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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17화)
八章 애련(愛憐)(3)
***
“아, 아진! 이러지 마시오! 왜 이러는 거요? 어서 일어나시오, 하하…….”
당황함이 가득 섞인 목소리.
금비는 강호출도 이후 가장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내공 한 줄기 쓸 수 없는 몸으로 풍음전과 맞섰을 때도,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리며 두향응과 사투를 벌일 때도 이렇게 당황한 모습의 금비는 볼 수 없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당황하게 만들었을까?
그 해답은 지금 금비의 눈앞에 무릎 꿇고 앉은 위지소진의 모습이었다.
단정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땅바닥에 대고, 삼단 같은 머리채를 앞으로 내려뜨려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보인 채 위지소진은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하하. 이게 무슨 부탁이란 말이오. 어서 일어서지 못하겠소? 이런 장난은 정말로 곤혹스럽기만 하오.”
“십 년을 하루같이 비랑(備郞)께서 혹여 살아 계신다면 하는 믿음으로 살아왔어요. 선친께서 돌아가시고 비랑마저 실종되신 지 올해로 꼭 십 년째, 이 해가 지나도 비랑이 살아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자진(自盡)하여 이 목을 비랑의 어머님께 보내 드려 그 원한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리려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미안하오. 못나고 어린 마음에 그만 심산에 묻혀 세월 가는 줄을 잊었다오. 지금 이렇게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았소? 그러니 어서 일어나시오. 도대체 이 무슨…….”
무릎에 파묻은 고개를 저으며, 위지소진이 말을 이었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비랑께서 이렇게 살아 계셔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제 십 년 소원이 풀렸습니다. 이제 남은 소원은 가문의 죄를 이 목숨으로 조금이라도 갚는 것……. 못난 제 목숨 값이 어찌 부친의 혈한에 비하겠습니까만은, 원수의 딸인 저를 죽이시고 이 복수를 멈추어 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흔들림조차 없는 목소리. 위지소진의 말이 거짓이 아닌 진정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금비는 혀를 찼다.
‘하하. 어찌 십 년 전과 하나 달라진 것 없는 성정일까. 그때도 그랬지만 해연과 소진, 당신들 두 사람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구려…….’
어렸을 적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십 년 전, 부친과 함께 세상에 부러울 것 없던 금비에게 사촌누이 조해연과 유자성의 친우 위지강의 딸인 위지소진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을 좋아해 주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도 강해, 부드럽기만 한 금비로서는 도저히 배겨 날 수 없는 상황을 자주 만들고는 했던 것이다.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 조해연은 어린 나이에 불구하고 직선적인 감정표현과 격렬한 성격으로 금비를 놀라게 하기 일쑤였고, 위지소진은 온순한 듯하나 한 번 마음먹으면 하늘이 쪼개져도 굽히지 않는 고집과 고지식함으로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는 했다.
금비의 부친 유운신검 유자성과 현 무황성의 성주 위지강은 어릴 때부터의 지기로, 서로 흉금을 터놓고 사귀는 사이였다.
금비보다 한 살 아래로 태어난 위지소진은 부친을 따라 자주 금비의 집에 놀러 오고는 했는데, 부친을 닮아 선골(仙骨) 가득한 금비의 모습은 어린 위지소진에게 연정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금비의 열 살 되던 생일날, 축하를 위해 모인 유자성과 위지강은 술에 취한 채 의기투합하여 두 소년소녀를 약혼시키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사실 약혼이라 하나 어떤 의례를 치른 것도 아니요, 그저 두 사람의 부친들이 술에 취해 반농반진(半弄半眞)으로 입에 올린 말이었다.
그러나 술자리 곁에 다소곳이 꿇어앉아 부친들의 웃음 섞인 약속을 듣고 있던 위지소진은 가만히 금비의 옷자락을 끌어당겨 작은 방으로 숨어들었다.
해가 막 져 가는 황혼녘에, 자그마한 촛불을 밝히고 방석을 깔아 금비를 정좌시킨 후 위지소진은 그에게 대례를 올리며 말했다.
뒤뚱거리며 어색한 절을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책상다리를 흔들거리면서 바라보는 그에게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소녀.
“운비 오빠, 아니 이제부턴 비랑이라 부르겠어요. 아버님 말씀 들으셨죠?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앞으로 유가(劉家)의 며느리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수양을 다할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으응? 무슨 말이지? 아진이 왜 우리집 며느리가 돼? 아진은 우리 아버님한테 시집오고 싶은 거야? 곤란한데……. 어머님께서 아진을 단칼에 죽이려 드실 거야.”
“아버님께가 아니라 오빠에게예요! 아버님들의 약속 못 들으셨어요?”
“으응, 그거? 하하, 신경 쓰지 마. 우리 아버님은 술에 취하시면 태산도 팔아먹는 양반이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실 정도인걸.”
“부모의 언약은 자식에게 천금과 같은 것, 어찌 그리 쉽게 말씀하시나요? 아니면…… 오빠는 내가 신붓감으로 맘에 안 들어요?”
“응? 으응…… 그건 아닌데…… 소진은 예쁘고 착하니 누가 부인으로 맞고 싶지 않겠어?”
“그럼 됐어요! 아버님들끼리 약속도 있으셨고 오빠도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니, 이제부터 위지소진은 유운비의 장래 아내예요.”
“그, 그치만…….”
우물거리는 금비에게, 위지소진은 코끝이 닿을 듯 얼굴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그치만이라니요?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나요?”
“곤란한데…….”
“뭐가 곤란해요?”
위지소진이 되묻는 순간, 콰당! 하며 문이 열리더니 한 소녀가 구르듯이 뛰어들어 왔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에 푸른 경장을 차려입은 조해연, 그녀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뛰어 들어온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풀 죽어 중얼거리는 금비의 목소리.
“곤란해……. 해연이 안다면, 난리난단 말이야…….”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듯한 얼굴로 뛰어들어 온 조해연이 방 안의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소리쳤다.
“뭐, 뭐 하는 거야? 운비 오빠, 저 계집애랑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미 유자성과 위지강의 언약에 대해 들은 듯, 조해연의 얼굴은 노화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위지소진이 제법 의젓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고치면서 타이르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해연이 왔구나?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내가 비랑의 아내가 되기로 했으니, 우리는 친척이 되겠구나.”
“뭐, 뭐? 비랑? 아내? 오빠,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나, 난 잘 몰라……. 아, 아버님께 물어봐.”
고개를 숙이고 풀죽은 금비를 쏘아보다 시선을 돌리는 조해연과 반듯이 서서 그 시선을 받아들이는 위지소진.
“비랑, 왜 그러세요? 해연도 알아야죠, 우리가 약혼했다는 것을…….”
“뭐, 뭐? 약혼? 웃기지 마! 오빠 부인은 내가 될 거란 말야!”
“미안하지만 이미 아버님들 사이에서 결정하신 일이야. 네가 무어라 말한다 해도, 나는 이미 비랑의 정혼자란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가는 조해연과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위지소진.
‘터진다…… 터진다…….’
초조하게 마음속으로 세고 있는 금비의 눈에, 드디어 울음을 터뜨리며 날아오르는 조해연의 모습이 보였다.
‘터졌다!’
후다닥 방석 밑으로 숨어드는 금비와 허공에 십여 개의 장영(掌影)을 수놓으며 달려드는 조해연. 그리고 소매를 떨쳐 역시 십여 개의 수영(手影)을 띄우며 맞이하는 위지소진.
“으아앙―! 오빠 부인은 나야! 죽어라, 이 나쁜 계집애!”
“어디서 그런 상스런 말을……. 그런 품위 없는 태도로 어떻게 비랑의 아내 자리를 넘볼 수가 있니?”
허공에서 뿌려지는 삼성 수위의 군마장(群魔掌)과 이에 마주쳐 가는 삼성의 소선녀수(素仙女手).
방 안이 발칵 뒤집어지도록 싸우던 두 소녀는, 급기야 사마추상과 위지강이 각자 싸움을 뜯어말릴 때까지 남아나는 가구가 없어지고 한쪽 벽이 허물어질 정도로 혈투(?)를 벌였다.
싸움이 잠잠해지자 그제야 방석 아래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며 슬쩍 웃어 보이는 금비에게, 유자성의 취기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이놈, 벌써부터 엄처시하(嚴妻侍下)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구나? 부끄러워할 것 없다, 원래 유씨 집안은 대대로 공처가 집안이니라.”
흐드러지게 웃는 유자성과 그를 바라보며 또한 웃음을 날리는 위지강. 그러나 이후 아홉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유자성은 위지강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에 빠져 들었던 금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직도 엎드려 있는 위지소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훌쩍 커 버려 만개한 아름다움을 마음껏 뿜어내고 있는 그녀.
무림사미 중 첫째라 일컬어질 정도로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위지소진이건만 지금 지금의 모습은 죽을죄를 지어 처분만 기다리는 죄수의 그것이었다.
금비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위지소진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았다.
“고개를 들어 보시오, 소진.”
살며시 고개를 잡아드는 금비의 손길에, 더는 거역할 수 없었던 듯 위지소진이 얼굴을 들었다.
얼굴 가득히 흘러내리는 눈물.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솟아오르는 듯한 눈물을 계속 흘려 내면서, 위지소진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금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비랑,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너무 기뻐요. 매일 밤 잠들면서 비랑의 손에 죽을 수 있는 행운이 오기를 기도 드렸습니다. 십 년 동안 올린 기도가 이제야 이루어지는 판국, 너무 기뻐 참을 수가 없어요.”
“어째서…… 어째서 내 손에 죽어야만 한다는 거요?”
위지소진이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누가 무어라 해도 저는 살부지수(殺父之讐)의 자식……. 당신의 복수에 죽어 갈 부친의 모습을 살아서 볼 수도 없고, 복수 중에 죽어 갈지도 모를 당신의 모습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저 제게 내려진 단 하나의 행복이라면 정랑의 손에 죽을 수 있는 것. 바라건대 저를 죽이시고 아버님을 용서해 주세요.”
금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죽여 달라는 위지소진의 목소리에는 진정(眞情)만이 가득했다.
다른 이가 이러는 것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부친의 목숨을 사려는 장난질이라 비난이라도 해 보련만, 그녀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돌아갈 줄 모르는 올곧은 마음씨. 그녀는 진심으로 죽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금비가 살아 있기만을 바라고, 그 손에 죽기만을 바란 것이 위지소진의 하나뿐인 진심이라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위지소진의 눈물 젖은 얼굴을 바라보던 금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진, 내가 이름을 바꾸어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들어 알고 있습니다. 금(金) 자, 비(備) 자. 금비라 쓰신다고요.”
“내가 무엇 때문에 굳이 부모님이 내려 주신 이름자를 바꾸었는지도 알고 있소?”
“……저 또한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어찌 선친이 지어 주신 이름을 버리셨나요?”
“내가 이름자를 바꾼 것은 유운비란 이름이 내게 해를 끼칠까 두려워서도 아니요, 모친에게 복수심을 품고 그리한 것도 아니며, 은밀히 부친의 복수를 하고자 암계를 꾸며서도 아니오.”
“그러시면……?”
“그저 나는, 행여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문의 원한이라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오.”
위지소진이 감았던 눈을 뜨며 놀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금비가 웃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당신은 아오? 부친께서 돌아가실 때 내게 웃으며 이르신 말을……. 온몸에 수십 개의 검상을 입으신 채 천길 낭떠러지에 나를 던지며 부친은 웃으셨다오. 그리고 내게 이르시길, 그 죽음이 통쾌해 심히 자신의 마음에 든다 하시며 이제 선계(仙界)에 드는 마당에 사소한 인연들은 흘려 보내는 것, 소인(小人)의 원한에 집착하는 삶을 살지 마라 이르시며 눈을 감으셨소.”
담담한 어조로 부친의 죽음을 말하는 금비의 모습을, 위지소진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은 이미 멎어 있었고, 바라보는 눈길에는 알 수 없는 반짝임이 보였다.
“내 마음 또한 그러하오. 부친의 죽음은 분명 억울하나 또한 강호에 수많은 억울한 죽음들 중 하나인 것. 그 깨달음이 지고하여 선계에 드신 마당에 티끌 같은 육신의 죽음이 어떤들 무슨 상관이오? 그저 가죽부대 같은 이 몸뚱어리가 온전히 스러지거나 흉하게 상처 난 채 스러지거나, 그저 먼지로 스러져 갈 뿐인 것은 모두 같은 일. 내 어찌 부친의 당부를 거스르고 사소한 원한에 집착하겠소?”
“그러면, 그러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위지소진에게, 금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실로 그러하오. 이 사람 금비는 과거의 유운비와는 다른 사람. 내 굳이 강호에 아버지 유자성의 비사(秘事)를 알리거나 유씨 집안의 재건을 생각하는 바 없었기에 이름을 바꾸었고, 과거의 원한에 얽매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오…….”
“아아!”
한 줄기 신음성과 함께, 위지소진이 금비에게 안겨 왔다.
그 품에 안겨 그저 눈물을 흘리고만 있는 위지소진과 그녀를 부드럽게 마주 안아 주는 금비의 모습.
한참을 그 품에 안겨 눈물짓던 그녀가 천천히 떨어지며 얼굴을 붉혔다.
“정랑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겠소? 그리고 나는 당신의 정랑도 아니니, 이제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을 듯하오.”
청천벽력 같은 금비의 말에 위지소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이내 그녀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