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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14화)


동굴 안은 치렁치렁 메달린 종유석들과 기괴한 모양의 석순, 석주들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차 관문과는 달리 이곳은 천연의 동굴인 모양이었다.
입구의 크기를 보아 작을 줄 알았는데, 안은 상당히 넓었다.
폭이 삼 장도 넘어서 혁련위의 무리가 넉넉히 통과할 수 있었다.
머리 위 천장까지도 오 장은 될 듯 상당히 높아 보였다.
동굴 곳곳이 횃불에 반사되어 마치 어둠 속을 부유하는 영혼처럼 일렁거렸다.
아이들은 동굴의 묘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숨을 죽였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라! 우린 여기 놀러온 것이 아니야!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몰라!”
혁련위가 주의를 주자 그제야 아이들이 경직된 몸을 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숨이 이곳을 통과하는데 달려 있음을 기억해 낸 것이다.
혁련위는 앞으로의 알 수 없는 위험에 즉각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대열을 정비했다.
전위와 후위를 나누어 세우고, 혹시 모를 측면 공격에도 대비했다.
발이 빠르고 감각이 뛰어난 왕오가 몇 명의 아이와 함께 전위를 맡았다.
인공 동굴이 아닌 천연 동굴이다 보니 대체 어느 것이 함정인지 분간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모든 것이 위험하고 이질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세를 숙인 채 조심해서 전진했다.
일행이 움직인 지 일각 정도 흘렀을 때, 왕오가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지?”
혁련위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앞쪽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는군.”
일행의 앞쪽 어둠 속에서 무언가 역겨우면서도 비릿한 냄새가 밀려왔다.
횃불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있군!”
혁련위 역시 냄새를 맡은 듯 긴장해 자세를 잡았다.
아이들이 무기를 들고 잔뜩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왕오가 바닥의 돌을 들어 어둠 속으로 던졌다.
툭! 투둑!
혹시 함정인가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때, 어둠 속에 두 개의 둥근 혈광이 나타났다.
츠츠츠츠!
동굴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어둠으로부터 나타난 것은 길이가 이 장은 될 듯 보이는 한 마리 검은 지네였다.
“흑오공이다!”
혁련위가 놈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소리쳐 경고했다.
“머리 가까이 가지 마라! 저놈은 숨 쉴 때마다 독을 뿜어낸다!”
비릿한 냄새는 놈이 뿜어내는 독기인 듯했다.
그렇다면 근처에 가지 않는다 해도 시간을 오래 끌게 되면 놈의 독에 중독될 것이다. 속전속결로 처리해야 했다.
놈이 몸을 드러냈다.
몸 둘레가 어른 몸통 서너 배는 될 듯한 거대한 놈이었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다리와 갑주(甲?)보다 단단한 껍질로 온몸을 두른 채 놈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만에 하나 돌바닥을 찍으며 파편을 튀기는 놈의 날카로운 다리에 걸리게 된다면 아이들의 몸은 갈가리 찢길 것이다.
놈의 입에서는 녹색 연무(煙霧)가 주기적으로 흘러나왔다.
독안개였다. 다가서기조차 어려운 상대였다.
“좌우로 흩어져라! 정면을 피해!”
혁련위가 아이들을 둘로 나누어 놈의 좌우로 움직이게 했다. 그때, 왼쪽으로 돌던 아이들에게 놈의 꼬리가 덮쳤다.
키이이이잉!
땅을 긁으며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진 꼬리에 미처 피하지 못한 몇몇 아이들이 튕겨져 나갔다.
“으아악!”
튕겨진 아이들이 동굴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힌 뒤 바닥으로 떨어졌다.
입에서 피를 토하는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부상을 당한 듯했다.
뒤로 물러선 아이들도 결코 안전하지 못했다.
놈의 독무가 그들을 향했다. 아이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뒹굴었다.
그 위로 흑오공의 독무가 스쳐 지났다.
그중 한 명의 아이가 독무에 직격당했다. 아이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얼굴이 검게 변한 아이가 한 줌 독수로 녹아 사라지는데까지는 몇 호흡밖에 걸리지 않았다.
간신히 독무를 피한 아이들도 독 기운에 노출되어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필히 전멸이다.
혁련위와 왕오가 서로 눈을 맞추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놈을 쓰러뜨려야 했다.
“내가 놈의 시선을 끌겠다!”
왕오가 혁련위에게 말하곤 놈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뛰쳐나갔다.
한 줄기 선이 흑오공을 향하더니 놈의 왼쪽 눈에 틀어박혔다. 왕오가 단도를 던진 것이다.
크오오오!
흑오공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이들은 들어온 쪽 입구로 재빨리 물러섰다.
“이놈! 여기다!”
왕오가 흑오공 앞쪽에서 소리쳤다.
발광하던 흑오공이 왕오를 발견하고는 머리부터 돌진해 왔다. 머리가 도착하기 전에 뿌연 독무가 먼저 왕오를 공격했다.
왕오는 비설종을 최대한 발휘해 흑오공의 머리를 피했다.
하지만 몸부림치던 흑오공의 다리 하나가 왕오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왕오의 왼쪽 어깨가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변했다.
단지 스쳤을 뿐인데, 한 치가 넘는 깊이로 길게 상처가 났다.
왕오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삼켰다.
흑오공이 머리를 들어 다시 한 번 왕오에게 돌진했다.
왕오가 깊게 심호흡을 하며 흑오공을 노려보았다.
놈의 머리뿐 아니라 다리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그때, 혁련위가 움직였다.
눈에 단도가 박힌 흑오공의 왼쪽이었다.
왼쪽 눈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흑오공의 눈은 퇴화되어서 대신 더듬이로 사물을 인식한다.
다행히 왕오에게 정신이 팔린 흑오공이 혁련위의 움직임을 놓쳤다. 혁련위의 도가 놈의 오른쪽 몸통을 쳤다.
까강!
놈의 두터운 껍질에 혁련위의 도가 흠집만을 남기고 튕겨져 나갔다.
“이런 빌어먹을!”
혁련위가 욕을 토해냈다.
왕오를 공격하려던 흑오공이 고통을 느낀 듯 왼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크오오오오!
괴성을 토해낸 흑오공이 혁련위에게 돌진했다.
혁련위가 위로 뛰어올라 놈의 공격을 피했다.
흑오공의 머리가 혁련위의 발바닥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났다.
“으합!”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며, 그 힘을 이용해 혁련위가 다시 한 번 놈의 몸통에 도를 날렸다.
이번엔 십성의 공력을 사용한 강력한 일격이었다.
퍼억!
제법 제대로 된 소리가 났다. 도에 직격당한 놈의 껍질이 쩌억 벌어져 녹색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동굴 내에 진동했다. 놈의 내장이거나 독혈이리라!
크오오오오오!
놈이 다시 몸부림쳤다.
놈의 수많은 다리와 집게 꼬리를 피하려면,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혁련위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놈의 몸짓을 피하고 있었다.
흑오공이 뿜어내는 독기에 혁련위의 얼굴도 점차 창백해지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용기를 내어 흑오공에게 달려들었으나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왕오는 몸부림 치는 흑오공을 피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왼쪽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인해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일단 혈도를 막아 지혈했으나 임시 처방에 불과한 것이다.
“검을 던져라!”
혁련위가 물러선 아이들에게 외쳤다. 흑오공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공력을 끌어올려 흑오공을 향해 있는 힘껏 검과 도를 던졌다.
따다다다당!
대부분 껍질에 맞고 튕겼으나 몇 개가 흑오공의 몸에 꽂혔다. 바로, 배부분이었다.
왕오의 눈이 빛났다. 흑오공의 배가 등쪽에 비해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모두 배를 공격해!”
역시 혁련위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아이들이 돌이며 남은 무기들을 흑오공의 배를 향해 던졌다. 그러나 땅을 기는 흑오공의 배가 쉽게 노출되지 않았다.
왕오가 다시 한 번 흑오공의 눈을 노려 왼손의 단도를 날렸다. 하지만 어깨를 다친 탓에 정확성과 힘이 떨어졌다.
단도가 아쉽게도 흑오공의 머리에 맞고 튕겨 나갔다.
“혁련위! 왼쪽 눈을 노려!”
왕오가 소리쳤다.
순간 혁련위가 동굴 벽을 박차고 흑오공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힘껏 내려친 혁련위의 도가 흑오공의 왼쪽 눈을 스쳤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놈의 눈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키아아아악!
하지만 상당한 고통을 준 듯 흑오공이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왕오의 눈에 흑오공의 드러난 배가 보였다.
왕오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왕오의 검이 네 갈래로 분열했다.
혼신의 공력을 끌어올려 뇌전검을 시전한 것이다.
갈라진 검줄기들이 흑오공의 머리 밑 몽통과의 연결 부분에 하나의 점을 만들고는 그대로 작렬했다.
콰아아앙!
머리와 몸통의 연결 부분이 터져 나가고, 흑오공의 머리가 분리되어 동굴 왼쪽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흑오공의 몸통이 몇 번 발광하더니 축 늘어졌다. 만약을 대비해 혁련위와 아이들이 흑오공의 머리와 몸통에 몇 번의 칼질을 더해 확인 사살했다.
이번 사투에서 한 명이 죽고 세 명이 중상을 당했다.
또한 중독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중상을 당한 아이 중 두 명은 중독까지 겹쳐 살아남기가 힘들 듯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 휴식을 취하면서 독을 몰아내야겠군.”
혁련위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왕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해서 뇌전검을 시전했더니 진기가 뒤엉켜 있었다.
아직 네 개의 검영은 무리였던 것이다.
어깨에 난 상처도 제법 깊어서 어느 정도 응급처치를 할 필요가 있었다.
운기조식을 해서 꼬인 진기와 혈맥을 바로잡고 상처를 치료하려면 휴식이 필요했다.
주위를 살피던 왕오의 눈에 소소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소도 악전고투를 한 듯 머리가 헝클어지고,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옆에서 혁련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챙기고 있었다.
처음 왼쪽으로 돌아갔던 그녀가 흑오공의 공격은 피했으나. 독무에 중독된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일단 앞쪽에는 또다른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 뒤쪽으로 물러나서 쉬도록 하지.”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직 첫날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여유가 있다.
지금 이 상태로 또다시 저런 놈을 만난다면, 반 이상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뒤로 삼십 장 정도 거리에 위치한 제법 넓은 공동(空洞)까지 후퇴한 후 운기조식을 취하며 몸을 다스렸다.
흑오공의 독은 많지 않은 양이었으나 독성이 상당해서 몰아내는데 반나절이나 걸렸다.
혁련위는 결국 하루를 쉬고 다음 날 움직이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해야 동굴의 함정들과 독물들에 맞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굴 안의 시간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암흑 뿐인 공간에서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신체의 감각으로 대충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