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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16화)
八章 애련(愛憐)(2)


저기, 저 불속에 두향응과 응초형이 타고 있는 중이다.”
금비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
애써 자신이 살려 보낸 두향응이 결국 고혼으로 변해 불길 속에서 타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곧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또한 당신의 업보인 것. 하늘이 당신의 악행을 끝내려 하신다면 내가 아무리 덕을 베풀어도 방법이 없는 것이오…….’
그런 금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도충량이 물었다.
“네 어미와 그 질녀에게 들었다. 너는 이름을 금비라 바꾸고 자성의 아들임을 숨기고 있다면서? 네 어미는 자신을 원망함이라 통곡하고, 질녀는 친부의 복수도 잊은 파락호라 매도하더구나. 하나, 나는 너를 안다.”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 금비에게, 도충량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 나는 네 아비와 그 핏줄의 성정을 알고 있지. 그 신선 같은 풍도와 범속한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 초탈함을……. 네가 하는 일엔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네가 부친의 혈한(血恨)을 잊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만약 네가 원수를 갚지 않더라도 거기에 큰 뜻이 있으리라 믿고 있다.”
금비의 얼굴에 의외의 표정이 어렸다.
그도 사람인지라, 부친의 죽음 이후 얼마나 많은 나날을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부친의 원한을 갚을 힘이 없는 자신의 능력에 괴로워했고, 단전이 파괴되어 무공을 익힐 수 없음을 원망했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장애에 초연해진 후에도 가끔씩 찾아오는 복수심은 며칠씩 심마에 괴로워하게 만들었다.
깨달음을 얻던 날 밤, 신랄하게 퍼붓는 조해연의 독설은 얼마나 그의 가슴을 헤집었던가?
금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도충량이 웃었다.
“녀석 마음고생이 심했던 게로구나,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금비의 등을 두드리면서 도충량의 웃음 띤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녀석은 어려서부터 조숙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지. 하나 나는 네 아버지의 의형인 것, 자성이 죽은 지금 나는 네 아비의 대신이라 할 수 있다. 네놈 하나 감싸 주지 못한대서야 어찌 죽어 자성을 만나 얼굴을 들 수 있겠느냐?”
조금 떨리는 듯한 목소리에, 금비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백부(伯父)님.”
“걱정 마라.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면 될 일이다. 누구라도 네 길을 막는다면 이 도충량, 나머지 한 팔뿐만 아니라 머리를 걸고서라도 그놈을 죽이고 말 것이다.”
협기 가득한 도충량의 목소리. 어느새 그 모습에서는 근래 강호에 악명을 떨치던 잔비혈괴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십 년 전 의협(義俠)으로 강호를 누볐던 협객 잔비마도의 모습이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부드러움을 되찾은 목소리로 금비가 물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위지소진의 일이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금비에게, 도충량의 나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내가 데리고 있다.”
“어찌 가능하셨습니까?”
사실, 이것이 처음 관도에서 위지천우를 만난 이후로 금비에게는 가장 큰 의문이었다.
위지소진이 누구인가?
무황성의 하나뿐인 금지옥엽. 모르긴 몰라도 무황성 가장 깊은 곳에서 수십 겹의 호위에 둘러싸여 생활하고 있을 것이고 혼기가 찬 나이인 만큼 강호 나들이도 거의 없을 것이며, 혹여 강호에 나선다 하더라도 그 호위가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이 갈 일이다.
아무리 도충량이라도 그런 위지소진을 어떻게 납치할 수 있었을까?
곧 들려온 도충량의 대답이 금비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사실 위지소진을 납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무황성의 네 자식 모두가 마찬가지. 너는 어제 관도에서 위지천우를 만난 적이 있었지?”
“그렇습니다.”
“그때 역시 위지천우를 마중하는 무황성 인물들이 마주 달려오고 있는 상황이었지. 나는 도중에서 위지천우를 가로채기 위해 계속 기회를 노렸으나 도저히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그녀를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까?”
“하하. 어떻게 가능했을 것 같으냐?”
“전혀 짐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금비를 바라보던 도충량이 말했다.
“구멍 속에 숨어 나오지 않는 토끼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스스로 나오게 할 일입니다.”
“바로 그러하다.”
“그녀 스스로 나왔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네 덕분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금비에게, 도충량이 말을 이었다.
“무황성 내에는 물론 마교의 첩자들이 다수 잠복해 있다. 그중 하나에게 네 어미의 친필 편지를 전했다. 그 첩자는 그 편지를 아무도 모르게 위지소진의 거처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지.”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그녀 스스로 무황성을 나왔단 말입니까?”
“내용은 간단했다. ‘비아가 살아 강호에 나왔으니, 만나고 싶다면 스스로 나올 일’이라 적은 편지였지. 네 어미가 내게 말하기를, ‘위지소진은 내 필체를 잘 알고 있으며 또한 내가 절대 자식을 걸고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 편지를 보면 분명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더구나.”
금비는 얼굴 가득 놀람을 떠올렸다. 그런 그에게 도충량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무황성의 첩보기관인 만안루(萬眼樓)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위지소진의 닦달에 만안루 전체가 며칠 동안 네 나이의 강호초출을 찾아서 천하를 이 잡듯이 뒤졌다고 하더구나. 결국 금검파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너를 만안루에서 포착했고 그것이 위지소진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너는 금검파를 나와 사라진 후였고, 마교의 공작분타인 마영각(魔影閣)에서 열심히 네 흔적을 지운 덕분에 무황성에서는 더 이상 너를 찾을 수가 없었지.”
금비는 아무런 대꾸 없이 도충량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국, 그녀의 처소에 자필 편지가 놓였다. 함정일 수도 있었으나, 마교의 첩자는 목숨을 걸고 그것을 가져왔지. 함정은 아니었고, 그 내용 역시 간단했다. 너를 만나게 해 준다는 약조를 하라는 것이었다. 네 어미가 다시 약속한 편지를 보낸 날 밤, 위지소진은 어떤 수를 쓴 것인지 혼자서 무황성을 나와 약속한 개봉의 한 술집에 나타났고 순순히 내게 잡혔다.”
“하아…….”
탄식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금비와 그런 그를 바라보는 도충량의 웃음 띤 얼굴.
조용하고 유순하기만 해 어릴 적 금비와 둘만 놓아두면 하루가 지새도록 둘이 노는지 자는지 모르겠다며 웃던 부친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고, 정원 어디를 가든지 금비의 옷자락을 붙들고 따라다니면서 말없이 그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던 수줍고 큰 눈망울이 눈가에 선했다.
그렇게 순하기만 한 기억 속의 그녀가 이토록 대담한 짓을 저지르다니.
‘가여운 사람……. 아직까지 나를 기억하고 있었더란 말이오.’
생각에 빠져 든 금비의 귓가에 도충량의 말이 이어졌다.
“그 아이도 참 대단한 것이, 입속에 독환(毒丸)을 숨겨 물고 나왔더구나. 아마 내가 아닌 다른 이가 갔더라면 십중팔구 자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네 어미도 그걸 알기에 굳이 나에게 그녀를 맞이하러 가도록 부탁했겠지만. 네 집에서 두어 번 본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지, 천하에 악명 높은 잔비혈괴를 만나고 안심한 여아(女兒)는 그 아이가 처음일 것이다. 이것이 위지소진이 실종된 사건의 전말이다.”
“그러면…… 위지천우를 납치할 계획 역시 어머님께서 세우신 것입니까?”
금비의 물음에, 도충량이 약간 거북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그것은…… 그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입니까? 소진을 미끼로 천우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운 이가.”
“그것은…….”
거북한 얼굴로 금비를 바라보던 도충량이 결국 토해 놓듯이 대답했다.
“그것은…… 천악(天岳)의 계획이다.”
“천악…… 해연의 오라비인 천악 말입니까?”
“그렇다. 사실, 지금의 마교는 거의 천악이 장악하고 있는 상태다. 네 외조부인 사마충양은 일선에서 거의 물러났고, 겉으로는 네 어미와 천악 둘이서 교를 이끌어 가고 있으나 실제 칠 할 이상은 천악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군요…….”
조용히 말하는 금비에게, 약간 들뜬 듯한 도충량의 말이 이어졌다.
“천악, 그놈 역시 대단한 놈이다. 너와 같은 나이에 마교 내의 숱한 거마효웅들을 휘어잡고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지. 무공과 지략, 어느 쪽에서든 교내에서 따를 자가 없다. 아마 정식으로 천악이 교주에 등극하면 마교는 사상 최고의 부흥을 이루게 될 것이다.”
후일 파천신마(破天神魔)란 별호를 얻으며 금비와 대립해 평생에 걸쳐 사투를 벌이는 마도 사상 최고의 기린아 조천악.
평생의 숙적이자 서로를 가장 잘 이해했던 두 영웅은, 아직까지 서로의 존재를 희미하게 인식할 뿐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깨고, 다시 금비의 질문이 이어졌다.
“백부님,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그러거라.”
“대체 어머님과 천악이 위지가의 자식들까지 납치해 가며 얻으려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기에, 자칫하면 무황성과 전면전을 치를 위험까지 무릅써 가며 손에 넣으려 하시는 것입니까?”
금비의 질문에, 도충량은 대답 없이 밤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도충량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다.”
“왜입니까? 무엇이기에 저에게까지 말씀해 주실 수 없는 것입니까?”
“그런 이유가 있다. 나중에, 네 어미를 만나거들랑 직접 물어보려무나.”
그런 대답과 함께, 도충량은 굳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성격상 이렇게 되면 절대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금비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갑자기, 도충량이 몸을 일으켰다.
“영차, 나는 그만 가야겠다.”
“어디로…… 벌써 가시려 하십니까?”
“사실, 너와 두향응들이 싸울 때 그곳에 내가 없었던 것은 급히 네 어미에게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그곳에 올 줄 알았다면 내가 자리를 비우는 일은 없었겠지만…… 요즘 마교 내에서 네 어미의 상황이 조금 안 좋다. 별일은 아니다만, 오랫동안 내가 곁에 없으면 조금 불안하구나. 네놈은 내가 가자고 목줄을 걸고 끌어도 안 가기로 마음먹었다면 절대 따라오지 않을 녀석이니, 억지로 가자고 권하지는 않겠다. 하나 어미를 오랫동안 걱정시키는 것은 자식으로서 못할 일, 빠른 시간 내로 교로 찾아오거라.”
“알겠습니다. 저 역시 꼭 가야 할 곳이 있어 지체하는 중이니, 일이 해결되면 어머님을 찾아뵐 것입니다.”
“그래, 알겠다. 네 무공을 보아 큰 걱정은 않는다만, 강호는 흉험하고 귀계가 난무하는 곳이니 언제나 조심하거라. 특히 오늘과 같이 어설픈 자비심은 목숨을 위험하게 할 뿐이란 것을 각골명심하거라.”
말과 함께 몸을 날리려는 도충량을 금비가 불러 세웠다.
“백부님, 그녀는……?”
“위지소진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녀를 어디 숨기셨습니까? 무어라 해도 그녀를 납치해 뜻을 이루려는 것은 잘못된 일, 그만 풀어 주심이…….”
도충량의 웃음 띤 목소리가 말했다.
“하하. 이 녀석아, 네 몸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아라.”
의아해 하며 자신의 팔다리를 바라보는 금비에게, 도충량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꼼꼼한 솜씨가 내 솜씨인 것 같으냐? 내가 네 온몸을 닦고 치료한 후, 머리에 문사건까지 정갈히 매어 줄 사람으로 보이느냐?”
“그, 그럼…….”
“그래, 그 계집아이가 한 솜씨니라. 내 너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잠시 혼혈(昏穴)을 짚어 두었으나, 지금쯤 깨어날 때가 되었다. 오매불망 너를 그리다가 사지(死地)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올 정도인 아이니 오늘 밤 쌓인 정담이나 맘껏 나눈 후 네 손으로 무황성에 데려다 주거라.”
말과 함께 도충량의 신형이 암천(暗天)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잠시 후, 도충량이 사라져 간 뒷자락을 바라보고 있는 금비의 귓가에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돌아선 금비의 눈에,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한 소녀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새카만 흑의를 걸친 채 치렁거리는 흑발을 가슴께에 늘어뜨리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마치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
무림사미 중의 첫 번째, 해어화(解語花) 위지소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위지소진의 커다란 눈망울에 가득 눈물이 차오르더니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자리에서 날아갈 듯 대례(大禮)를 올리며, 위지소진이 흐느끼듯 말했다.
“실로 십 년 만에…… 정랑(情郞)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그동안 잘 지냈소, 아진(兒珍)?”
어스름 달빛이 비쳐드는 동굴 안에서, 가약(佳約)의 정인들이 재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