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천애고검기 1권(19화)
九章 드러나는 비사(秘事)(2)


“실로 그러하다. 금비 비조님께서는 강호사에 다시없을 천고기재(千古奇材)셨으나 또한 그 성정(性情)이 너무나도 초탈하여 자신의 신공절예를 후세에 남기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분. 너희가 지금 그분의 절예를 배우고 견학할 수 있는 것만큼은 모자란 나의 공이 크다 할 것이다.”
그러면, 경공이 모자란다면 말을 구해 타고 온다면 훨씬 빨리 올 수 있었을 길을 그는 왜 그리하지 않았을까?
불쌍한 일이나 금비의 수중에 은자는 거의 떨어진 상태였다.
강호에 나오면서 수중에 돈 한 푼 지니지 않았던 금비에게 가진 돈이라고는 오직 단청하에게 산삼을 팔고 받은 오십 냥의 은자가 전부였고, 그 돈은 지금까지 강호행 동안 조금씩 써 버려 이제 수중에 남은 것이라곤 겨우 십여 냥의 은자뿐이었다.
말이라 하는 것은 엄청난 고가의 짐승. 금비가 있는 돈을 탈탈 털어도 말 한 마리를 살 돈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금비의 성격 자체가 도대체 서두름이란 것이 없었고, 굳이 말을 구해 달리는 것을 스스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아 느긋하게 걸어온 것이었다.
지금 숭산을 바라보는 금비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동굴 안에서 위지소진과 그처럼 가슴 아프게 이별했건만, 심마에 싸인 듯했던 금비의 마음은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정해(情海)는 어쩔 수 없는 것, 숭산을 바라보는 금비의 눈에 아련히 떠오르는 것은 엎드려 흐느끼던 위지소진의 얼굴이었다.
금비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인연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 소진,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나 역시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오. 내 인연을 거스르는 짓을 할 마음은 없으나 또한 아무런 노력 없이 우리의 인연을 그저 흘려 보낼 수도 없다는 심마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구려.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내 스스로 이 심마를 놓지 아니하려 한다는 것……. 마음이 지극하면 하늘이 정하신 인연도 바뀐다는 옛사람의 말씀을 믿어 보고 싶소.’
그 생각을 끝으로, 금비는 숭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그는 소실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원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듯이, 숭산 소실봉에는 소림사가 위치하고 있다.
천년 중원 무학의 본산지이며, 구파일방의 태두인 소림사.
고즈넉한 숲의 끝자락에, 웅혼하다기보다는 겸애(兼愛)한 듯한 느낌의 산문(山門) 앞에서 금비는 합장하며 머리를 숙였다.
산문을 지키는 지객승(知客僧) 한 명이 마주 합장하며 금비에게 물었다.
“아미타불. 늦은 시간에 시주께서는 어인 일로 소림을 방문하셨는지요?”
“저는 금비라 하오며, 소림사에 계신 고승(高僧) 한 분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그분의 정확한 법명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의(空意)라 불리신다 들었습니다.”
두 지객승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곧 또 다른 스님이 합장하며 금비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희 소림에서는 해가 저물면 산문을 닫고 손님을 돌려보냅니다. 거듭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일 아침 다시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다시 뵙겠습니다.”
공손하다 하나 이는 일부러 찾아온 손님을 돌려보내는 축객령(逐客令). 그러나 금비는 웃는 낯을 바꾸지 않은 채 일언반구도 없이 몸을 돌렸다.
한 마디 조름도 없이 순순히 물러나는 금비의 모습에 지객승들 또한 조금은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돌아가는 금비의 등을 바라보면서 두 지객승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공의가 누구지? 공자 배(輩)에 공의란 법명을 쓰는 스님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던데…….”
“글세…… 아, 우리 지객당(知客堂)에서 불목하니 일을 하는 사람들 중 왜 다 죽어 가는 늙은이 하나가 있지 않나? 얼핏 그 늙은이를 공의라 불렀던 것 같던데…….”
금비는 몸을 돌려 산문을 벗어나면서 지객승의 시선에서 사라지게 되자 산아래로 내려가는 길에서 벗어나 옆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었다.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 아래에는 제법 큰 마을이 있었고 그곳에는 여러 채의 객잔이 영업 중이었다.
하나같이 소림을 찾아온 여행객들에게 방을 빌려 주고 식사를 제공하며 영업하는 곳으로서, 이러한 마을이 형성되어 성업 중이라는 것 자체가 소림사를 찾는 손님들의 수를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비는 애초에 마을로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하룻밤 지새는 것이라면 적당한 나무 아래나 동굴 속이라도 그에게는 충분했다.
천천히 산길을 따라 올라가던 금비의 눈에, 제법 커다란 나무 하나가 나타났다.
나무는 몇백 년 묵은 듯 우람한 몸집을 자랑하며 서 있었고, 그 아래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금비는 마음이 흡족한 듯 나무 아래의 잡초를 손으로 살살 쓸어 앉을 자리를 만들더니 가부좌를 틀고 나무 아래에 기대앉았다.
옥루고검을 곁에 세운 채 정좌한 후 금비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의 눈이 어느새 감겨 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금비는 나무 아래 앉아 명상에 잠겼다.
황혼이 물러가고 사방에 어둠이 물들어가도록 금비의 몸가짐에는 변함이 없었고 입가의 미소 역시 사라질 줄 몰랐다.
그렇게 수없는 시간이 흘러간 듯도 하고 찰나같이 바람이 스쳐 간 듯도 한 순간에, 부스럭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힘겹게 걸어오는 듯 천천히 들려오는 발소리. 이윽고 걸음 소리가 멈추며 금비의 앞에 한 노승이 나타났다.
온통 흰 수염이 가득하고 허리가 굽어 머리가 무릎에 닿을 듯한 노승, 한 손에 아무렇게나 꺾어 든 나뭇가지를 짚고 주름 가득한 얼굴로 금비를 바라보는 노승의 눈은 한없이 깊고 맑기만 했다.
한참 동안 정좌한 금비를 바라보던 노승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금비는 감았던 눈을 살짝 뜨고, 그 자세 그대로 입만 열어 대답했다.
“세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허허. 심마를 세상이라 포장할 셈이더냐?”
“실로 그러합니다. 심마 속에도 세상이 있습니다.”
“어린 녀석이 말재주에만 능통하구나. 도(道)란 무엇이냐?”
“그것은 길입니다.”
“마(魔)는 무엇이냐?”
“그것도…… 길입니다.”
대답하는 금비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런 금비를 바라보는 노승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깃들었다.
온통 주름으로 덮인 얼굴을 더욱 주름 잡아 눈이 사라질 듯이 웃으면서, 웃음과 함께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드러내며 노승이 다시 물었다.
“부처[佛]가 어디 있느냐?”
“세상에 있습니다.”
“이제는 심마를 부처라 포장하려 드느냐?”
“실로 그러합니다. 마(魔)도 불(佛)입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하는 금비.
온몸은 배어난 땀으로 흥건하고,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힘겹게 대답하는 모습이 당장 기절이라도 할 듯한 모양새였다.
그런 금비를 바라보는 노승의 얼굴 가득 웃음이 덮였다.
노승의 구부정한 허리가 반듯이 펴지더니, 온몸 가득 불기(佛氣)를 가득 담으며 혜광(慧光) 어린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세상은 어디에 있느냐?”
“마음속에…… 있는 듯합니다.”
“허허, 그렇구나. 그런데 부처가 어디에 있다고?”
“……용서하십시오, 어리석기 짝이 없었습니다.”
노승의 말 한마디마다 힘겨워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던 금비는 결국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자세를 무너뜨리며 허리를 굽혔다.
쿠웅!
금비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눈앞의 땅에 머리를 찧을 듯 내리꽂았다.
잠시 앞으로 머리를 박은 채 엎드려 있던 금비의 몸에서 천천히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조금 후, 몸을 일으키는 금비의 이마에 살짝 찢긴 듯 핏물 한 줄기가 흐르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 얼굴은 맑고 깨끗했다.
힘겹게 번뇌하던 모습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맑은 미소와 함께 금비가 그 자리에서 엎드려 노승에게 절하며 말했다.
“선사(禪師)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허허. 무극(無極), 그 늙은이가 거목(巨木)의 뿌리를 얻었다고 그토록 자랑하더니만 과연 그렇구나. 그래, 무극은 돌아갔느냐?”
“얼마 전 입적(入寂)하셨습니다.”
“세상에 인연을 끊지 못해 돌아가고 싶어도 못 간다며 투덜거리더니만, 네 녀석에게 모든 걱정을 지워 놓고서 훌훌 날아가 버린 게로구나. 박정한 친구, 어찌 내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혼자 돌아가 버린단 말인고…….”
“입적하시기 전부터 공의선사님의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자주는 무슨. 그 늙은이 성격에 한 번쯤 입에 담았겠지.”
금비는 아무 말 없이 노승을 바라보며 웃었다.
노승의 말대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지나가듯이 금비에게 말하던 노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떠오르고 있었다.

‘내 사귐이 짧고 세상에 벗 삼을 이가 드물어 단 한 명을 두었으니 소림의 공의라 한다. 언젠가 배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찾아가 보거라.’



十章 천명(天命)(1)


어스름 편월(片月)이 뜬 밤에 금비와 노승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승은 비스듬히 누웠고 금비는 정좌한 자세로, 두 노소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 가득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래, 무극 녀석은 편안히 죽었느냐?”
“돌아가실 때 모습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이셨습니다. 앉은 채 저와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그 모습 그대로 눈을 감으셨지요. 저는 그분이 돌아가신 줄도 모른 채 한참 이야기를 건넸답니다.”
“허허. 죽을 때까지 튀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이로다. 어디서 주워 들은 바 있어서 대오(大悟)한 모습으로 가고 싶었나 보구나.”
“그분이야말로 대오멸각(大悟滅却)이 무엇인지 저에게 몸으로 보여 주신 분. 그 넓은 깨달음을 어찌 말로 다하겠습니까.”
“허허. 스승에 대한 존경이야 제자로서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니 네 마음가짐은 칭찬할 만하다.”
“부끄럽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저를 제자로 받으신 적도 없었습니다. 하물며 그분의 이름자조차 들어 본 적 없는 불민한 제가 어찌 감히 제자를 자청하겠습니까? 부끄러운 말이나 오늘 노사님께서 그분의 이름자를 부르시기 전에는 저 자신 그분의 성명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조금은 부끄럽고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금비를 자애롭게 바라보던 노승이 누운 자세를 조금 바꾸며 웃었다.
“허허. 그것이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로구나. 아서라, 속세에서 말하는 사제지간의 잣대는 그놈처럼 탈속해 버린 인물에게는 갖다 댈 수 없는 것. 네 온몸에서 그놈의 정성이 그토록 배어 오르는데 어찌 제자가 아니라 하겠느냐? 사실, 무극이란 명칭도 그놈 이름과는 상관이 없느니라.”
금비는 조용히 웃었다.
노승의 말대로 그와 무명노인―아니, 이제는 무극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사이에 비록 구배지례(九拜之禮)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는 노인을 마음의 스승으로 받들고 있었고, 노인 역시 그를 제자로 아꼈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껴 알고 있었다.
지금 금비의 마음속은 오직 편안함만이 가득했다.
노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 금비의 마음은 예전 무극노인과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그와 노인은 언제나 이런 대화를 즐겨 나누곤 했었다.
그 대화에는 어떤 격식도 없었고, 앉거나 누워 서로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금비의 마음은 편안함과 깨달음으로 가득 차곤 했던 것이다.
지금 달빛 아래에서 노승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금비는 다시 노인과 함께했던 충만한 시간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래, 무얼 하러 늙어 가죽만 남은 늙은이를 보러 이 먼길을 찾아왔누?”
“고인(故人)께서 예전에 자주 말씀하시길 선사님만이 세상에 하나 남은 벗이라 하시며, 배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찾아가라 일러 주셨습니다.”
“흐흠. 무얼 배우고 싶은 겐가? 나야 절간의 불목하니로 늙은 몸, 이 늙은이에게 배울 게 어디 있다고?”
금비는 대답 없이 웃었다.
그런 그에게 노승 역시 얼굴 가득한 주름과 함께 웃음을 보이며 다시 말했다.
“그래, 어디 보자……. 세상을 뒤덮을 무공을 배우고 싶은 겐가?”
“무공은 이미 아는 바 있으니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
“허허, 얼마나 대단한 무공을 배웠기에 더 필요한 무공이 없다는 겐가? 소림의 탄지신통(彈指神通)이나 달마삼검(達摩三劍)을 능가하는 절예를 지녔는가?”
“어찌 감히 천년 무림의 뿌리인 소림의 탄지신통에 비할 무예를 논하겠습니까. 저는 그저 제가 아는 무예조차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 모자란 능력에 더해 보아야 화를 부를 뿐이라는 성현의 말씀을 잊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