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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21화)
十章 천명(天命)(3)


“이후 두 녀석은 무림에서 사라졌다. 사문화가 남긴 무공들은 마교를 통해 이어지고 위지천군의 무공이 무황성에 계승되며 두 세력은 서로 힘겨루기를 계속해 오고 있으나, 그날 이후 두 녀석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강호에서 둘은 점점 잊혀 갔지.”
노승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후 무극은 더 이상 제자를 만들지 않았다. 그저 하릴없이 강호를 쏘다니며 이름 없는 늙은이로 행세하며 이놈 저놈 한 줄기씩 심득을 전하는 것이 그 녀석의 낙이었지. 나는 무극에게 그렇게 세상사에 연연하는 동안에는 절대 선계에 들 수 없을 것이라 타이르며 이제 그만 속세와의 인연을 끊어라 충고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지. 아마도, 두 제자들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었나 싶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제자들이 그렇게 사라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듯……. 어딘가에서 폐관수련이라도 하고 있을 제자들을 찾기 위해 세상을 헤맸을 것이다.”
이제 금비는 몸을 바르게 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노승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무극검성 여불해의 생전에 그의 말씀을 경청하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런 무극이 결국 제자들의 죽음을 인정하고 난 뒤인 이십여 년 전…… 그는 또다시 천하의 기재를 만났다. 죽기 전에 다시는 제자를 만들지 않겠다던 맹세를 한순간에 깨뜨려 버릴 정도로 천품을 타고난 기재였지. 그 아이의 이름은 유자성. 강호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나이 스물의 어린아이였다.”
오오, 유자성.
금비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떠돌았다.
부자 이 대(二代)에 걸친 무극검성 여불해와의 인연의 끈, 인연이란 어찌도 이리 질기고 기묘한 것인가?
그런 금비의 마음의 격동을,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가던 노승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못 본 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유운신검…… 유자성 말씀이십니까?”
“허허. 네놈이 아무리 부친의 원한에 연연하지 않는다 하나, 아비의 이름을 그렇게 남 부르듯 하면 안 되느니라.”
웃음 섞인 노승의 질책에 금비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감돌았다.
“부끄럽습니다. 부친께 부끄러울 뿐인 자식이라, 감히 선사님께 밝히지 못했습니다.”
“괜찮다. 네 녀석의 마음은 잘 알고 있느니라. 무극 역시 네 그런 마음가짐을 대견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 많이 안쓰러워했었지. 어쨌거나, 유자성은 무극이 죽기 전에 하늘의 도우심으로 내려 보낸 아이라 할 정도로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 무렵 무극은 이미 손에서는 검을 놓고 마음에서는 초식을 잊은 경지……. 네 아비 유자성은 무극에게 무공초식은 한 구절도 배우지 않았으나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이야말로 말년의 무극이 후대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경지, 그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시절 너른 강호에서 오직 네 아비뿐이었고 지금은 오직 너뿐이라고 여불해는 내게 말하곤 했었다. 어찌 이러한 천품이 부자에 걸쳐 내려질 수 있느냐며 웃곤 했었지.”
자식으로서 부친에 대한 이런 칭찬을 듣고서 기꺼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에 대한 칭찬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금비의 얼굴에는 온통 부친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유자성이 어느 날 비명에 죽고 말았다.”
노승의 이 한마디에, 금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착잡함으로 가득 물들었다.
그런 금비의 얼굴을 한숨 섞어 바라보며, 노승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네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 하나, 그것은 무극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심득을 전해 자신의 이름으로 그에게 그림자를 드리움 없이 마지막 제자를 키우려 했던 그의 노력은 또다시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지. 유자성의 비보를 듣고 달려간 무극은 난자당해 죽은 제자의 시신만 겨우 찾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 몇 년간, 혹시나 살아 있을지 모를 유자성의 한 점 혈육인 너를 찾아 천하를 헤맸다…….”
금비의 기억 속에 처음 여불해를 만나던 날이 떠올랐다.
눈 덮인 산속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죽어 가던 그의 앞에 어느새 나타나 자애롭게 안아 주며, 이름 한 자 묻지 않고 그저 웃고 있던 흰 수염의 노인.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그 자애로운 웃음에 담긴 정을 느끼며, 처음 본 자신에게 어찌 이리 애정을 쏟으시는가 궁금해 했던 금비였다.
“무극이 너에게 자신의 이름자도 알리지 않고 너를 제자로 받지도 않았다고 했지? 그것을 섭섭하게 생각지는 말거라. 무극은 이미 이름자 따위를 초월한 사람이고, 너는 그에게 제자라기보다는 자식이었느니라. 그리고…… 아마도 네 아비 유자성에게 대한 미안함으로 너에게 지난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연은 하늘 아래 신성한 것. 제 아버님께서 비명에 가셨다 하나 그것이 스승님의 잘못은 아닙니다. 어찌 그분께서 미안해 하셨을까요?”
금비의 진지한 물음에, 노승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네 아비의 시신에서 발견한 한 줄기 무공의 흔적 때문이었다.”
“어떤……?”
“……천무검강(天武劍剛).”
금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곧, 그 입에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 천무검강이라 하, 하시면…….”
“그렇다, 당사자의 실종과 함께 절전되었던 위지천군의 독문절기다.”
금비는 아무 말 못하고 만우성승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금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만우성승이 혀를 끌끌거렸다.
“알겠느냐? 그때 무극의 충격이 어떠했었는지……. 죽은 줄 알았던 제자에게만 전수했던 독문무공이, 오직 하나 남은 다른 제자의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네 아비는 무황성의 척사대(斥邪隊) 스물 남짓의 고수들에게 협공당해 죽었다. 그들 중 누구도 위지천군의 무공을 이은 자는 없었지. 아니, 당금 무황성주이며 위지천군의 자손인 위지강조차도 천무검강은 알지 못한다.”
만우성승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무극이 말하기를, 강호에 알려진 유운신검의 무공은 그 실체의 십 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그 까짓 무황성 고수들 따위는 백 명이 몰려와도 유자성의 목숨을 위협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런데 네 아비는 죽었고, 그 몸에서는 천무검강의 흔적이 나온 것이었다. 네 아비의 시신이 수없이 난자당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금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만우성승이 말했다.
“실로 행여나 무극의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한 소행인 듯했지. 그 후로 무극은 다시 천하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너와 함께 살면서도 자주 집을 비우고는 했었지?”
금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일 년의 반 정도는 혼자서 집을 지켰습니다.”
“그랬었겠지. 때때로 무극은 나를 찾아와 한탄하고는 했었느니라. 위지천군이 살아 있다면 어찌 사문화가 죽었겠느냐, 또한 그 둘이 살아 있으며 지금까지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다면 그 꾀하는 바가 얼마나 크겠느냐 한탄하며 유자성의 죽음을 애통해 했지. 만약 유자성이 십 년이나 이십 년만 더 살아서 성장해 주었다면 그들이 무슨 음모를 꾀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걱정 없이 눈을 감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무극은 그들이 진정 살아 있는 것인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 왜 그들이 죽음을 가장하고 숨어 버렸던 것인지, 왜 유자성을 음모 속에 죽인 것인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금비는 묵묵히 만우성승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제 담담한 얼굴색을 회복한 채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으나, 움켜쥔 주먹으로 손톱이 파고들어 가 조금씩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무극을 불쌍히 여기거라. 평생 동안 키운 제자들이 모두 음모의 주인공이 되고 상잔(相殘)하였으며, 스승의 뜻을 저버리고 단명하였다. 어찌 너에게 스승을 칭할 수 있었겠느냐.”
금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평생을 마음의 고통 속에 살다 간 무극검성 여불해를 위한 애도의 눈물이었다.
‘불쌍하신 분……. 그래서 그토록 내게 잘해 주셨습니까. 제 아버지의 죽음을 저에게 보답하시려 하셨던 것입니까. 그래서 저에게 그 모든 것을 숨기고 스승이란 부름 한번 듣지 못한 채 그저 가르치시기만 하셨던 것입니까. 그 넓은 깨달음과 마음의 수양 속에서도 저라는 존재가 아픔이었습니까…….’
스승에 대한 상념에 잠긴 금비에게 만우성승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와 그 생각 속에서 깨어나게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다.”
갑작스러운 만우성승의 말에, 금비가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것이…… 모두입니까? 더는 없습니까?”
“내가 아는 것은 그것이 모두다. 무극은 내게 그 이상 말한 것이 없느니라.”
“그러면…… 그러면 그분의 죽음은…….”
“모를 일이지, 나는 근래 몇 년간 무극을 만나지 못했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른다. 그 친구가 스스로 육신의 껍질을 벗어 놓을 때가 되어 스스로 선계로 돌아간 것인지, 누군가에게 위해를 당해 명줄이 다한 것인지……. 하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귀 기울이는 금비에게,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단호한 목소리로 만우성승이 말했다.
“만약에 그를 위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할 사람이 있다면…… 이 넓은 중원천하에 오직 사문화와 위지천군, 둘뿐이니라.”
금비의 얼굴 표정은 오직 담담하기만 해서 그 마음속에 무엇이 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만우성승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장담하건대, 무극은 너에게 이 짐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살아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너의 성취라면 그들의 사후 대에서는 오직 너만이 중원천하에 우뚝할 것, 이루지 못할 일에 몸을 바쳐 단명하는 것은 무극이 절대로 원하는 바가 아니니라. 또한, 만약에 그들이 살아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네 능력은 그들에게 도저히 비교될 수가 없느니라.”
조용하나 결의로 가득 찬 목소리로 금비가 말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이르다 했습니다. 이제야 스승께서 강호에 지은 죄가 무엇인지, 제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제가 스승과 부친의 복수를 하고자 매달리는 것은 아니나 사람으로서 고인들의 높으신 뜻을 잊은 척 세상에 숨어 살 수는 없는 것, 이제 천명을 어렴풋이 깨달았으니 그것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다할 뿐입니다.”
금비의 목소리는 평화로웠고, 부드러움 속 한 줄기 결의로 가득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맞서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 그 길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길인지 깨달았으며 또한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무리 위험하고 힘들더라도 금비는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 길을 가다 아무런 성과 없이 죽게 되더라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채 평생을 마치게 되더라도 그것은 금비에게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두 절대자.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바라보는 금비의 마음은 도리어 평안하기만 했다.



十一章 슬픈 운명(1)


무황성.
천하 정파무림의 우두머리이자 중원 최고의 힘이 집결한 곳.
무황성은 하남성 개봉에 위치하고 있다.
일찍이 하남성에는 숭산 소림사가 자리 잡고 있어 이곳을 대표하는 명문대파로 위명을 떨치고 있었으나 백여 년 전 용화검선 위지천군이 이곳에 무황성을 건립한 이후로 하남이라 하면 중원인 모두가 무황성을 떠올릴 뿐, 소림사는 무황성의 이름 뒤에 불리고 마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런 무황성의 심처.
무황성의 성주가 성내의 대소사를 관장하며 자신의 집무실 겸 서재로 사용하고 있는 용화소축(龍華小畜), 두 사람이 밤이 늦은 시간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면, 소공녀(小公女)께서는 무사히 돌아오셨습니까?”
탁자에 앉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물었다.
“그렇소. 말도 없이 사라졌던 녀석이 말도 없이 돌아오더군. 나이가 몇인데 그렇게 아비 속을 썩이는지……. 덕분에 온 성이 발칵 뒤집어졌었건만, 무얼 하고 왔는지 입을 다물고 말을 않소그려.”
반대편에 앉은 중년인이 씁쓰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허허. 젊을 때는 때로 자기 성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행동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어쨌거나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니겠습니까, 성주?”
무황성의 현 성주, 천무검주(天武劍主) 위지강(尉遲剛).
사십 대쯤의 나이에 각진 얼굴, 온몸에 강철 같은 기운을 두른, 냉정해 보이는 표정의 이 사나이가 당금 천하의 절반을 주무른다는 무황성의 주인이었다.
그 앞에 앉은 초로의 노인, 백발이 머리를 덮었으나 역시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전신에서 막강한 고수의 기도를 풍기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강호 삼패(三覇) 중의 하나인 검각(劍閣)의 각주인 예창응(藝蒼鷹).
기침 소리만으로도 천하를 들썩거린다는 무황성과 검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검각의 주인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검각주 예창응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래, 드디어 그 물건을 손에 넣으셨다고…….”
대답하는 위지강의 목소리 역시 진지한 기색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