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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22화)
十一章 슬픈 운명(2)


“그렇소. 이 물건을 얻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하마터면 성수곡의 딸아이와 제갈세가의 둘째 녀석까지 희생될 뻔했고, 그 외에도 본성의 고수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오.”
“그만한 가치가 과연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그러리라고 믿소. 적어도 내 조사가 정확하다면, 이 물건이 지금 갑자기 강호에 나타나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은 하늘이 나에게 마련해 준 안배라는 생각까지 드는구려. 사실…… 소진, 그 계집애가 사라졌을 때 나는 마교 놈들이 이 물건과 그 아이의 관계를 알고 궁여지책으로 납치해 간 줄로 알았소. 제 발로 되돌아온 걸 보면 그것은 지나친 걱정이었던 듯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탁자 위에 조그마한 옥갑(玉匣)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른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듯한 그 옥갑은 알아볼 수 없는 정교한 문양이 휘감겨 수놓여 있었는데 두 사람의 시선은 온통 그 옥갑에 쏠려 있었다.
예창응이 그 물건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래, 어찌 확인할 생각이시오?”
“이미 소진을 불렀소이다. 그 아이가 오자마자 확인해 보려 했으나, 아무래도 검각주님께 직접 결과를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때, 문 앞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공녀께서 오셨습니다.”
“음, 들게 해라.”
문이 열리며, 위지소진이 걸어 들어왔다.
조금은 수척해진 듯한 얼굴, 부친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 어려워하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부르셨어요, 아버님?”
“음, 그래. 몸은 괜찮으냐? 참, 검각주님께서 오셨다, 인사드리거라.”
“미처 인사가 늦었습니다. 건강하신가요, 각주님?”
“허허. 그사이에 집을 비웠었다고? 아버님께서 걱정이 대단하셨네. 그래, 어디를 유람하다 왔는고?”
웃으며 건네는 말, 그 속에 짐짓 행적을 묻는 예창응의 말에 위지소진은 그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위지강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리 잠시 앉겠느냐?”
위지소진의 얼굴에 조금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무황성주 위지강은 두 명의 처를 두었는데 위지소진과 위지천우는 첫 번째 부인인 이선옥(李善鈺)의 자식이고, 위지선우와 위지검우는 두 번째 부인인 주옥란(朱玉蘭)의 자식이었다.
첫 부인 이선옥이 후사가 늦는 동안 두 번째 부인이 먼저 아들 둘을 낳아 무황성의 적통을 잇게 되었고 그 후 위지소진과 위지천우가 태어났다.
부친을 닮아 야심만만하고 천부의 재능을 뽐내는 위지선우, 위지검우와는 달리, 위지소진은 여아였기 때문에, 그리고 위지천우는 너무 어린 데다 형들에 비해 더딘 성장으로 부친에게서 별다른 애정을 받지 못했다. 특히나 위지소진은 금비의 부친인 유자성의 죽음 이후 부친에 대한 원망이 더해져서 위지강의 사이가 더욱 소원해져 있었다.
또한 형제 간의 의리 또한 소원하기에 이번 그녀의 실종 때에도 친동생인 위지천우만이 그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난리를 치며 찾아 헤맸을 뿐, 위지신우나 위지검우는 그녀를 찾아보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몇 년 동안 제대로 인사 없이 살아왔건만 오늘 자신을 일부러 부른 것도 의아한 판국인데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며 옆에 앉아라 하는 아버지의 말에 그녀는 어색함을 느끼면서 자리에 앉았다.
‘하긴, 말도 없이 며칠씩이나 가출해 난리 나게 했으니 야단을 치실 법하다. 그래도 어찌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나무라시려는 것일까?’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의자에 앉는 위지소진의 눈에 탁자 위에 놓인 옥갑이 들어왔다.
한순간, 그녀의 눈앞에 새파란 광채와 새빨간 광채가 떠올랐다.
옥갑에서 뻗어 오르는 두 광채는 서로 위로 솟아오르려 다투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파란 광채가 붉은 광채에 짓눌려 사라지는 듯하더니 진홍의 빛이 그녀의 망막을 파고들 듯이 쏘아져 들어왔다.
“아…….”
한마디 신음과 함께, 위지소진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곧 그 광채는 씻은 듯이 사라졌고 위지소진은 자신이 어떤 환영 따위를 본 듯한 착각에 빠졌다.
‘대체 그 빛은 무엇이었지? 새빨간 빛줄기가 눈앞을 가득 채우더니 마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듯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그런 자신을, 앞에 앉은 두 사람이 아닌 척하면서도 진지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래, 며칠 강호에 나가 보니 어떠했느냐? 좋은 구경거리라도 있었느냐?”
위지강이 한가로운 듯 물었지만, 어느새 그 말투에는 그저 형식적으로 묻는 권태로움이 묻어 있었다.
잠시 동안 쓸데없는 물음 몇 가지를 던지던 위지강은 그녀에게 그만 물러가 쉬라고 말한 후 한마디를 보탰다.
“한 가지,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성을 떠나는 일은 절대 안 된다. 만일 내 명령을 어기고 이번처럼 네 마음대로 사라졌다간 너뿐만 아니라 네 동생과 어미까지도 함께 경을 칠 줄 알거라.”
누가 들어도 이것은 분명한 협박. 위지소진은 눈물이 핑 도는 듯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시나요. 자식에게 훈계하시는 것은 부친으로서 당연한 일이나 이것은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 같군요. 어찌 딸자식에게 이리도 냉정하십니까.’
하지만 위지소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려 애쓰면서 목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그녀는 다시 한 번 망막을 가득 채우는 새빨간 빛 무리를 느끼며 몸을 휘청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마치 보지 못한 듯 차를 마시는 위지강. 오히려 검각주 예창응이 괜찮으냐고 한마디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조금 피곤한 듯하네요. 그럼 소녀는 이만…….”
인사와 함께 위지소진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짓을 교환했다.
“각주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소? 과연 제 딸자식이 이 물건의 주인인 듯하오?”
“처음 보는 순간의 떨림이나 눈에 새겨진 한 가닥 혈선(血腺)……. 거의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확인해 보시겠소?”
“그럽시다. 허허. 내가 백 년 넘게 강호에 떠돌던 전설을 확인하는 사람이 되다니…… 왠지 감개무량하구려.”
위지강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옥갑의 뚜껑을 잡았다.
천천히 뚜껑을 여는 위지강의 손. 약간 떨리는 듯한 그 손길 아래, 옥갑의 안이 드러나고 있었다.
옥갑 안에 든 것은 자그마한 옥상(玉像)이었다.
희한하게도 그 옥상은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돌리고 선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었고, 둘의 등은 서로 맞붙어 있었다.
한편에는 손에 부채를 든 채 웃고 있는 신선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다른 편에는 여섯 개의 손에 검과 도를 쥔 악마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어떤 재질의 옥을 썼는지, 하나의 옥을 깎아 만든 조각상이건만 신선의 모습은 파란색을 띠고 있었고 악마의 모습은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소면활선(笑面活仙)과 육비아수라(六臂阿修羅)……. 틀림없구려.”
검각주 예창응의 감탄하는 듯한 목소리. 위지강은 아무 말 없이 흡족한 듯 웃었다.
예창응이 그런 위지강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 방금 영애(令愛)의 모습으로 보나 지금 이 조각상의 색깔로 보나…… 따님은 육비아수라와 인연이 닿은 듯한데, 괜찮으시오?”
옥갑 속의 양면조각상. 붉은 쪽의 악마상이 새빨간 광채를 사방으로 흩뿌리면서 요사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는 데 반해, 푸른 쪽의 신선상은 그 빛을 안으로 감추고 탁하게 잠겨 들어 있었다.
위지강의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그 아이의 운명인 것. 어느 쪽에 선택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 않소? 지금으로써는 그 아이의 체질이 우리의 기대대로 이 물건에 적합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 게다가…….”
위지강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사실 우리의 거사를 위해서는 그 아이가 육비아수라와 이어지는 것이 최상의 선택.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지 않소?”
“하나, 성주의 친자식이 아니오? 앞으로 그 아이의 운명이 매우 가혹할 것이니…….”
안쓰러움이 섞인 예창응의 말에, 위지강이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본시 처야 의복과 같은 것이고 자식은 수족의 중요함 정도인 것, 거기다 딸자식이라면야 대사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일이오. 예 각주 또한 일을 진행함에 잔정을 버리고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오. 그런 여린 마음은…….”
냉정하다 못해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위지강의 말에 훨씬 나이 든 예창응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무, 물론이오. 나 또한 거사를 위해서라면 자식이라도 얼마든지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으니, 성주께서는 걱정 마시오.”
의심 섞인 듯한 시선으로 예창응을 바라보던 위지강이 웃음을 띠며 다시 말했다.
“하하. 내 말이 조금 지나쳤나 보오. 내 말은 그저 우리가 언제나 진지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니 예 각주께서는 마음쓰지 마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들께도 이 일을 알려 드리고 뒷일에 대해 의논을 드려야 할 것인데…….”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하리다. 어차피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 않소? 영애께서 육비아수라의 힘을 완전히 자각하려면 일이 년은 걸려야 할 것. 그때야 비로소 본격적인 일에 착수할 것 아니겠소?”
“그건 그렇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니 미리 준비하고 세심히 파악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소. 그러니 이제부터…….”
두 사람은 밤이 늦도록 서로 머리를 맞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그들의 곁에서 새빨간 광채에 휩싸인 아수라상이 끊임없이 요기를 흘려 내며 웃고 있었고, 신선상은 그 요기에 짓눌려 힘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十二章 나는 너의 적이다(1)


낙양(落陽).
수많은 왕조의 도읍이었으며, 지금도 그 번창하는 문물을 자랑하는 성도(省都).
금비는 지금 낙양에 있었다.
숭산에서 이야기를 나눈 후, 작별을 고하는 그에게 만우성승이 물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있느냐?”
“특별히 정한 곳은 없습니다. 이제 가야 할 길을 알았으니 방향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연이 이끄는 대로 따르겠지만 우선은 무황성 쪽으로 가 볼까 합니다.”
“그러지 말게나.”
“스님의 말씀은…….”
“지금 너의 성취는 죽을 당시의 네 아버님에 비해서도 한참 떨어지고, 사부에 비한다면 어른과 어린아이 정도. 그 정도의 성취로 무황성에 발을 들였다간 하릴없이 죽음을 맞기 십상이지.”
“스님의 말씀이 과연 옳습니다. 혹시나 스님께서 제게 일러 줄 곳이 있으신가요?”
“지금 너에게 급선무는 무공수위를 높여 상대와 대적할 수 있는 실력을 쌓는 것. 애초에 무극은 네가 그의 인연과 닿지 않고 살아갈 것을 생각해 너에게 아무런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겠지만 네가 나를 통해 어려운 길을 가게 될 때를 대비한 안배 또한 있었느니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그저 그놈은 이 한 마디만을 남겼다. 유람(遊覽)이란 한 마디였지.”
“유람……이란 말씀입니까?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가?”
“한 곳, 떠오르는 장소가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 그놈이 네 기초를 그렇게 공들여 닦아 놓고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강호에 나가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안배가 없었을까. 그래, 그것이 무엇인가?”
“그저 제 짐작이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나, 일단 낙양으로 가 볼까 합니다.”
“낙양이라……?”
며칠 후 황혼이 질 무렵에, 금비는 낙양성에 들어서고 있었다.
지금 그는 제 발로 걷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마리 당나귀의 등 위에 앉아 있었는데, 안장도 놓지 않은 채 그저 당나귀의 등 위에 책상다리를 한 채 턱 걸터앉아 있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걸쳤으나 그것은 당나귀의 목에 걸쳐 있을 뿐, 금비는 무릎 위에 천으로 싼 옥루고검을 얹고서 두 손을 팔짱 낀 채 한가로이 나귀의 등에 앉아 있었다.
원래 당나귀라는 짐승은 작은 몸집에도 힘이 좋고 지구력이 있어 물건이나 달구지를 끌기에는 적합하나, 그 성질이 제법 괴팍해 사람을 등에 얹고 다니는 일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짐승일 뿐 아니라 타기에도 매우 불편했다.
말이라는 놈은 온순해서 사람을 태우는 일을 하면 곧 그 일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사람과 호흡을 맞추며 함께 적응하나, 당나귀라는 놈은 영리하긴 하지만 고집이 세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등에 누가 올라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이다.
하나 지금 금비를 등에 얹은 당나귀는 제법 의젓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금비는 그 등 위에 올라앉아 흔들리면서도 태연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 금비의 모습은 고도(古都) 낙양 사람들에게 꽤나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어, 지금 당나귀의 등에 올라탄 채 거리를 가로지르는 그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마음쓰지 않는 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고 정좌한 자세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소림사에서 내려와 낙양행을 결정한 금비는 자신이 타고 다닐 짐승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