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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24화)
十二章 나는 너의 적이다(3)


스르릉―
칙칙한 도기와 함께 새카만 도신을 한 칼이 뽑혀 나오며, 칼에 비친 달빛 위에 살기를 떠올린 조천악의 얼굴을 비췄다.
“아무래도 네놈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하군. 내가 지금 너의 변명을 듣자고 여기까지 온 줄 아느냐?”
칼을 든 한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온몸에서 조금씩 살기를 피워 올리는 조천악을 바라보며 금비는 웃었다.
한 발, 조천악이 금비를 향해 다가들었다.
그 순간 온몸을 집어삼켜 버릴 듯 강렬한 마기가 덮쳐 왔다. 조천악이 비웃는 표정으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네 얼굴을 봐서라……. 별것 아닌 이류들을 몇 놈 베고 나더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오냐, 그 잘난 네 얼굴을 두 조각 내 주마.”
말과 함께 허공을 가르며 금비의 얼굴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드는 흑도(黑刀). 조천악의 애병이자 마도삼대기병(魔道三大奇兵) 중 하나라는 참룡흑도(斬龍黑刀)가 신광을 뿌렸다.
금비의 얼굴에 당황이 어리며 그의 몸이 흔들리듯이 움직였다.
금비는 황급히 공력을 끌어 모아 소요칠결 중 유요결을 운용했다. 두향응과의 결전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던 유요결이 한결 능숙해진 모습으로 조천악의 공세를 피해 냈다.
흔들리는 버들잎처럼 조천악의 도세(刀勢)를 타 넘은 금비가 두어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천악, 이러지 말아라. 네 마음이 상했다면 내가 사과하마.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네 친척이 아니냐? 허락 없이 네 수하들을 벤 것은 내 잘못이라 치더라도 나 역시 현 마교주의 외손자. 그것 때문에 내가 죽을 일은 아니지 않느냐?”
자신의 군마도법(群魔刀法)의 공세를 수월하게 피해 내는 금비를 바라보며 조천악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유운신검의 무공이냐?”
“하하. 그렇다, 이것은 내 아버님께서 남기신 무예다. 그건 그렇고, 네 녀석은 이모부의 외호를 너무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니냐?”
“큭큭. 자식이라는 놈이 부친의 복수를 무시하고 이름까지 바꾸며 강호를 떠도는 마당에 나한테 무례를 논하는 건가? 그래, 그 잘난 유자성의 무공으로 이것까지 받아 내 봐라!”
쑤아앙!
참룡흑도가 아래에서 위로 세차게 그어 올려지더니 한 줄기 시커먼 도기가 금비의 몸을 두 조각 낼 듯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드는 조천악의 도세. 금비가 안색을 일변하며 두 걸음 옆으로 움직여 도세를 피해 냈다.
그 순간 조천악의 칼이 올려치던 기세 그대로 종(縱)으로 꺾이면서 금비의 몸 전체를 도기 속에 가두었다.
순식간에 십여 개로 늘어난 도기. 시커먼 흑광 속에 갇힌 금비의 몸을 수십 조각 낼 듯, 조천악의 참룡흑도가 맹렬히 날아들었다.
“군마참룡(群魔斬龍)!”
횡으로 올려치던 기세를 그대로 종으로 꺾어 다시 수십 개의 도기를 만들어 내며 상대를 격살하는 이 초식은 사마충양이 자랑하는 군마도법 중의 절초, 금비의 몸은 당장 수십 조각 날 듯 보였다.
한편, 금비는 당황스러움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조천악을 만난 것도 그렇거니와, 당연히 조해연과 마찬가지로 그저 자신을 보러 온 줄만 알았고 그 또한 조천악을 만나 반가움에 가득했건만 그는 지금 금비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기세로 살수를 펼치고 있지 않은가?
처음 공격이야 불같은 조천악의 성격으로 순간적인 격정에 칼을 휘둘렀던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이 다혈질의 외사촌은 자신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마음인 듯하다.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순간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조천악의 도기에 갇힌 채 얼굴에 당황함을 떠올리던 금비는 어느새 담담한 신색을 회복하고 공력을 운용해 몸을 피했다.
“담영결(潭影訣).”
스르르…….
금비의 몸이 그림자처럼 흐려지더니, 마치 연못 위에 비친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리듯 흔들렸다.
조천악의 군마참룡의 도세 속에서, 금비의 몸은 그렇게 흐릿한 잔영을 남기며 수십 조각으로 쪼개지는 듯하다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도세가 사라진 후 어느새 금비의 몸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일 장 정도 이동한 곳에 있었다.
처음으로 조천악의 얼굴에 의외라는 빛이 어렸다.
담담하게 웃고 있는 금비의 얼굴을 바라보던 조천악이 자신의 흑도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과연 한 수가 있구나. 그 재주를 믿고 설쳐 댔단 말이지? 좋다, 오늘 네가 가진 밑천을 모두 털어 내 봐라.”
“천악…….”
지금까지 웃고 있던 금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진지한 표정이 어렸다.
옥루고검을 싸고 있던 헝겊을 천천히 풀어내며 금비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굳이 나와 싸우고 싶다면 도망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하나만 물어보자.”
“말해라.”
천천히 뽑혀지는 옥루고검의 새하얀 칼날이 달빛을 받아 더욱 희게 빛났다.
“대체 왜 이렇게 내게 적의를 가지는 것이냐? 내가 네 행사를 방해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인연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너무 심하다. 꼭 너와 내가 생사결(生死決)을 치러야 하겠느냐?”
조천악의 이글거리는 듯한 눈빛이 금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금비에게 말했다.
“너…… 아무것도 모르고 있냐?”
“아무것도라……. 대체 무엇을 알아야 하는 거냐? 처음에도 막연히 궁금해 했던 일이지만, 혹시 그들을 미끼로 무엇인가 위지강에게 요구하려 했던 것이냐?”
조천악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런 제기랄…….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네 사적인 정분 때문에 마교의 행사를 망쳐 놓았단 말이지? 네놈이 어렸을 때부터 그년 위지소진과 정분이 났었다는 것은 내 알고 있었지만…….”
“말을 조심해라, 천악.”
금비의 말에, 조천악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큭큭. 제 아비의 외호를 마음대로 부르는 것에는 덤덤하더니, 제 정부(情婦)를 험담하니 정색을 하신다? 쓰레기 같은 녀석…….”
“네 녀석이야 어릴 때부터 한 번도 내 아버님을 곱게 불러 본 적이 없었지 않느냐. 그 꼴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니 뭐라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니 말을 삼가는 게 옳은 일일 것이다.”
“크크큭. 아무래도 좋다. 오늘 네놈을 베고 나면 후일 그 계집도 베어 이 참룡흑도에 둘의 피를 나란히 묻혀 주마. 어쨌거나 네놈이 무얼 잘못했는지 정도는 알려 주고 죽여야 하겠지. 네놈은 선마옥상(仙魔玉像)을 알고 있느냐?”
조천악의 말에, 금비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어렸다.
“선마옥상…… 그 전설 속 반선반마상(半仙半魔像)을 말하는 것이냐? 세상을 구할 신인(神人)을 만들 수도, 세상을 파멸시킬 마인(魔人)을 만들 수도 있다는…….”
“오냐,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전설 속에 떠도는 물건이 아니냐? 수백 년 동안 그저 강호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꾼들의 말속에 있는 물건일 뿐, 그것이 세상에 나타났단 말이냐?”
“바로 그렇다. 게다가…… 그것이 위지강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지.”
금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런 금비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채, 조천악은 말을 계속했다.
“선마옥상은 반년 전 호남(湖南)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그것이 나타난 후, 무황성과 마교는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피 튀기는 암투를 계속했지. 본교에서는 그것을 무황성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빼앗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지만, 결국 얼마 전 위지강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정인군자의 탈을 쓰고 있으나 야심 가득한 승냥이 같은 그놈이 그것으로 무슨 일을 꾸밀지는 아무도 모를 일. 우리가 마지막으로 짜낸 계책을 네놈이 박살 내 버린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조천악의 말이 끝난 후에도, 금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말을 끊고 있던 조천악이 말을 이었다.
“물론 선마옥상의 힘을 발동시키려면 그에 걸맞은 극양(極陽)이나 극음(極陰)의 신체를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옥상의 전설 속 내용이고, 아직까지 무림에 그런 신체를 가진 사람이 없다지만 그 말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런 화근 가득한 물건은 절대로 위지강 같은 인간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네놈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의 마지막 한 수를 망쳐 놓았다. 이제 네가 죽어야 할 이유를 알았느냐?”
살기 가득한 목소리. 그러나 금비는 더 이상 조천악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떠도는 것은 선마옥상에 얽힌 이야기 중 방금 조천악이 말한 것과 같이, 그 힘을 깨우려면 극양이나 극음의 신체를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어린 시절 위지소진의 몸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부친의 모습이었다.

‘흐음. 내 우리 비아의 타고난 신체가 무언가 남과 달라 온갖 서적을 뒤지고 내로라하는 의원을 초빙해 알아본 결과 극한의 양강(陽剛)의 기운이 안으로 갈무리되어 오히려 평범하게 보인다는 잠양극성체(潛陽極性體)였다. 그런데 오늘 소진의 몸을 살피니 또한 극음의 기운이 갈무리되어 오히려 평범하니 잠양극성체와 짝을 이룰 만한 잠음극성체(潛陰極性體)로구나. 이 신체는 살아가는 데 해가 없고 보아 알기도 힘들뿐더러, 무공을 익힐 때 남보다 몇 배 뛰어난 성취를 이루게 해 주니 하늘에 고마워하면 그만일 일. 하나 아무에게도 자신의 신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거라. 하하, 극양 또는 극음의 사공(邪功)을 익히는 자라면 너희의 피는 세상에 다시없는 보혈(寶血)이 될 것이니…….’

금비의 마음속에 떠도는 한 조각 불길한 예감. 그는 애써 마음을 수습하려 애쓰며 자신을 책망했다.
‘금비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행여 소진이 그것에 연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니……. 무황성주 위지강은 그녀의 친아버지가 아니냐? 그는 소진이 잠음극성체라는 것을 모를뿐더러,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어찌 친딸을 그런 일에 이용하겠느냐? 신마옥상의 힘을 이끌어 낸 사람은 그 힘이 신력이든 마력이든 결국에는 그 힘에 삼켜져 인간의 심성을 잃고 거기에 휘둘리는 꼭두각시로 변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전설의 내용……. 하하, 내가 그녀의 정인이 맞긴 한가 보구나. 이렇듯 그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마음에 가득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 쉰 후 금비는 안색을 고치며 조천악을 바라보았다.
이미 조천악은 참룡흑도를 세워 들고 금비에게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었다.
한 발자국씩 다가설 때마다 전신을 죄어 오는 강렬한 기세. 온몸 가득 끌어올린 천마심공으로 사방에 칙칙한 마기를 흩뿌리며 조천악은 금비에게 이미 그 기세만으로 강렬한 공격을 펼치며 다가서고 있었다.
옥루고검을 가슴어림에 세우며 금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물어보아도 되겠느냐?”
“……말해 보아라.”
“너는 선마옥상을 손에 넣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느냐?”
순간, 조천악이 다가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금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싸늘히 흘러나오는 목소리.
“맞혀 보아라. 내가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 것 같으냐?”
금비는 조용한 눈빛으로 조천악을 바라보았다.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투명한 금비의 눈빛에 조천악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떨었다.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여러 번 저 눈빛을 겪었던가?
사람의 마음 깊은 구석까지 발가벗겨 바라보는 듯한 금비의 맑고 투명한 시선에 마주 설 때면 언제나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 둔 비밀과 야망까지 온통 들켜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맑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다가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자신에게 다가설 때면 조천악은 한결같은 살의로 몸을 떨곤 했다.
지금 역시 어린 시절과 다름이 없었다.
지금 금비의 조용한 눈빛에 마주선 조천악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원대한 야망과 남에게 들키지 않도록 마음 깊이 숨겨 둔 추악함이 모두 금비의 눈에 낱낱이 밝혀지는 느낌에 주체 못 할 살의를 느꼈다.
“그렇구나. 너는…….”
금비가 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 조천악의 신형이 허공을 날아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우우우우웅!
참룡흑도가 암천 속에서 몸을 떨며 귀곡성(鬼哭聲)을 울렸다.
일검을 떨쳐 산을 쪼갠다는 군마검법의 절초, 군마굉천하(群魔轟天下)가 펼쳐지며 천근 바위라도 둘로 쪼개 버릴 듯한 도기가 금비의 정수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스르르르―
금비의 옥루고검이 허공중에 흐르며, 조천악의 검세를 마주쳐 갔다.
도와 검이 마주치며 물길을 타고 흐르듯, 검이 인도하는 허공중의 길을 따라 도가 흘러내렸다.
몸을 기울이며 춤추는 듯한 모습으로, 금비의 두전성이가 조천악의 도세를 몸 곁으로 끌어당겨 흘러내렸다.
왼손의 고검으로 조천악의 참룡흑도를 받아 사선 아래로 흘려 내고, 오른손을 하늘로 뻗어 미처 소화해 내지 못한 반탄력을 허공에 흩어 버리는 금비의 모습은 실로 달 아래 춤추는 가녀린 무희와 같았다.
파라라락―
두전성이의 인도에 따라 비끼면서도, 그 강한 압력으로 강풍을 만난 듯이 금비의 옷자락을 흔들어 대는 참룡흑도의 극강한 기세.
놀라움이 어린 조천악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으며, 금비가 시선을 옥루고검에 둔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는 그 물건으로 네 야망을 이루려고 하는구나.”
“두전성이……. 네 무공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 단계는 위로군. 하나, 그런 계집 같은 가녀린 기예(技藝)로 내 도세를 언제까지 받아 낼 수 있을까?”
푸욱!
조천악이 자신의 참룡흑도를 땅에 박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