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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15화)
다음 날 아침이라 여겨지는 시간에 아이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이젠 동굴의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에겐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뿐이었다.
한 시진쯤 전진하니 넓던 동굴이 좁아지기 시작해 결국엔 두 명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 협소해졌다.
거기에다가 기온이 점점 내려가서 내공이 이십년 수준이 넘는 아이들에게도 상당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함정에 빠질 확률이 높았기에 다들 더욱 조심하며 천천히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일행이 일각 정도 더 전진하자 좁은 통로가 끝나고 넓은 광장이 나왔다.
하지만 광장에 들어서자 한기는 더욱 심해졌다.
“대체 왜 이렇게 추운 거야.”
혁련위가 인상을 찡그리며 주변을 살폈다. 횃불을 올려 광장을 살피니, 광장 중앙에 하얀 고치 모양의 덩어리가 보였다.
직경이 일 장에 높이는 이 장이 넘어 보이는 커다란 고치는 일행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얼핏 보아도 예사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미 흑오공을 만난 일행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고치를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허억!”
고치 앞에 도달한 일행은 얼어붙어 버렸다.
놀랍게도 고치 위쪽으로 흑오공의 머리가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일행의 등줄기로 오싹한 한기가 흘렀다.
한기는 위쪽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왕오가 두려운 눈으로 동굴 천장을 올려보는 순간이었다.
슈각!
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혁련위의 오른쪽에 있던 십오호가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반쪽이 되어 쓰러졌다.
십오호의 몸을 반토막 낸 것은 하얀 천으로 보였다.
그 천을 따라 올라간 곳에는 크기가 흑오공의 두 배는 될 듯한 하얀 거미가 자신의 거미줄 위에서 여덟 쌍의 눈을 번들거리며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설지주(雪蜘蛛)! 이런! 다들 물러서!”
혁련위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이들도 혼비백산하여 동굴 입구쪽으로 달아났다.
설지주는 만년빙지(萬年氷地)에 서식하는 괴물로 그 입에서 뿜어내는 한기에 닿으면 무엇이든 순식간에 얼어 버리며, 설지주의 거미줄은 천잠사에 못지않게 질기고 날카로와 어지간한 도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아마도 고치 속의 흑오공은 설지주의 먹잇감일 것이다.
슈우우우―
가장 동작이 느리던 한 아이가 설지주가 내뿜은 한기에 닿아 손을 쓸 새도 없이 하얗게 굳어 버렸다.
마치 온몸에 서리가 덮인 듯 비현실적인 모습이 아이들에게 극한의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천장에는 백색의 거미줄이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며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거미줄에서 뛰어내린 설지주가 아이들에게 다가왔다.
“설지주는 소리에 반응한다! 모두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해라!”
재빨리 혁련위가 아이들에게 소리친 후 구석에 몸을 숨겼다. 설지주는 눈이 여덟 개나 되었지만 퇴화되어 봉사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몸에 난 털로 소리의 진동을 느끼고 사물을 인식했다.
혁련위가 설지주에 대해 그나마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오세의 아이들이라면 설지주나 흑오공 따위의 마물들에 대해서 반드시 학습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산 근처엔 마인들의 마기에 끌려 마물들이 자주 출몰했다. 그런 이유로 마물에 대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반드시 배워야 하는 필수 학문이었다.
아이들의 소리가 사라지자 설지주가 털을 곤두세운 채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이대로 움직이지 않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설지주의 뒤로 돌아가 몸통을 공격해야 했다. 하지만 누구든 움직이는 순간 설지주의 공격에 노출되고 말 터였다.
왕오가 이를 악물었다.
설지주를 해치워야 이곳을 통과해 해독약을 얻을 수 있었다. 비설종을 사용해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면 설지주를 속이고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심이 선 왕오가 설지주를 향해 달려 나갔다.
비설종을 사용해 소리를 죽인 채 움직였지만, 결국 삼 장의 거리를 두고 설지주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설지주의 거미줄이 왕오를 향해 날아왔다.
왕오가 달리던 속도 그대로 몸을 누이며 바닥을 미끄러져 갔다.
왕오의 이마에 한 줄기 혈선을 남기며 설지주의 거미줄이 스쳐 지나갔고 왕오는 설지주의 머리를 지나 배 밑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왕오가 재빨리 검으로 설지주의 배를 갈랐다.
푸악!
갈라진 설지주의 배에서 초록색 끈적거리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놀란 설지주가 재빨리 뒤로 물러서 왕오에게 냉기를 뿜었다.
슈우우욱!
왕오가 몸을 굴려 간신히 설지주로부터 벗어났다.
닿지도 않았는데, 한기에 온몸이 떨렸다.
왕오의 검이 설지주의 배를 제법 깊게 베었으나, 덩치가 너무 커서 그리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아직 왕오의 공력이 모자란 것이다.
왕오의 행동에 자극받은 혁련위와 아이들이 용기를 내어 움직였다.
역시 비설종을 사용하여 설지주에게 접근했다.
왕오를 공격하려던 설지주가 아이들의 움직임을 느끼고 이리저리 거미줄을 날려댔다.
한 명의 아이가 몸이 두 동강이 난 채 쓰러졌고, 한 명의 아이는 냉기에 맞아 얼음 조각이 되어 버렸다.
참혹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 댓가로 설지주의 몸통 옆쪽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설지주가 몸통을 내주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섰으나, 혁련위가 한 발 빠르게 설지주의 몸에 도격을 날렸다.
퍼억!
일행 중 공력이 가장 뛰어난 혁련위의 일격은 설지주의 몸통에 제법 큰 타격을 주었다.
사실 설지주는 그 치명적인 공격력에 비해 몸통의 껍질은 상당히 약한 편이었다.
설지주의 등에 일 장 가까이 되는 큰 상처가 생겼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설지주가 두려움을 느끼고 천장으로 도망치려 재빨리 거미줄을 쏘아냈다.
“절대 놈이 천장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거미줄이 천장에 닿지 못하도록 막아라!”
설지주가 천장으로 도망치면, 일행으로서는 무기를 던지는 것 외에 설지주를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대부분 거미줄에 맞아 튕겨 나올 것이 뻔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놈의 거미줄 공격을 받아야 했다.
아이들이 필사적으로 검과 도를 날려 설지주의 거미줄을 쳐냈다.
아이들의 무기에 맞은 거미줄이 튕겨 나가 땅에 떨어졌다.
슈슈슈슉!
천장으로 도망치려던 시도가 제지당하자 궁지에 몰린 설지주가 마구잡이로 거미줄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으악!”
한 명의 아이가 설지주의 거미줄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팔이 잘려 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나와 사방에 흩어졌다.
설지주의 마구잡이 공격에 몸통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살을 에는 한기에 움직임마저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다행히 쉴 새 없이 거미줄을 뿜어대던 설지주가 어느 순간 지친 듯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놈 역시 거미줄을 무한대로 뿜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혁련위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설지주의 몸통에 연속으로 도격을 날렸다.
왕오가 보기에도 감탄할 만한 위력이었다.
퍼퍼퍼퍽!
왕오와 아이들도 혼신의 힘을 다해 설지주를 공격했다.
꾸어어어어!
설지주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기어이 혁련위의 도가 설지주의 머리를 잘라냈다.
몇 번 꿈틀거린 설지주가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아이들은 기진맥진하여 다들 동굴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한기 때문에 이곳에서 머물 순 없었다.
어떻게든 움직여서 쉴 곳을 찾아야 했다.
설지주와의 사투에서 다시 네 명의 아이가 죽고 한 명이 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다.
마땅한 구급약조차 없어 그저 지혈을 시킨 게 전부였기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나머지 아이들도 멀쩡한 아이가 없었다.
혁련위마저도 왼쪽 어깨 부분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가장 앞에서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움직여 이곳을 벗어나자!”
혁련위의 말에 아이들이 탈진한 몸을 이끌고 앞쪽의 통로로 향했다.
아이들도 이곳에 그대로 있다간 한기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반 시진쯤 전진하니 한기가 사라지고 그런대로 일행이 쉴 만한 공간이 나왔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움직인다. 수고들 했다.”
일행은 피곤한 몸을 늘어뜨리며 잠을 청했다. 만일을 대비해 순번을 정하여 불침번을 섰다.
언제 어디서 마물들이 또 공격해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해독약이 있는 곳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내일 중으로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그전에 어떤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으나, 이제 조금만 버텨내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안도감에 아이들은 오랜만에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으나, 자고 일어났으니 아마도 아침일 것이라 생각했다.―눈을 뜬 아이들은 최종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다행히 더 이상의 마물이나 함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시진쯤 걸어서 해독약이 있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두 명의 조교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목적지에 왔으니, 이제 해독약을 주시죠!”
혁련위가 조교들에게 말했다.
“다른 아이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정확히 오늘 해시 정(亥時正:오후 10시)에 해독약을 지급할 것이다. 물론 그전에 모든 아이가 도착한다면 해독약을 지급하겠다!”
손에 모래시계를 든 조교가 냉정하게 혁련위의 말을 잘랐다. 마지막 목적지는 직경이 이십 장 정도 되는 둥근 공간이었는데, 여기저기 구급약이나, 먹을 것이 마련되어 있었다.
일행은 허겁지겁 음식과 물을 먹었다. 이틀 동안의 악전고투로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시진쯤 뒤에 사마령의 일행이 도착했다. 여덟 명이 죽어 서른둘의 인원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중 장팔의 모습을 발견한 왕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장팔 역시 악전고투한 듯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허벅지의 상처는 상당히 깊어서 오른쪽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오세의 나머지 무리들도 하나둘씩 차례로 해독약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모두 여기저기 피를 뒤집어쓴 채 탈진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북궁호는 열다섯이나 되는 인원을 잃었다. 나머지 두 세력도 열 명씩 사망자가 발생했다.
다행히 두삼은 상처는 입었으나, 살아남았다.
오세에 속한 아이들만 오십 명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이 관문은 위험하고 치명적이었다.
아마도, 나머지 두 세력과 어느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은 아이들은 거의 전멸했으리라.
상처에 응급처치를 하며 피곤한 몸을 딱딱한 바닥에 맡긴 채 기다린지 두 시진쯤 지나 아신이 두 명의 아이만 데리고 목적지에 도착했고, 그로부터 한 시진쯤 뒤에 네 명만 살아남은 덕호의 무리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