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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9화)
이제 아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원죄를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오히려 더 독한 마인이 될 것이고, 어떤 아이는 후회하며 살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어떤 것도 이 끔찍한 영혼의 굴레를 벗겨낼 순 없었다.
홍탁은 간단한 연설을 끝으로 연단에서 물러났다.
그때, 연단 옆으로 복면을 쓰지 않은 일곱 명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상당한 고수인 듯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의 강력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이 년간 본격적인 무공을 익히게 될 것이다. 이분들은 앞으로 이 년간 너희를 가르치실 교령(敎領)들이시다. 너희는 앞으로 각자에게 맞는 무공을 찾아 배우게 될 것이다. 일단 처음 삼 개월은 모든 무공을 두루 배우고, 그 후 교령들이 선발하거나, 너희가 스스로 선택해서 필요한 무공을 배우도록 해라! 어제 절실히 느꼈을 테지만, 이 년 후의 성취가 너희의 삶과 죽음을 가를 것이다!”
수석 조교의 말투가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전에는 아이들을 물건 취급하듯 했는데, 이제는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지금부터는 한 명의 마인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리라.
조교는 교령들을 한 사람씩 소개했다.
첫 번째 검교령은 낙일검(落日劍)이라는 별호를 가진 임호였는데,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자로 소매가 좁은 흑의를 입고 있었다.
두 번째 도교령은 벽암도(劈暗刀) 장백으로 홍안(紅顔)의 거구 사내였다.
세 번째 창교령은 백발의 마른 인물이었는데 구영창(九影槍) 원규였다.
네 번째는 권각을 담당한 붕산권(崩山拳) 강패로 단단한 체구에 짧은 머리를 가진 중년인이었다.
그 옆으로는 장교령 소면살마(笑面殺魔) 여위, 조법 금나수를 가르칠 독수망(毒手닌) 진교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경신법 교령은 중년 여인이었는데 비선묘(飛鮮猫) 조미설이었다.
“이상 일곱 분이 오늘부터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우선 일곱 조로 나눠 각각 번갈아 무공을 익히도록 하라!”
삼백이 명의 아이들이 마흔세 명씩 일곱 개의 조로 나뉘었다.
왕오가 속한 칠조는 한 명이 남아 마흔네 명의 인원이 되었다.
왕오의 조는 경신법을 처음 수련했다.
경신법 교령 조미설이 가르친 것은 비설종(飛雪踪)이라는 신법이었는데, 은밀하면서도 빠른 움직임이 장점인 신법이었다.
또한,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움직임을 종잡을 수 없는 것이 특징인 독특한 신법이었다.
극성으로 익히면 상대의 시야 사각으로 움직여 모습을 감출 수도 있는 은형과 잠입에 유리한 심법이었다.
경신법 수련은 공통으로 수련해야 할 과목이었다.
연이어 검, 도, 창의 수련을 받은 왕오가 인상적으로 느낀 무공은 임호가 가르친 뇌전검(雷電劍)이었다.
마치 번개가 치듯 빠르면서도 상대가 검로를 예측하기 힘든 불규칙한 검의 움직임이 특징인 검법이었다.
빠른 발검과 손목의 움직임을 중시해 쾌(快)와 변(變)을 동시에 추구하는 상승검법이었다.
계속해서 권각법, 조법, 장법의 수련이 이어졌다.
왕오는 어제의 일을 잊기 위해 수련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다른 아이들 역시 왕오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모두가 미친 듯이 수련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모든 수련이 끝나고 나니 시간은 이미 해시 정(밤 10시)에 이르러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왕오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자신과 함께 온 다섯 아이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다섯 모두 금혼제령대법에서 살아남았다. 왕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난 아직도 멀었구나.’
왕오는 애써 그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삼 개월 동안 왕오는 손가죽이 몇 번씩 벗겨질 정도로 수련에 전념했다.
아이들의 기도는 삼 개월 전과는 딴판이 되어 있었다.
이젠 일 갑자의 내공을 어느 정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늦겨울의 추위도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만일, 이들이 일 갑자의 공력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그들은 절정의 고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먼 일이었다. 이제 겨우 이 할 정도의 공력을 소화했을 뿐이었다.
왕오는 자신의 무공으로 뇌전검(雷電劍)을 택했다.
왕오에겐 다른 무기들보다는 검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죽은 아버지가 검을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절정에도 도달하지 못한 그저 그런 고수였으나 어린 왕오에겐 천하제일고수였다.
두삼은 독특하게 창을 택했고, 아신은 도를 택했다. 장팔, 소소는 왕오와 같이 검을 택했다.
삶이란 이어지다가도 끊기는 미로와 같아서 언제 무엇이 앞에 나타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왕오가 보는 미래는 원수의 목에 자신의 검을 꽂아 넣는 것이었다.
각자 자신의 무공을 택하고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한 첫날 낙일검(落日劍) 임호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사실 검의 초식은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베기, 막기, 찌르기가 그것이다. 왼쪽으로 베든 오른쪽으로 베든 꽃 모양으로 베든 베는 건 베는 거다. 모양이 예쁘거나 멋있다고 살 놈이 죽고 죽을 놈이 살지 않는다. 어차피 모든 초식은 기본에 충실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기본이 기본인 이유는 가장 널리 인정받고 검증된 초식이기 때문이며, 가장 약점이 없는 초식이기 때문이다. 뇌전검은 빠르고 변화가 심한 검공이다. 하지만, 변화와 빠르기를 동시에 갖추기 위해서는 다른 검법들에 비해 훨씬 기본이 단단해야 한다.”
아이들은 임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년 후 살아남기 위해서는 임호의 뇌전검을 최대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앞으로 한 달간은 기본 베기와 찌르기를 반복해서 수련할 것이다.”
임호는 하나하나 시범을 보이며 아이들에게 자세를 가르쳤다.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라! 빠르지 않게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왕오는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자신의 팔과 다리 허리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간 기본 수련을 충실히 했기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자세로 검을 움직일 수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흔들리는 부분이 느껴졌다. 빠르게 움직였을 땐 느끼지 못했던 문제점들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군! 느리게 움직이니, 내 약점과 고쳐야 할 점이 확연히 느껴지는군.’
왕오는 기꺼운 마음으로 검을 반복해서 내려쳤다.
“검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검의 회수(回收)도 중요하다! 회수할 수 없는 검은 이미 너의 검이 아니다. 실전에서 얼마나 빨리 검을 내밀고 빼느냐에 따라 승패의 상당 부분이 좌우된다. 검을 뻗을 땐 항상 회수를 생각하라! 검을 뻗는 순간 적에게 너희의 심장을 맡기고 싶지 않다면!”
왕오는 임호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모든 힘을 최대한 발휘한다 해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힘은 많이 사용하느냐 보다 얼마나 적당히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적은 힘이 필요한 곳이 있고 큰 힘이 필요한 곳이 있다. 적은 힘이 필요한 곳에 큰 힘을 사용하게 되면, 목표를 지나치게 된다. 항상 여력(餘力)을 남겨라! 모든 힘을 발휘했다는 것은 달리 말해 너희에게 최후의 순간이 왔음을 뜻한다!”
왕오에게는 모두가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검에 대해 새로이 눈뜨게 되는 순간이었다.
천천히 베고, 찌르고 하는 기본 자세들을 수련하면서 왕오는 체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왕오는 체력 훈련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정확하고 안정된 자세는 체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본 베기와 찌르기 수련이 끝나고 다른 아이들이 초식에 열중할 때 왕오는 체력을 늘여 나갔다.
무림맹에서도 독종이라 불리던 왕오였기에, 몸이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오로지 단련하고 또, 단련했다.
심법과 경신법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잠을 줄여가며 심법을 수련했고 모든 움직임에 비설종을 섞었다.
금혼제령대법 이후로 아이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언제 서로 죽여야 할 상황이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독기를 품고 서로를 경계했다.
거기다 조교들의 간섭이 줄어들고 여유가 생기자 크고 작은 다툼이 일어났다.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에서 조금의 충돌만으로도 금방 싸움으로 번지고 마는 것이다.
정식 수련 시간 이외에는 목검만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아직까지 살인이 일어나진 않았으나, 아이들의 공력이 날로 높아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주먹만으로도 서로를 죽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조교들이 특별히 막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왕오는 되도록 다른 이와의 접촉을 삼가했다.
아직은 자신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특별히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 명을 상대할 순 있어도 두 명만 되도 왕오가 당하고 말 것이다.
최대한 숨죽이며 수련에만 열중했다.
다른 아이들도 왕오의 살벌한 인상과 분위기에 함부로 다가서지 못했다.
육 개월 정도가 지나고 나자 조금씩 아이들의 실력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은 그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무공이 있는 상태로 들어온 이들, 바로 마교오세의 아이들이었다.
모두 다섯이었는데, 점차로 한두 명씩 그들을 따르는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실력의 적에게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무리를 형성하는 방법이 제일이었다.
왕오는 처음에는 오히려 다른 아이보다 뒤처져 있었다.
초식이나 검의 운용보다는 체력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탓이었다.
그러나 열 달이 지나가면서, 체력 훈련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몇 번을 연습해야 가능한 자세들을 왕오는 한두 번만에 완벽하게 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빠르게 다른 아이들을 추월해 나갔고, 일 년이 되었을 때쯤 상위권에 속하게 되었다.
그때, 그동안 연락이 없던 간자에게서 쪽지가 날아왔다.
금혼제령대법 이후 아이들은 두 명이 한 방을 쓰게 되었고, 그만큼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교령들과의 수련 시간 이외에는 조교들도 자유롭게 아이들을 풀어주었다.
식사도 광장이 아닌 서쪽 수련장 식당에서 했다.
쪽지는 점심 식사로 받은 오리고기 안쪽에 들어 있었다.
入勢
쪽지에는 ‘입세(入勢)’ 단 두 자만이 적혀 있었다. 무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리라.
지금 지옥곡에서는 마교 오세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세력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우선은 대여섯 명 정도밖에 않되지만, 실력 있는 아이들을 계속 자기 무리로 포섭해 나가고 있었다. 왕오에게도 최근 몇 번의 영입 요청이 있었으나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중이었다.
무리를 짓는다는 것이 썩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쪽지를 보낸 이상,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음 시험과 관계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옥곡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무리에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필요했다.
왕오는 어느 세력에 들어가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