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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20화)
十章 천명(天命)(2)
“허허. 그렇다면 지혜가 필요한가? 대오(大悟)하여 육신을 버리고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선계에 올라 영생을 누리고 싶은 겐가?”
“조금 전 주신 깨달음만으로도 감당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마음의 깨달음을 구해야 할 것이라는 스승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지니고 있사오나, 그저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뜻뿐이오니 선계에 오르려 이른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욕심은 없습니다.”
노승은 이 대화가 그저 즐겁기만 한 듯 웃음을 거두지 않고 계속 물었다.
금비 역시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떠올린 채 노승의 물음에 할아버지에게 대답하는 손자처럼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허허. 과연 무극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은 아이답도다. 그러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 늙은 중을 찾아왔누?”
“첫째로, 세상에 오직 한 분 계신 스승의 벗에게 그 죽음을 알려 드리는 것이 당연한 예의기에 왔습니다.”
“그래, 두 번째는?”
“둘째는…… 세상에서 제가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했기에 여쭈려 왔습니다.”
“가야 할 길이라?”
“그분께서는 저에게 아직 세상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다 하시며, 내려가 저의 인연을 다하라 하셨습니다. 하나 저는 대체 저의 천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어둠 속을 헤매는 중. 그에 대해 가르침을 얻고자 하여 왔습니다.”
“허허. 그렇구나. 무극 그놈은 다 나쁜데 늙어 가면서 남에게 알아듣기 힘든 선문답을 즐기는 고약한 버릇까지 들어 버렸지. 애써 키운 제자를 세상에 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또한 너에게 길을 강요하기 싫어 그저 세상에 나가라 등만 떠밀었나 보구나. 아마도 네가 세상에 나서면 인연에 따라 자연스레 네 길을 걸어가리라 생각한 모양. 그 또한 좋지 않겠느냐? 네 이미 세상에 나왔고 지금까지 얼마 안 되는 시간 속에서도 인연이 생겼을 것이다. 천명이 별것 아니니라, 이어지는 인연 속에 네 길을 발견하면 그뿐인 것…….”
노승의 긴 말을 웃으며 듣고 있던 금비가 대답했다.
“선사님의 말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하나, 고인께서 저를 제자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저의 마음속 그분께서는 오직 한 분의 스승이십니다. 그런 그분께서 그토록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며, 또한 돌아가실 때 숱한 심마에 시달리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말씀으로 유지(遺志)를 전하지 않으셨더라도 그 마음으로 이어받은 뜻을 어찌 모른 척하며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못나고 어린것이 걱정되셔서 아무런 당부 없이 그저 세상에 나가 살라 하셨으나, 저는 그분의 뜻을 바르게 알고 또한 이루고 싶습니다. 부친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뜻은 대의를 이루기 위해 필부의 원한을 지우고자 마음먹은 탓, 그러나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에게 맞서야 할지조차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습니다. 부디 저에게 올바로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노승은 잠시 말없이 금비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아주 잠깐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스치듯이 느낀 순간, 노승이 입을 열었다.
“그래……. 무극이 전혀 네 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는가?”
“사실 돌아가시기 전, 한 달여를 집을 비우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한 달 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돌아오신 후 결국 몸이 급격히 쇠약해지시며 운명하셨습니다.”
“흐흠…….”
“돌아오신 후 운명하시기까지 고작 한 달여, 그 기간 동안 그분께서는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통에 계속 괴로워하셨고, 그 모습을 불민한 저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어라 말하던 게 있었던가?”
“그분께서는 그저 마음의 고통에 괴로워하시면서 때때로 저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시기만 할 뿐,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하나 어느 날 밤, 스쳐 지나가듯 되뇌시는 것을 엿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강호에 지은 죄가 너무 크구나……’라고 탄식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금비의 말에 노승의 기다란 눈썹이 가늘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탄식하듯이 흘러나오는 한마디.
“허허. 결국 그가 걱정했던 일이 사실이었나 보구나. 그토록 늙은이의 기우이기를 바랐거늘…….”
그런 노승에게 금비가 눈을 빛내며 바짝 다가가 묻는다.
“선사님, 스승님께서 한 맺혀 하시는 죄란 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불민한 눈으로나마 스승의 눈빛 속에 담긴 고뇌를 충분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길이 얼마나 위험한 길인지도, 이루기 힘든 길인지도 알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위험의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일……. 이대로는 어떤 인연도 이어 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찌 타인과의 인연을 잇겠습니까?”
노승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달을 한번 바라보고 금비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그러다 긴 한숨을 내쉬며, 노승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사실, 무극은 몇 년 전 내게 들렀었느니라.”
“스승님께서요? 무엇 때문에 노사님을 찾으셨습니까?”
금비가 놀라 물었다. 어느새 그는 자연스럽게 노인을 스승이라 부르고 있었다.
어느새 인자한 표정으로 돌아온 노승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극은 내게 찾아와 네 이야기를 길게 했었다. 이삼십 년 정도 가슴에 품고 키우고 다듬어 세상을 받칠 들보로 키울 생각이라 자랑했었지. 그러면서 내게, 혹여 자신이 일찍 죽는다면, 그리고 혹시 본인의 사후에 네가 나를 찾아온다면 좋은 말로 타일러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나…….”
금비는 아무 말 없이 노승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 떠오른 굳건한 의지를 바라보며 노승은 말을 이었다.
“하나 만약에 네가 오직 충의(忠義)한 의지로 무극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너에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일러 주라 했었다. 아마도 무극은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면서 자신의 잘못과 인연을 잇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 생각한 모양……. 바보 같은 늙은이, 자신이 봉황을 키웠으면서 홍곡(鴻鵠)처럼 날도록 기대한단 말인가…….”
말과 함께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노승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듯한 편월을 바라보면서 노승의 잔잔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중원일성(中原一聖)에 대해 아느냐?”
“들은 바 있습니다.”
“무극의 본명은 여불해(呂不解), 외호는 무극검성(無極劍聖)이다.”
무극검성(無極劍聖) 여불해(呂不解)!
달리 중원일성이라 불리기도 하며, 이백여 년 전 중원무림을 평정하며 당당히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로 등극했던 신화 속의 인물!
천년 무림 역사 속에서 천하제일이니 고금무적이니 하는 말을 들었던 고수가 여럿 있었으나 모두가 오륙백 년 전 이야기 속 사람들로 실지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 속 인물에 가까운 데 비해, 가장 근래에 확실한 천하제일고수로 인정받으며 그 위명을 떨쳐 울렸던 무적인(無敵人).
금비가 놀란 표정을 얼굴 가득히 떠올리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스, 스승님께서 어찌 이백 년이 훨씬 지난 이 세상에…….”
“오래 사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 나 역시 그 나이는 되었느니라.”
“외람되었습니다. 용서하시길…….”
노승은 눈을 감은 채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여불해는 너무 이른 나이에 천하제일고수 자리에 올라섰지. 오십 년 가까이 무적인으로 군림하다 세상사에 염증을 느껴 검을 꺾고 은거했었느니라. 그 후, 여불해는 이름자를 쓰지 않은 채 그저 무명노인으로 행세하며 강호를 돌보는 것을 낙으로 여기면서, 선계에 들기만을 기다리며 마음을 닦고 수양에 매진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직 나와는 계속 친구의 관계를 유지해 왔지. 여불해가 이름을 버린 후 내가 마땅히 부를 글자가 없기에 그저 무극이라 불러 온 것일 뿐이니라.”
노승의 말에, 금비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면, 스님께서는…….”
“나 말이냐? 그저 절간의 불목하니일 뿐, 무극이 한창 중원을 설치고 돌아다닐 때 나도 그놈 때문에 골머리 좀 썩였느니라, 허허.”
“……만우성승(萬愚聖僧)이십니까?”
“허허. 그놈, 눈치가 제법 빠르구나. 그래, 예전 내 법명이 만우(萬愚)였느니라. 지금은 그 이름자도 버린 지 오래되었다. 내가 여불해 놈을 무극이라 별명 지어 불렀더니 그놈이 나를 공의라 부르더군. 얼빠진 녀석이라는 호칭이 꽤 마음에 들더구나.”
소림지주(少林支柱) 만우성승(萬愚聖僧).
무극검성 여불해가 한 세대를 풍미할 때 오직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정파무림의 정신적 지주이자 소림의 대들보였던 사람.
정사지간(正邪之間)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강호를 주유하던 무극검성 여불해에게 유일하게 충고할 수 있었고, 때로는 그에게 호통을 지르면서도 우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대각승(大覺僧).
무공은 그저 절정고수 급이었을 뿐이나 깊고도 깊은 깨달음으로 중원의 추앙을 한 몸에 받았으며, 무극검성 여불해가 오직 하나뿐인 자신의 지기라 천하에 공인했던 사람이 바로 만우성승이었다.
무극검성 여불해가 신비롭게 사라진 후 절대자가 사라져 혼란에 빠져 들던 강호가 제자리를 찾고, 이후 무황성의 건립과 삼은삼패(三隱三覇)의 탄생을 이루며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노승의 혼신을 다한 노력이 토양을 만들어 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무극은 은거했다 하지만 완전히 은거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명리나 천하제일인의 지위에는 집착을 버렸으나, 자신의 무공이 전인(傳人)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지. 그렇지만 정사양도(正邪兩道)에 걸쳐 있는 그의 무공을 이어받을 기재가 세상에 없는 것 또한 그놈의 불행이었다. 은거 후 몇십 년에 걸쳐 무극은 세상을 떠돌며 전인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와중에 그 녀석에게 한 줄기 깨달음을 얻어 세상에 이름 떨친 이들 또한 꽤 되느니라.”
금비는 아무 말 없이 만우성승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무극은 결국 두 명의 기재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뛸 듯이 기뻐하던 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자신의 무예를 모두 이어받기에는 모자라나 각각 정사의 무공을 전수하기에는 아쉬움이 없다며 내게 자랑이 대단했었다. 그게 대략 백오십 년 전이로구나.”
금비가 조용히 물었다.
“그 두 사람은 누구입니까?”
“한 녀석은 이름을 사문화(査文華)라 하였고, 다른 녀석은 위지천군(尉遲天君)이라 하였지.”
“저, 정사양선(正邪兩仙)…….”
금비의 목소리에 경악이 물들었다.
정사양선(正邪兩仙)!
약 백여 년 전 무림을 둘로 나누어 서로 천하제일인을 경쟁하며, 무극검성 여불해 아래 오직 정사양선이 있을 뿐이라는 평을 들었던 양대고수.
마중선(魔中仙) 사문화(査文華).
지리멸렬해 있던 마교를 순식간에 다시 천하제일의 마도방파로 끌어올리며, 천하 마도를 규합해 새로운 중흥기를 열었던 천하제일마.
용화검선(龍華劍仙) 위지천군(尉遲天君).
마중선 사문화와 마교를 중심으로 한 마도무림에 맞서 정도무림을 이끌어 몇 차례의 격전을 치르면서도 정파무림을 굳건하게 지켜 냈고, 이후 무황성을 세워 백년대계의 기틀을 마련한 정파무림사상 최고의 풍운아.
두 사람 모두 무극검성 여불해 이후 최고의 고수들로 불리면서 죽은 지 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하는 신화적인 고수들이었다.
“무극은 두 놈을 따로따로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다. 제 무예의 모든 것을 두 놈에게 나누어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과연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두 녀석은 각기 정사를 대표하는 고수로 자라나 스승을 기쁘게 해 주었다. 둘은 스승이 무극검성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서로가 동문인지 모른 채 서로를 유일한 경쟁자로 여기며 자랐지만, 그 또한 무극이 원하는 바였다. 일부러 서로를 호적수로 키운 그의 뜻은, 너무나도 강해 올바른 적수 하나 없었던 자신의 비애를 제자들은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었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금비는 노승의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 두 녀석이 비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뚤어졌다라 하심은…….”
“아니, 비뚤어졌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둘의 숙명이었겠지……. 한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있을 수 없듯이, 둘은 서로 상대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는 금비에게, 만우성승의 말이 이어졌다.
“백여 년 전 어느 날, 계속되던 소모전에 지치고 세력끼리의 경쟁에 염증을 낸 두 녀석은 더 이상 심마를 참지 못하고 일대일로 결전을 벌였다. 삼 주야(三晝夜)에 걸친 둘의 결투는 결국 양패구상으로 끝나고 말았다지……. 무극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결투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만우성승의 눈이 허공을 좇았다.
아련한 옛날 이야기를 읊듯,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극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두 제자가 양패구상 하여 사라진 것을 어느 사부가 받아들일 수 있었겠느냐? 서로가 동문이라 알려 주었어야 했다며 그 당시 후회하던 무극의 모습은…… 허허, 이 늙은이의 수양으로도 안타깝기만 하더구나.”
너무나도 경악스러운 강호의 비사, 만우성승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백 년이 넘도록 감춰져 왔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금비는 입 안의 침이 마르고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