금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도 이제 무림인인지라 깨어나자마자 처음 한 일은 전신 내공을 점검하고 단전을 살피는 것이었다. 완전히 산산조각 난 줄 알았던 단전은 어느새 처음과 같아졌고, 역시 금이 가고 깨어진 것이긴 하지만 왠지 조금은 두터워진 듯도, 조금은 깊어진 듯도 했다.
금비 자신도 영문을 모를 일이었지만 어렴풋이 자신이 터득한 심득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사뭇 안심하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시 도충량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런데, 네가 시전한 그 무공은 대체 무엇이냐? 마치 조그마한 달이 네 몸 주위를 떠다니는 듯하구나. 내 평생에 그런 무공은 본 적도 없고, 네 아비의 신공들을 수없이 구경했지만 역시 그 비슷한 것도 없었다. 그것은 혹시 자성이 남긴 무공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 무예에 아버님의 가르침이 녹아 있는 것은 분명하나, 이 무공은 제 우둔한 깨우침의 일부입니다.”
멍한 표정으로 금비를 바라보는 도충량. 그 얼굴에 조금씩 웃음이 번지더니 어느새 대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 그래, 네가 창안한 무공이라? 그래, 그렇고말고. 호부(虎父) 밑에 어찌 견자(犬子)가 나겠느냐. 그토록 뛰어난 유씨의 핏줄이니 네 성취가 월등한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느니라! 자성 이놈아, 네 아들의 이 모습을 보고 있냐…….”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는 도충량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내가 처음 그 주루에 도착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설마 했는데 너와 두 놈들이 싸우고 있을 줄이야. 네 어미의 말도 있었거니와 네 손의 옥루(玉淚), 그놈을 보자마자 너인 줄 알 수 있었지. 내 너를 구하기 위해 단칼에 고루 그놈을 베어 버리려던 판국에 갑자기 네 신공이 펼쳐지지 않겠느냐? 부끄러운 말이나 내 너의 무예를 구경하느라 너를 구하러 가는 것도 잊었느니라. 네가 단칼에 오죽흑관을 베어 버리는 것 또한 너무 흐뭇해서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너는 일부러 두향응을 살려 보내더구나. 그래서 내가 뒤따라가 그놈을 죽여 버리고 시체를 가져다가 불태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