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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18화)
八章 애련(愛憐)(4)


“비, 비랑. 어, 어찌 그런 말씀을……. 어찌 비랑께서 제 정랑이 아니라 하시나요?”
그런 위지소진의 눈에,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얼굴이나 한편으로 단호함이 비치는 듯한 표정의 금비가 대답했다.
“방금 듣지 않았소? 지금 당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람과 예전 유운비는 다른 사람이라고. 당신과 어린 날 가약을 맺었던 유운비는 지금 세상에 없소. 그 사람이 사라진 마당에 정혼 서약이 남아 있을 리 없는 것이오.”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을 흘리며, 위지소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어찌 그런 말씀이 있을 수 있나요? 누가 뭐라 해도 제 눈앞에 서 계신 분은 제 가약의 당사자이신 분, 어찌 십 년을 하루같이 기다려 만난 정인께서 저에게 그 약속이 사라졌다 말씀하시나요?”
“그것이 사실이오. 어린 날의 약속은 그저 마음에 새겨 둘 일, 내 말을 이해하시고 나를 잊으시오.”
위지소진이 세차게 도리질하며 흐느꼈다.
“안 돼요, 안 됩니다! 어리석은 저는 비랑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요. 비랑을 잊으라니, 잊을 수 있었다면 이토록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지금 죽여 주세요. 당신께 죽는 날을 그토록 꿈꿔 왔지만 정인께 버림받는 날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습니다. 그 말씀을 거두시고 지금 한칼에 저를 죽여 주세요.”
금비가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역시 조해연과 위지소진은 다른 사람. 우직하다 할 정도로 곧기만 하고 굽힐 줄 모르는 이 여인은 무슨 말을 들어도 그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진, 내 부친의 원한에 연연치 않으나 당신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는…… 그럴 수는 도저히 없소. 어찌 내 입으로 이 말을 하도록 만들려는 거요?’
이것이 도저히 말로 할 수 없는 금비의 심정이었다.
가문의 원한에 연연치 않는다 했으나 또한 원수의 자식을 아내로 맞아들여 해로하는 것 또한 자식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그 복수를 묻어 둔 채 남으로 살아가는 일은 가능하다 할지라도, 원수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아간다는 것은 금비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또한 위지소진을 사랑했다.
지금 금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여자는 두 사람.
부드럽고 안온한 심은과 올곧고 충애(忠愛)한 위지소진이었다.
그러나 위지소진과 자신은 도저히 맺어질 수 없는 일. 지금 애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은 금비의 가슴을 찢어 놓는 듯했다.
아무 말 없이 허공만을 바라보는 금비에게 위지소진이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비랑, 도저히 저를 받아들일 수 없으시다면 지금 저를 가져 주세요. 저를 취하고 죽여 주세요. 제발, 저에게 남으로 살아가라 하지 마시고 당신의 정인으로 죽게 해 주세요.”
“어찌 그리 모르시오…….”
한 마디 탄식과 함께 금비가 몸을 일으켰다.
엎드려 우는 위지소진을 돌아보며 나직이 이르는 금비의 목소리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정념이 가득했다.
“인연은 잊은 듯이 묻어 둘지라도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라……. 내 당신의 마음을 간직하겠으니,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대답이오.”
한마디 말과 함께 동굴을 걸어 나가는 금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말의 뜻과 함께 목소리 속의 애련(哀戀)을 느낀 위지소진의 눈에 언뜻 기쁨의 빛이 떠돌았다.
위지소진이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금비의 등에 절했다.
‘그렇군요. 저를 받아들일 수도, 죽일 수도 없는 당신의 마음을 어찌 헤아리지 못했을까요. 당신의 곁에서 살아갈 수 없더라도 당신의 마음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죽지 마세요, 죽지 마세요. 당신이 살아 계시기만 한다면 저도 살아갈 수 있어요. 제발 죽지만 마세요.’
엎드려 흐느끼며 기원하고서 고개를 든 위지소진의 눈에, 이미 동굴 입구에 선 금비의 모습과 함께 동굴을 비추는 달빛이 가득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 아래에서 금비는 등을 돌린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옥루고검을 빼어 든 그가 칼을 들어 올리며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 깨달음은 심마 속에서만 눈을 뜨는 듯하여…… 불현듯 다가오는 이 심득(心得)은 아마도 당신 덕분인 듯하오.”
허공에 떠오르는 옥루고검.
금비의 손을 떠나 홀로 허공에 뜬 칼이 부드럽게 흘렀다.
물결치듯 흘러가며 허공을 수놓는 옥루고검과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든 채 칼 아래에서 춤추는 금비의 모습.
쏟아지는 달빛 아래, 살짝 떠올라 검결을 밟으며 춤춰 흐르는 금비의 손끝을 따라 밤하늘을 수놓는 새하얀 검광.
어느새 칼날은 아래로 향해 검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조금씩 떠가는 그의 몸을 감싸며 짙어 가던 검광이 한순간 허공에서 펼쳐져 금비의 몸을 뒤덮은 채 달빛과 함께 쏟아졌다.
이것이 천애무극검결의 다섯 초식 중 두 번째 초식이며, 유일하게 방어를 위한 호신검법(護身劍法)인 월광무결(月光舞訣). 금비는 평생 동안 이 초식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이날을 합쳐 오직 만월 아래에서 세 번 시전했다.
그 이름도 모른 채 이 무공을 본 무림인들에 의해, 그 춤사위가 너무나 애절하여 월하애검무(月下哀劍舞)라 별칭을 붙인 채 입에 오르내리다가, 후일 금비의 천애무극검결을 정리하며 단일비가 정식으로 붙인 초식명이 월광무결(月光舞訣)이 된다.

꿈꾸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위지소진의 눈에, 어느새 금비의 신형은 사라지고 없었다.
달빛만이 가득한 동굴 어귀에서, 위지소진은 벽에 기대선 채 금비의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九章 드러나는 비사(秘事)(1)


강호삼괴 중 둘이 한 사람에게 죽었다!
금수혈괴 응초형이 애수(愛獸) 음혈호와 함께 목줄기에 검이 틀어박혀 죽었고, 고루혈괴 두향응은 자랑하던 오죽흑관과 함께 두 쪽이 났으며, 강호삼괴 중 홀로 남은 잔비혈괴 도충량은 행방이 묘연하다!
최근 하남 일대를 떠들썩하게 울리는 소문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강호를 횡행하며 정사를 불문하고 겁내는 자 없이 풍파를 일으키던 강호삼괴 중 둘이 한꺼번에, 그것도 한 사람을 협공하다가 죽었다는 소문은 하남에서 시작되어 온 강북(江北)을 위진하고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했던가. 하남을 시작으로 퍼지기 시작한 이 이야기는 최근 강호에서 단연 가장 빠르게 전파되는 소문이었다.
강호삼괴들의 뿌리가 사도(邪道)에 있어 정식의 평가는 미미했으나 일견 구파일방의 방주들과 견주어도 그 이름값이 크게는 떨어지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바였다.
특히 잔비혈괴는 그 무공이 대홍락에 이르러 화산과 무당, 소림 세 곳의 방주가 아니고서는 구파일방에는 그를 능가할 고수가 없을 것이라 평가받는 고수였고, 고루혈괴와 금수혈괴 역시 잔비혈괴에는 한수 뒤떨어지긴 하나 각각 황화예의 끝자락과 대홍락의 초입에 이르렀을 거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고 있는, 사실상 당금 강호상의 초고수로 인정받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 중 둘이 한 사람의 손에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더구나 그들을 살해한 사람은 이제 강호초출인 자로, 이제 갓 약관을 넘긴 홍안(紅顔)의 청년이다!
어디서 어떻게 결전을 벌인 것인지, 싸움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새 강호를 위진하고 있는 소문.
소문을 통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세 사람이 정식 결투를 벌여 청년이 승리했으며 어떠한 암수도 없었다는 것, 청년이 백의를 입고 백색의 검을 사용한다는 것뿐이었다.
거기에 더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이 백의의 청년 고수가 처음 강호에 나설 당시에는 무공을 모르는 백면서생이었다가 짧은 기간 동안 신공을 터득해 강호삼괴를 물리칠 경지까지 이르렀다는 소문까지 더해, 이제 이 청년 고수는 하남 일대에서 사람 반 귀신 반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사실상 강호삼괴가 속해 있다고 알려진 마교에서 아무런 해명도 없었고, 또한 이러한 소문 중에도 강호삼괴 중 누구도 나타나서 그것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일 없이 열흘가량이 흐르자 소문은 이제 당연한 사실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두향응과 응초형을 격살한 소년 고수는 이름도 얼굴도 알려진 바 없이 그림자만으로 강호를 위진하고 있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신진고수를 의심 반 경탄 반으로 주시하며 흰 옷을 입고 흰 검을 들었다 하여 그에게 백의백검(白衣白劍),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채 혜성처럼 등장한 고수라 하여 무영신룡(無影神龍) 따위의 별호를 지어 붙이며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던 중,
“만약에 갓 약관에 이른 청년이 그들을 격살한 것이 사실이라면, 거기다 소문을 믿어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에 그 정도의 기량에 올라섰다면 이것은 단순히 한 천재 고수의 출현이 아니다. 내 들어온 어떤 조숙한 천재라 해도 그 나이, 그 기간 동안에 그 정도의 기량에 다다른 이는 없었느니라. 만약에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는 괴동, 강호사에 처음 나타난 괴동이다…….”
무당파(武當派)의 삼대고수 중 하나라 알려진 옥허자(玉虛子)가 이 소문을 전해 듣고 이렇게 말한 것이 강호에 알려지면서, 그의 별호는 다시 바뀌었다.
백의괴동(白衣怪童)!
글줄깨나 읽었다는 강호인들이 백검진천하(白劍振天下) 따위의 별호를 만들어 붙이기는 했지만, 이 이름 모를 소년 고수는 그저 백의괴동이라는 별호로 혜성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

숭산.
금비는 숭산 자락에 도착해 산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느새 연한 청의를 차려입고 머리에는 하얀 문사건을 두른 채, 옥루고검 역시 물빛 천에 감싸 든 모습이었다.
고루혈괴 등과 사투를 벌이고 위지소진과 헤어졌던 개봉 인근의 야산에서 보름 남짓 걸려 숭산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머무르는 객점이나 주루 등에서 오직 화제인 것은 그와 두향응들과의 결투의 소식이었다.
처음 개봉을 떠날 때 ‘그 따위 헛소문이 어디 있냐?’고 하던 사람들의 반응은 사흘이 지나자 ‘그게 사실이냐?’로 바뀌었고, 열흘째가 되어 갈 때는 백의백검이니 무영신룡이니 하면서 온갖 소문이 난무하고 있었다.
급기야 며칠 전 무당의 옥허자의 말이 돌기 시작하면서 백의괴동이라는 괴상망측한 별호가 붙은 것을 알게 된 금비는 새삼 강호의 소문의 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문의 진원이 누군지는 자명한 것, 도충량이 아니면 그의 모친 사마추상이 일부러 마교의 소식통을 통해 강호에 퍼뜨렸을 것이다.
아마도 금비의 향후 강호행을 위한 밑자락을 깔면서도 그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이름자는 숨긴 채 그저 소문만 퍼뜨려 놓은 것이리라.
그러나 애초에 별로 세간의 명리(名利)에 관심이 없었던 금비는 그러한 소문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 남루하지만 백의를 걸치고 손에 옥루고검을 든 자신을 주루의 강호인들이 유심히 바라보며 수군대는 것을 느낀 후 일부러 포목점에 들러 청의를 사 입고 또 푸른 천으로 옥루고검을 감싸 버린 것이다.
금비가 사투를 벌였던 개봉과 낙양 인근의 숭산까지는 멀다 해도 일 갑자 공력 정도를 가진 고수라면 경공을 시전해 사흘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그러나 금비는 걸어서 꼬박 보름을 허비해 도착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금비의 무공의 특징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말 그대로 금비의 무공, 특히 내공의 운용은 일반적인 강호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그는 온몸에 산재한 내공을 일시적으로 끌어들여 이를 폭발시키듯 운용하는 방식으로 내공을 사용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신체적 불구를 감당하고 무공을 사용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는데,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그에게 일정한 내공을 계속적으로 운용해 몸을 빠르게 하는 신법을 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투 중 순간적으로 몸을 빠르게 하는 보법(步法)이라면 몇 가지 깨우친 바 있었으나, 애초에 사용할 수 없는 경공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무지하다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필요 없는 무공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이후로도 그의 무공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일관되어, 그가 남긴 무공은 부친 유자성의 소요칠결을 비롯한 몇 가지의 검법과 심법(心法), 그리고 보법(步法)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이러한 금비의 무공을 바탕으로 모자란 경공이나 신법(身法), 장법(掌法) 등을 창안하고 수집해 한 문파의 기틀을 세운 단일비의 공은 결코 적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단일비가 창안하기도 하고 때로 타 문파의 무공을 수집, 발전시켜 만든 절기들은 하나같이 금비의 진산절예(鎭山絶藝)에 매우 모자란다는 평을 받게 되는데 단일비 또한 이를 진심으로 인정했으나, 그저 무예를 사용하였을 뿐 후예에 대한 배려는 전혀 생각지 않았었던 금비에게 단일비란 걸출한 제자가 없었다면 후일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으로 추앙받으며 오랜 세월 무림에 군림한 무극문(無極門)의 탄생은 요원했을 것이다.
이러한 칭찬에 대해 단일비 역시 스스로 흡족했던 듯, 만년(晩年)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