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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11화)
왕오가 씨익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이마의 흉터가 일그러져 왕오의 모습이 마치 악귀처럼 보였다. 흠짓하며 잠시 머뭇거린 오십구호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뻗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웃어!”
왕오는 그릇을 버리고 두 다리를 벌려 자세를 안정시켰다. 그러지 않아도 한 번은 부딪히게 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오히려 기다리던 바다. 철저히 밟아주리라.
오십구호의 오른 주먹이 왕오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제법 매섭고 빠른 주먹이었다. 하지만, 독기가 없다.
그저 왕오에게 뜨거운 맛을 한번 보여주겠다는 정도의 코웃음 나는 일격이었다.
왕오가 몸을 살짝 옆으로 튼 채 왼팔을 들어 올려 오십구호의 주먹을 막았다.
순간 왕오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손목을 빙글 돌린 왕오가 오십구호의 오른팔을 낚아챘다.
왕오가 왼팔을 힘껏 뒤로 당기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밀자, 중심이 흐트러진 오십구호가 앞쪽으로 쭈욱 딸려왔다.
오십구호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해 가고 왕오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래서 체력과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하체를 안정시킨 왕오와 흥분해서 무턱대고 공격한 오십구호와의 중심 이동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대로 오른손바닥으로 오십구호의 몸을 내리누르며 왼다리로 오십구호의 오금을 찼다.
중심을 잃은 오십구호가 뒤로 넘어갔다. 설명은 길었으나, 이 모든 상황이 마치 한동작인 것처럼 동시에 이루어졌다.
쿵!
오십구호의 육중한 몸이 땅바닥에 충돌하는 순간 몸을 회전시킨 왕오의 오른발이 오십구호의 목을 인정사정없이 밟았다.
우두둑!
오십구호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즉사였다.
식당 안에 정적이 흘렀다.
비명 소리조차 없이 오십구호는 목숨을 잃었다. 금혼제령대법 이후 아이들 간의 싸움에서 첫 살인이 일어난 것이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말릴 틈도 없었다. 오십구호조차 설마 왕오가 자신을 죽이리라 생각지 못했고, 그러한 방심으로 인해 손 한 번 못 써본 채 허무하게 죽었다.
“죽일 생각이 아니면 덤비질 말았어야지! 퉤!”
왕오가 오십구호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자신의 밥그릇에 했던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살인을 하고도 왕오의 표정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아이들은 왕오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뒤늦게 소란을 듣고 달려온 북궁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그것도 최악으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이익! 네, 네놈이 감히!”
북궁호는 얼굴이 벌개진 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오십구호의 시체와 왕오를 번갈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던 북궁호가 외쳤다.
“개자식!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마!”
왕오가 무표정하게 자세를 잡고, 북궁호가 왕오를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네가 감히 우리 식구를 건드리겠다는 거냐!”
소란을 전해 듣고 혁련위가 달려온 것이다.
혁련위의 호통에 북궁호가 멈짓했다. 왕오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으나 혁련위는 달랐다.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북궁호가 이를 악물었다.
“네놈의 졸개가 내 심복을 죽였다! 당연히 나도 저놈을 죽여 복수해야겠다!”
혁련위가 왕오의 옆에 섰다.
“어차피 네놈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고 왕오는 정당한 힘을 행사했을 뿐이야! 네놈의 졸개가 약해서 당한 것이지 반대였다면 왕오가 죽었을 수도 있다!”
상황을 목격한 여러 아이들이 있었다.
북궁호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리긴 힘들었다.
그렇다고 힘으로 혁련위를 누를 수도 없었다. 북궁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똑똑히 들어라! 왕오는 내 졸개가 아니라, 나 혁련위의 친구다!”
혁련위가 왕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북궁호는 이를 갈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반드시 왕오에게 이 대가를 치르도록 해주겠다 속으로 다짐했다.
“잘했다 왕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 했다. 역시 내가 친구 하나는 제대로 택했군! 핫핫하!”
혁련위가 호쾌하게 웃었다. 왕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혁련위가 조금만 늦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아직은 북궁호에 비해 공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왕오의 이름은 지옥곡 내에서도 유명해졌다. 최초의 살인자인데다 혁련위의 친구, 그리고, 독종.
지옥곡 내에서도 왕오는 여전히 독종으로 불리고 있었다.
왕오의 살인 이후로 지옥곡의 마동들에 대한 규제가 좀 더 강해졌다.
함부로 살인하지 못하도록 조교들이 나선 것이다.
마동들 하나하나가 마교의 자원이었다.
훈련과 시험에 의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자신들끼리 함부로 싸우다 죽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개죽음일뿐더러, 지옥곡 내의 규율을 제대로 세울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천마신교의 정예로 키우기 위해 데려온 아이들이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은 필요치 않았다.
때문에, 북궁호는 분하지만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있은 후 일주일쯤 지나고 지옥곡에도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아신은 무리에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 아이들을 모아 세력을 형성했다.
오세에 소속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아신다운 행동이었다.
아신 외에도 오대 오십삼호 덕호라는 녀석이 아이들을 모아 무리를 형성했다.
이렇게 지옥곡에는 일곱의 무리가 생겨났다.
지옥곡 홍탁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수석 조교가 급하게 들어왔다.
“총교령님 감찰단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홍탁이 의아스러운 얼굴로 보고하는 수석 조교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금혼제령대법에 대해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요?”
조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홍탁의 미간이 내천자(川)를 그렸다. 사실 올 것이 온 것이다. 어차피 시간 문제였을 뿐 결국엔 알려질 일이었다.
홍탁은 일말의 후회도 없었고, 자신이 잘못했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교는 결과를 중시하는 곳 어차피 마동들의 성장세를 보면 그들도 자신을 인정하고 말 것이다.
“들여보내라!”
홍탁이 접견을 허락했다. 놀랍게도 조교와 함께 들어온 자는 왕오를 지옥곡으로 데려온 전궁이었다.
“감찰단 부단주 전궁이오!”
전궁이 뻣뻣하게 인사했다.
사실 직책상으로는 전궁이 홍탁보다 한 단계 아래였으나, 감찰단의 특성상 홍탁이 전궁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홍탁은 불쾌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고 전궁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무슨 일로 오신 게요?”
썩 탐탁지 않은 말투였다.
“그대가 금지된 술법을 썼다는 정황이 잡혔소. 그래서 이를 확인하고자 내가 직접 온거요!”
또박 또박 분명한 말투가 이미 확증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소. 내가 마동들에게 금혼제령대법을 실행했소.”
너무 쉽게 홍탁이 시인하자 전궁이 의외인 듯 잠시 홍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홍탁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전궁의 시선을 받아냈다.
“금지된 술법을 쓰면 어떤 처벌이 내려지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물론이오!”
금지된 술법을 행하였을 경우 교수형에 처한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홍탁이었다.
“그렇다면, 그리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보오만.”
전궁이 물었다.
“그렇소! 그 규정에는 [천마신교의 안녕과 존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경우는 제외한다] 라고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소. 본인은 이번 일이 앞으로 천마신교의 안녕과 존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 믿고 있소!”
홍탁이 큰 덩치를 실룩거리며 전궁에게 말했다.
“어떻게 마동들에게 금혼제령대법을 쓰는 것이 천마신교의 안녕과 연계된다는 것이오?”
삐딱한 표정으로 전궁이 반문했다.
홍탁이 괴변을 늘어놓아 자신의 죄를 면하려 한다 생각했다.
“우선 먼저 보여드릴게 있소!”
홍탁이 집무실을 나서 마동들이 수련하고 있는 서쪽 수련장으로 향했다.
전궁을 데리고 제일 먼저 도착한 검술 수련장에는 칠십여 명의 아이들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돌린 전궁의 눈이 커졌다.
아이들의 공력과 무공 실력이 예상을 몇 배 상회하고 있는 것이다.
“허! 놀랍군!”
전궁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금혼제령대법의 위력이 단지 소문에 의해 부풀려졌을 뿐이라 생각했다.
전궁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실제로 소문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 이는 없었다.
과연 홍탁이 자신할 만했다.
이들이 제대로 실력을 갖춰 지옥곡을 나선다면 마교에는 무려 삼백이 넘는 절정고수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절정 고수의 수가 열에도 못미치는 문파들이 대부분임을 생각해 보면 실로 전 무림의 판세를 뒤짚어 버릴 큰 전력이었다.
기껏해야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쯤 되야 열이 넘는 절정고수를 갖고 있었다.
정파와 마도의 균형추가 무너질 결정적 무기인 것이다.
“대단하군! 과연 큰소리칠 만하오!”
아이들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며 전궁이 상기된 얼굴로 홍탁에게 말했다.
홍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소! 이제 정파놈들은 머지않아 천마신교의 깃발 아래 무릎 꿇게 될 것이오! 후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나서는 순간 어지간한 문파들은 하루도 안 돼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전궁이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함부로 판단하기엔 사항의 경중(輕重)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것은 내 선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 같소. 우선 위에 보고를 한 후 상부에 판단을 맡기도록 하겠소.”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홍탁이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전궁을 배웅했다.
그때, 돌아서던 전궁의 눈에 왕오의 모습이 잡혔다.
“응? 저놈은?”
전궁이 멈춰섰다.
“무슨 일이오?”
홍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훗, 살아남았군. 제법이야.”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왕오를 처음 만났던 사천에서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상으로는 가장 마인다운 놈이었다.
“내가 아는 놈이 있어서 그렇소. 후후.”
전궁의 말에 홍탁이 왕오를 바라보았다.
이마의 흉터가 인상적인 녀석이었으나 그뿐이었다.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지만, 아직 최고 수준의 아이들에 비하면 공력이 부족했다.
“지난번 최초로 살인을 저지른 놈이 저놈입니다.”
조교의 말에 홍탁이 관심을 보였다.
“호오. 그래? 재밌군!”
전궁이 잠시 왕오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수련장을 나섰다. 홍탁이 눈을 빛내며 전궁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