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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13화)


왕오는 조심조심 비설종을 전개했다.
어딘가에 함정과 암기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왕오의 코로 앞쪽에서부터 피 냄새가 느껴졌다.
‘누군가 여기서 당했군!’
그렇다면, 암기나 함정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온 신경을 집중한 왕오가 오감을 이용해 사방을 살폈다.
극도로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걸음쯤 움직였을 때, 발목에 가느다란 실이 걸렸다.
아마도 함정일 것이다. 왕오가 조심스럽게 뒤로 발을 뺐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은사(隱絲)가 바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왕오가 검끝으로 은사를 건드렸다.
쐐애액!
순간, 좌우에서 두 개의 초승달 모양 칼날이 튀어나오더니 반대쪽 벽에 박혔다.
칼날은 벽으로부터 사슬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대로 지났다면 목과 다리가 분리되어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한 번 사용된 기관은 반각이 지나야 복구된다.
왕오는 기관을 지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앞쪽에 목과 다리가 잘린 아이의 시체가 보였다.
그의 죽음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
물론, 피 냄새가 없었더라도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 냄새 때문에 더욱 집중하고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왕오는 다른 사람의 죽음이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는 이런 어긋난 상황에 어느새 익숙해진 스스로가 두려워졌다.
이러다 진정 마인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복수를 위해서 결국엔 스스로가 가장 증오하는 존재, 바로 복수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뒷일은 나중에! 우선은 복수가 중요하다!’
왕오는 자꾸만 떠오르는 자신의 길에 대한 의심과 약해지려는 마음을 누르고 한 발 한 발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 속을 일각쯤 조심스럽게 걸었을 때 왕오는 바닥에서 한 줄기 바람을 느꼈다.
바닥에서 바람이 올라온다는 것은 바닥에 틈이 있거나, 밑에 빈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얼핏 살펴보면 아무런 함정도 없어 보이는 그저 평탄한 바닥이었다.
특별한 장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왕오는 혹시 몰라 벽쪽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벽에 등을 댄 채 걸음을 옮겼다.
“헛!”
덜컹!
왕오가 오른쪽 발을 딛는 순간 바닥이 쑥 내려앉았다.
재빨리 뒤로 물러서서 확인하니 바닥이 좌우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도록 되어 있는 듯했다.
계속 밟았다면 바닥이 뒤짚히며 왕오는 밑으로 추락했을 것이고, 뒤짚힌 바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을 터였다.
가운데 회전축을 밟고 지나가거나, 양발에 균일하게 무게를 분배하며 조심스럽게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왕오가 발을 미끄러트리며 천천히 전진했다.
한쪽으로 무게가 쏠리게 되면 추락하게 될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왕오가 중간쯤 도달했을 때였다.
왕오의 감각에 건너편에서 다른 이의 움직임이 잡혔다.
‘이런!’
왕오가 재빨리 발을 움직여 전진하려 했으나 놈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이 새끼! 걸렸구나!”
북궁호의 졸개였다. 놈이 건너편에서 오른쪽 바닥을 힘껏 밟고 있었다.
이미 건너기엔 늦었음을 안 왕오가 오른편 앞쪽을 향해 최대한 뛰어올랐다.
돌판이 회전하며 발밑에 시커먼 공동이 열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떨어지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왕오의 몸이 오른쪽 벽을 향해 나아갔다.
기이이잉!
그때, 반 바퀴 회전한 왼쪽 돌바닥이 왕오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저 돌바닥에 부딪히게 된다면 왕오의 머리가 흔적도 없이 박살나고 말 것이다.
때마침 오른쪽 벽에 도달한 왕오가 공력을 다리에 집중한 채 벽을 발로 차 한 번 더 도약했다.
후우웅!
잔뜩 무릎을 굽힌 왕오의 발밑으로 돌 바닥이 스치고 지나갔다.
돌판이 일으킨 바람에 왕오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어느 정도 위로 떠오른 왕오의 몸이 점점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도약의 힘이 다한 것이다.
왕오는 건너편을 보았다.
한 번 정도만 더 도약할 수 있다면 반대편으로 갈 수 있을 듯했다.
벽을 한 번 차고 오른 상태라 벽과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다시 도약하려면 다른 게 필요했다.
그때 왕오의 눈에 한 바퀴 돌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고 있는 돌 바닥이 보였다.
위로 올라오는 힘에 의지해 조금은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력을 잔뜩 끌어올린 왕오가 비설종을 발휘해 몸을 최대한 가볍게 했다.
비설종의 또 다른 특징은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몸을 가볍게 한 후 외부의 힘과 기운에 순응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왕오의 발끝이 위로 튀어오르는 돌바닥을 살짝 차고 올랐다.
탓!
왕오의 몸이 탄력을 받아 마치 한 마리 새처럼 건너편으로 날아갔다.
“이놈! 뜻대로 될 듯싶으냐!”
기다리던 북궁호의 졸개가 검을 뽑아 들고 다가오는 왕오를 겨누었다.
왕오가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나, 아직 공중에 뜬 채로 몸의 방향을 바꿀 정도의 고수는 못되었다.
그대로 떨어진다면 놈의 칼에 꼬챙이 꿰듯 관통당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놈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왕오의 왼손에서 한 줄기 빛살이 쏘아졌다. 미리 준비한 단검이었다.
쉬익!
챙!
왕오가 던진 단검을 막느라 놈의 검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왕오의 검이 세 가닥으로 분열했다. 뇌전검이 펼쳐진 것이다.
콰앙!
“크악!”
단말마를 지른 북궁호의 졸개 놈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뒤로 넘어졌다.
그 위로 왕오가 떨어져 내렸다.
“헉! 헉!”
비설종과 뇌전검을 동시에 펼치느라 상당한 무리를 한 왕오가 바닥을 한 바퀴 뒹군 후 간신히 자세를 잡고 숨을 가다듬었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준비한 단도 덕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만일 뇌전검을 놈이 받아냈다면 그 반탄력으로 왕오는 함정에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단도를 던져 틈을 만든 것이 왕오를 살렸다.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
왕오는 미리 방비하지 못한 자신에게 자책했다.
그나마 한 놈을 해치웠으니 더 이상의 방해는 없을 것이었다.
한 번 숨을 고른 왕오가 다시 전진했다.
몇 개의 암기 지대와 함정을 거친 왕오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암기를 모두 피하진 못하고 몇 개가 스친 것이다. 다행히 독은 없어서 심각한 상처는 없었다.
일차 관문의 마지막 함정은 삼십 장이 넘는 길을 좌우의 벽이 닫히기 전에 건너야 하는 것이었다.
일정 수준의 경공이 아니면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일 터. 그야말로 마교다운 발상이었다.
그나마 다른 아이들보다, 경공을 열심히 수련한 덕에 왕오는 수월하게 통과했으나 벽 언저리에 뭍은 피로 보아서는 이곳에서도 누군가가 죽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 움직이는 벽의 함정을 통과하고 나니 앞쪽으로 빛이 보였다.
빛쪽으로 움직이니 눈앞에 넓은 광장이 나타나고 이미 함정을 통과한 많은 수의 아이들이 모여서 다음 관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는 몇 명의 조교가 아이들을 정렬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왕오가 마지막인 듯, 왕오가 자리를 잡자 조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인원이 통과했구나. 훌륭하다!”
왕오가 둘러보니 아까보다 오십 명 정도가 줄어든 상태였다.
오십여 명의 아이들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한쪽에서 살기를 띤 채 여전히 왕오를 노려보고 있는 북궁호가 보였다.
‘저놈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없애 버려야겠군.’
이런 식으로 자꾸 자신을 방해한다면, 임무를 수행하거나 가문의 복수를 하는데 상당한 문제거리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왕오는 그런 상황을 용납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지금부터 이차 관문에 대해 설명하겠다. 사실 진정한 시험은 이차 관문에서 이루어진다 할 수 있다. 이차 관문 뒤에는 해독약이 기다리고 있다. 여길 통과한다면 너희는 삶을 얻을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춘 조교가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이차 관문은 다른 놈들과 서로 협력해서 통과해도 된다. 오히려 혼자서는 통과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마음 맞는 놈들끼리 협력해서 통과하도록 하라! 횃불을 사용해도 좋다. 무기가 부족하다면 여기 있는 것들 중에 더 가져가도 된다! 무슨 수를 쓰던 살아남는다면 인정해 주겠다.”
한결 좋은 조건이었다.
혁련위들과 함께 통과한다면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이고, 북궁호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조교가 주의를 줬듯이 그만큼 더 힘든 관문이리라. 왕오는 더욱 조심해야겠다 생각했다.
“자, 그럼 함께 갈 놈들은 지금 한곳에 모이도록 하라!”
왕오가 혁련위의 무리와 함께 한 조를 형성했다.
무려 사십 명에 이르는 인원이었다. 모두 실력이 뛰어난 아이들이었다. 소소도 보였다.
다행히 일차 관문에서 탈락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훗! 실망인걸, 왕오. 이렇게 상처를 달고 올 줄이야!”
여기저기 긁힌 왕오의 모습을 혁련위가 놀렸다.
왕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북궁호 졸개 놈에게 힘을 너무 뺀 나머지 뒤에 이어진 함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세력들 역시 한데 모였다.
북궁호의 무리가 인원이 가장 많았는데, 마흔다섯 명이었다.
원래 오십 명이 넘었으나, 왕오에게 한 명이 죽고 일차 관문에서 여섯이나 죽었다.
인원은 많았으나, 다른 오세의 세력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아이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목가와 위지가의 세력은 각각 서른여덟, 서른아홉의 인원이었고 사마령의 무리는 혁련위와 같은 마흔이었다.
역시 실력이 뛰어나 낙오자가 없는 것이다.
아신의 무리는 열일곱 명으로 세 명이 탈락했다.
덕호의 무리 역시 세 명이 탈락하여 열일곱이었다.
대부분 죽은 아이들은 무리를 이루지 못한 아이들이었는데, 그만큼 실력이 없었기에 아무 데도 속할 수 없었으리라.
아이들이 각자 무리를 지어 모이고 나자 조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이차 관문을 시작하겠다. 앞에 보이는 열 개의 입구 중 아무 곳으로나 들어가면 된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기 바란다! 출발!”
그동안과는 다른 조교의 말이 오히려 이번 관문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듯했다.
무리들은 서로를 피해 다른 굴로 들어갔다.
무리를 이루지 못한 아이들은 할 수 없이 저희들끼리 모여 다른 세력들이 들어가지 않은 굴로 향했다.
왕오와 혁련위는 두 번째 동굴로 향했다.
동굴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이 지배하고 있었다.
혁련위가 횃불에 불을 붙이자 그들이 가야 할 길이 서서히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