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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23화)
十二章 나는 너의 적이다(2)


너른 중원 천하를 두발로만 걸어다니기에는 벅찬 것이 사실이었기에 만우성승과 작별한 후 숭산 여기저기를 뒤지며 자신의 유일한 돈벌이 기술인 약초 캐기를 시작했다.
운이 좋아 예전 단청하에게 팔았던 것과 비슷한 수령의 산삼을 캘 수 있었던 그는 제일 먼저 그것을 들고 숭산 인근의 마시장(馬市場)를 찾았다.
마시장 인근의 허름한 약포를 찾은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늙은 주인에게 산삼을 내밀며 최대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자 오십 냥은 되겠지요?”
세상 물정을 제대로 모르는 그로서는 오직 단청하의 감정을 굳게 믿었고, 말을 사기 위해서는 한 푼이라도 더 필요한 처지였기에 꼭 제값을 받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처음부터 단호하게 엄포(?)를 놓은 것이었다.
그런 금비의 얼굴과 산삼을 번갈아 바라보던 약포의 노주인이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이런 것을 캤는가?”
“숭산 골짜기에서 운 좋게 캘 수 있었습니다.”
애초에 흥정이라는 것과 도저히 맞을 수가 없는 것이 금비의 성정이라,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단호함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었다.
“흐흠, 숭산에 아직까지 이런 물건이 남아 있었나. 인근 약초가들이 오래 전에 쓸어 버린 줄 알았는데. 그래, 얼마를 달라고?”
“은자 오십 냥 정도…… 안 되겠습니까?”
한창 강호에 그 이름을 떨쳐 울리고 있는 백의괴동이 이 허름한 약포의 늙은 주인에게 쩔쩔매고 있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아무 대답 없이 약초를 살피는 주인을 바라보는 금비의 이마에는 땀방울마저 솟는 듯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탐색하는 두 사람. 마침내 금비의 입에서 패배의 선언이 흘러나왔다.
“어찌, 어렵습니까? 그럼 사십 냥 정도는…….”
금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이제 포기한 듯했다.
그런 그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늙은 주인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허. 무에 그리 힘들어 하나? 좋은 물건을 제값에 사는 것은 사십 년 동안 장사하면서 지켜 온 내 철칙……. 은자 육십 냥 주지.”
“저, 정말이십니까?”
목소리에 희색이 섞였다.
성정이 탈속한 것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닌 일, 애초에 흥정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주는 대로 받는 것이 금비의 성정에 맞는 일이거늘 그것을 꼭 제값을 받겠다고 흥정하려 했으니 그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약포 주인에게 은자를 받아 들고, 이후에도 좋은 약초를 캐거들랑 꼭 자기에게 팔러 오라는 그 말에 그러마고 대답한 후 나서는 금비의 마음에는 자신도 제법 흥정이라는 것을 잘하는가보다고 자부심마저 깔린 듯했다.
이후 금비는 예정대로 마시장을 찾았다.
여기저기 구경하며 말들을 고르는 금비의 눈에, 한쪽에 매어진 당나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금비가 그 당나귀에게 관심을 보이며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자 그를 안내하던 마주(馬主)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공자, 말을 사시겠다는 분이 당나귀 놈을 보아 무얼 하시려우? 게다가 그놈은 성질이 더러워서 달구지도 못 끄는 놈이라오. 등에 뭐라도 얹어 놓을라치면 어찌나 투레질을 하면서 난리를 치는지……. 이놈 주인인 영감이 팔아 달라고 하도 하소연하기에 매어 놓기는 했지만, 사실 남에게 팔기 힘든 놈이라오.”
그런 마주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 금비는 당나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금비의 시선을 받은 당나귀 놈은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고서 그의 시선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잠시 후, 금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놈을 사지요.”
“어라. 공자님, 내 말을 못 들으셨소? 말을 사신다니 타고 다닐 놈이 필요한 듯한데 애초에 당나귀란 놈은 덩치가 작아 타기가 불편하고 천성이 고집 세서 길들이기도 힘들다오. 게다가 이 녀석처럼 성질 더러운 놈은 달구지를 끌게 하기도 힘들어요. 이런 놈을 왜 사시겠다는 거요?”
“그저 마음에 들 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굳이 당나귀를 사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금비를 마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모르겠수. 나야 그놈 팔면 좋은 일이지. 하지만 나중에 속았다고 물러 달라면 안 되오? 나는 애초에 다 이야기해 드렸수다?”
“알겠습니다. 물러 달라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흠…… 은자 스무 냥만 주슈.”
“여기 있습니다.”
셈을 치른 금비는 당나귀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금비의 손길을 받는 당나귀의 모습은 마치 순종의 종마가 주인의 손길을 받는 듯 당당하게 보였다.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주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마치 보마(寶馬)라도 대하는 듯하구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당나귀 한 마리를 사고 뭐가 저리 좋은 걸까?’
금비가 당나귀의 엉덩이를 툭 치더니 떠오르듯 몸을 날려 그 등위에 올라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장이라도 온몸을 흔들어 저 문약해 보이는 서생을 멀리 날려 버릴 줄 알았건만, 당나귀는 온순한 몸짓으로 금비를 등에 얹고 천천히 울타리를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더욱 믿어지지 않는 것은 당나귀를 탄 금비의 모습이다.
안장도 걸치지 않고 양다리로 말 허리를 죄는 일도 없이, 땅바닥에 앉듯이 당나귀 등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당나귀의 걸음에 따라 그 등 위에서 흔들거리면서 저 괴이한 사람과 동물은 천천히 마주의 눈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 저렇게 말을 타는 방법도 있나? 게다가,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저 녀석은 어찌 저렇게 온순한 거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당나귀의 등에 올라탄 채 마시장을 빠져나가면서 금비는 혼잣말하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녀석이 얼마나 말로서 대접받고 싶었는지 알 듯하다. 처음 네 눈을 보았을 때부터 네놈이 타고난 운명에 고개 숙이지 않고 되고 싶어 하는 것을 이루려 마음먹은 것을 알았지. 비록 당나귀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태어났으나 한 마리 말의 몫을 하고 싶은 너에게 사람들은 오직 나귀로서의 몫을 하라고 강요했으니 네 상심이 얼마나 컸겠느냐. 그래도 아직까지 한 줄기 뜻을 꺾지 않았으니 그 일심(一心)이 정말로 갸륵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는 금비의 모습. 말 등 위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듯한 모습으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비감이 어리는 듯했다.
“실로 내 처지도 너와 마찬가지다. 이제부터 내가 가야 할 길이 스스로 아무리 헤아려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지 않으나 이 마음을 꺾을 생각도 없다. 스스로 천명을 삼았다면 오직 그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일이지 그 성패를 미리 헤아려 희비 속에 오락가락할 수는 없는 일. 한낱 미물인 너에게서 오로지 하는 곧은 마음을 배웠으니 또한 감사할 일이다.”
말과 함께 금비는 손을 휘둘러 나귀의 엉덩이를 후려치며 웃었다.
“이랴, 앞으로 친해 보자꾸나. 너나 나나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건만 이루기 힘든 일을 천명으로 삼았으니 이 인연 또한 꽤나 내 마음에 흡족하다. 가만있자…… 그래, 너의 이름을 독로(獨路)라 지어 주랴? 이름이 마음에 들면 그렇다고 하려무나.”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나귀가 짧은 울음을 울며 투레질을 했다.
히히힝―
“그래,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하하하.”
신려(神驢) 독로(獨路).
주인의 말을 알아듣고, 말하지 않는 마음까지 헤아렸다던 금비와 그의 애려(愛驢)의 만남의 순간이었다.

***

달빛을 벗 삼아, 금비와 독로는 길을 재촉했다.
낙양의 성시(城市)를 지나 논둑 길을 거쳐, 이제 둘은 황량한 벌판을 지나가고 있었다.
휘영청 달이 뜬 밤, 자정을 넘어가는 시간에도 아랑곳 않고 며칠을 재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독로는 전혀 피곤한 기색을 비치지 않으며 나귀 특유의 끈질김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또한 금비 역시 처음 길을 나설 때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독로의 등 위에 걸터앉은 채 그의 걸음에 따라 흔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한순간 금비가 손을 뻗더니 길가에 우거진 풀잎 하나를 꺾어 들었다.
금비는 풀잎을 입가로 가져가며 나귀에게 말을 건넸다.
“이때까지 내 발로 걸어다니다가 이제 네 등에 얹혀 길을 다니니 한가롭기 짝이 없구나.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는 주인이 미우냐? 하하. 내 너를 위해 한 곡조 띄울 테니 이걸로 화를 좀 풀거라.”
필리리∼
금비의 입술에서, 떨리는 풀잎과 함께 부드러운 음률이 흘렀다.
만월 아래에서 황야 가운데 홀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는 나귀와 그 위에 걸터앉아 풀피리를 불고 있는 청의의 청년. 둘의 모습은 마치 선화(仙畵) 속에서 빠져나온 인마(人馬)인 듯했다.
그렇게 나귀는 주인의 음률에 걸음을 맞추며 한 줄기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독로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아직까지도 눈을 감은 채 풀피리를 불고 있던 금비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달빛에 취한 듯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으음, 왜 걸음을 멈추느냐? 이 음률이 마음에 들지 않으냐? 어디 다른 곡조로 불어 주랴? 오냐, 이 곡조는 어떤지 보자꾸나.”
히힝!
독로가 머리를 흔들며 투레질을 했다.
그제야 금비는 감은 눈을 천천히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걸어가던 길 위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와 함께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검은 옷에 검은 피풍(皮風), 뒷짐 진 손에 새카만 대도(大刀)를 들고 등을 보인채 하늘을 바라보며 오만한 모습으로 선 그 청년은 온몸에서 산악(山岳) 같은 기세를 흘리며 금비의 길을 막고 있었다.
아니, 그 자체로 마치 산악인 듯 굳건한 기도. 한 마디 말도 없이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보는 금비의 눈에 언뜻 반가움이 떠올랐다.
금비가 무어라 입을 열어 말하려는 순간, 청년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질긴 목숨이군. 아직 살아 있었느냐?”
여전히 바람처럼 부드러운 모습으로, 질식할 듯한 청년의 기세를 거스름 없이 받으면서 금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랜만이다, 천악. 그동안 잘 지냈느냐?”
청년이 천천히 몸을 돌리며 금비를 바라보았다.
화강암처럼 굳건해 보이는 얼굴과 이글거리는 눈빛. 마교의 후계자이자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소마제(小魔帝) 조천악(趙天岳)이 금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금비가 내려선 후 독로는 황야에 난 잡초를 뜯으며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고 조천악이 신광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중에 금비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구나. 외조부님의 진전을 모두 이었느냐?”
대답 없이 금비를 바라보고만 있는 조천악. 금비 역시 그 말을 끝으로 그저 웃으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
잠시 후, 조천악이 입을 열었다.
“왜 기어 내려온 것이냐?”
싸늘한 말투, 호의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이 냉기만이 담긴 목소리로 조천악이 물었다.
금비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이리 차가운 목소리를 상상하지 않았던 모양. 다시 웃음을 머금고 무어라 대답하려는 그에게 조천악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속에 처박혀서 죽은 듯이 목숨을 연명할 일이지, 왜 기어 내려와서 풍파를 일으키고 다니는 것이냐?”
“네 말은 조금 듣기 거북하구나. 그래도 나는 너의 외사촌 아니냐? 내게 이리 막말을 하는 것은 내 어머님을 능멸하는 것과도 같다. 하하, 사실 나는 그동안 네 소식이 많이 궁금했다.”
웃음과 함께 부드럽게 대꾸하는 금비를 바라보는 조천악의 눈빛에는 어딘지 모르게 조소와 능멸마저 섞여 있었다.
잠시 금비를 바라보던 조천악의 입에서 다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산속에 처박혀 살든 세상에 나와서 살든 그것은 네 자유라고 치자. 무슨 배짱으로 본교의 행사를 방해하고 다니는 것이냐?”
조천악의 말에, 그제야 금비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호라, 너는 내가 응초형과 두향응을 죽인 일 때문에 화가 난 것이로구나? 그것은 네가 이해해야 할 일. 도 백부께서 위지소진을 미끼로 천우를 납치하려 한 것이 네 생각이었다고 말해 주더구나. 그러나 그런 짓은 당당한 마교의 소교주로서 너무 졸렬한 처사다. 게다가 그들은 나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아니더냐? 그래서 내가 본의 아니게 끼어들었다만…… 그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면 내 얼굴을 보아 넘어가 줄 수 없겠느냐?”
조천악은 아무 말 없이 금비의 말을 듣고 있었다.
금비의 말이 끝나자 잠시 그의 얼굴을 보고 있던 조천악이 피식 웃으며 손안의 대도를 천천히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