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박쥐 1권 (16화)
두 무리는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일 정도로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덕호는 팔 하나를 잃었다. 아신은 오른팔과 목에 화상을 입었고, 왼쪽 옆구리가 한 치 정도 벌어져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잠시 후 입구로 한 명의 조교가 추가로 들어왔다.
그는 기다리던 조교들에게 다가가더니 뭔가 상의하기 시작했다.
반 각 정도 서로 이야기하던 조교들이 앞으로 나섰고, 아이들을 집합시켰다.
“자! 이제 모두 도착한 것 같군!”
예상대로 세력에 속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전멸한 듯했다.
한 명의 조교가 뒤쪽 벽으로 다가가더니 이곳저곳을 건드리자 벽이 반으로 갈라지며 뒤에 해독약들이 보관된 석실이 나타났다.
“지금부터 해독약을 가져가도 좋다. 하지만, 여기 있는 해독약은 백오십 병뿐이다. 살아남은 인원은 정확히 백오십칠 명이지! 그렇다면, 너희 중 일곱은 해독약을 먹을 수 없다. 너희가 서로 싸워서 일곱을 죽이든 서로 상의해 일곱을 정하던 우리는 상관치 않겠다. 다만, 서로 먼저 해독약을 차지하려 달려드는 것은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군. 그러다 해독약이 깨지거나 부서지면, 손해 보는 건 너희니까.”
아이들이 침을 삼켰다. 눈앞에 해독약이 있다.
하지만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먼저 뛰쳐나가는 놈이 모두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관문이구나!’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느냐,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내가 살아남느냐, 선택의 길은 많았으나 모두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명제가 깔려 있었다.
이중 스스로 목숨을 바쳐 다른 모두를 살리려는 놈들은 없을 것이다.
누가 더 독하게 살아남느냐, 누가 모두에게 버림받느냐의 문제였다.
버림받은 아이들은 마교의 전사가 될 자격이 없다 보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위해 가차없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독심을 기르기 위한 관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일곱만 죽으면, 나머지는 살 수 있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북궁호가 소리쳤다.
“이봐! 어차피 일곱 명만 죽으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이 상태로 싸우게 되면 피해가 상당할 거야.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가장 늦게 들어온 일곱 놈이 기회를 박탈당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아신과 덕호의 무리를 가르키는 것이다.
아신과 덕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차피 예정된 수순이었다.
일곱 무리 중 아신과 덕호의 무리가 가장 약했고, 가장 적은 인원이 살아 돌아왔다.
싸워봐야 모두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북궁호의 말에 다른 무리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순서대로 해도 가장 늦은 자들이 탈락하는 게 맞는 터였다.
아신과 덕호의 무리 대신 자신이 죽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왕오와 세 아이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미우나 고우나 같은 임무를 받은 동료였다.
하지만 네 아이들 모두 아신을 돕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 속으로 삼킬 뿐이었다.
“안타깝지만, 너희가 죽어줘야겠군!”
혁련위가 앞으로 나서서 아신과 덕호에게 말했다.
“크크크크…….”
아신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마치, 상처 입은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눈에서 혈광을 뿜어내며 아신이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결국, 너희 놈들이 우릴 먹잇감으로 여기리라 생각했다. 크크큭.”
양심에 걸리는지 고개를 돌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래서 만일을 대비해 목숨을 걸고 내가 이것을 준비했다.”
아신이 품 안에서 어른 주먹만 한 둥근 물체를 무척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그 물체는 피와 알 수 없는 끈적이는 액체로 뒤범벅되어 둥근 형체 외엔 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신이 벽쪽으로 물러서 아이들과의 거리를 벌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이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아신을 바라보았다.
혁련위와 북궁호등 오세의 우두머리들은 아신이 마지막 발악을 한다 보고, 그저 측은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헉! 독각화룡의 황산 주머니구나! 이 미친 새끼! 그 위험한 것을 가지고 오다니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모두 움직이지 마라!”
물체를 알아본 것은 한쪽에 물러서 있던 조교였다.
조교의 말에 물체의 정체를 알아차린 혁련위와 나머지 오세의 아이들이 눈을 부릅뜬채 움직임을 멈췄다.
“크크크. 맞다! 너희는 어떤 괴물을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독각화룡을 만났지! 거기서 아홉이 죽고 셋만 살아남았다! 그 와중에 얻어낸 것이 이것이다! 다행히 일행 중에 독각화룡을 알아본 아이가 있어 전멸을 면할 수 있었고, 또한, 이 물건의 위험성도 알게 되었지.”
독각화룡은 몸 길이가 이 장에 달하는 거대한 도마뱀으로, 온몸이 붉고 이마에 검은 뿔이 하나 있었으며, 등에 일렬로 나 있는 가시엔 독을 품고 있어서, 그것을 상대방에게 쏘아 목숨을 빼앗는 무서운 마물이었다.
하지만 독각화룡이 진정 위험한 이유는 입에서 내뿜는 화염 때문이었다.
전방의 넓은 범위에 내뿜는 화염은 바위를 녹일 정도로 뜨거워서, 스치기만 해도 화상을 입게 되는 무서운 무기였다.
그러니 아신의 무리가 얼마나 악전고투를 했는지 어느 정도 상상이 갔다.
무시무시한 독각화룡의 화염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는 기관(器官)이 바로 목에 위치한 황산 주머니였는데, 황산과 알 수 없는 물질이 합쳐진 액체는 공기 중에 노출되는 순간 폭발하여 화염이 되는 것이다.
독각화룡의 호흡에 섞여 나온 아주 적은 양만으로 그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데, 만일 황산 주머니가 터진다면 석실을 포함한 모든 공간이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나와 일행이 먼저 해독약을 먹겠다. 그 후에 너희끼리 싸우든 말든 그것은 내 알 바아니지! 큭큭큭. 만일 너희가 딴마음을 먹는다면, 즉시 이것을 터뜨리겠다. 물론, 조교들이 날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 물건이 땅에 떨어져 모두 함께 폭사하게 될 것이다.”
황산 주머니를 손에 든 채 아신과 두 아이가 조심스럽게 해독약이 있는 곳으로 향했으나,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네놈이 지금 해약을 먹는다 해도 나중에 살아남을 성싶으냐!”
조교가 아신을 향해 호통쳤다.
“흥! 분명 이곳에 들어와서 해약을 먹기만 하면 무슨 수단이든 인정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말을 바꾸겠다는 건가?”
조교가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암동의 통과 원칙은 해독약을 차지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인은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마인의 근본 자세다.
비겁하게 살아남았다 하여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
“좋다. 황산 주머니를 사용한 것도 너의 능력! 인정하도록 하지. 네놈은 정말,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는군. 크크큭.”
아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신과 그 무리가 살게 되면 덕호의 무리를 빼고도 세 명이 더 죽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세 명을 결정할 것인가. 기어이 해독약이 있는 석실에 도착한 아신과 그 무리가 약을 삼켰다.
몇몇 아이가 부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덕호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자신들의 무리가 저들의 첫 목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아이들이 덕호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하지!”
북궁호가 다른 무리에게 눈짓을 했다. 혁련위와 나머지 우두머리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덕호 일행에게 다가갔다.
“어디 그래 덤벼봐라 이 새끼들아! 나 혼자 죽지는 않을 테다!”
덕호가 악에 받쳐 남은 한 팔로 도를 휘두르며 아이들의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네 명이서 모두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잠깐!”
그때, 아신의 외침이 아이들을 멈춰 세웠다.
“덕호.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해독약을 먹게 해주겠다.”
갑작스런 제안에 모두 당황했다.
“대체, 네놈이 뭔데 이놈들에게 해독약을 주고 말고를 결정하는 것이냐!”
북궁호가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그로서는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아신이 황산 주머니를 들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밖에 나가면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해독약을 먹을 아이마저 지놈 마음대로 결정하려 하는 게 아닌가.
만일, 아신이 해독약을 먹을 명단에서 북궁호 자신을 뺀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이었다.
“아직 내 손에 황산 주머니가 있다는 걸 잊지 않았겠지? 그러니 지금은 내가 칼자루를 쥐었다 할 수 있겠군. 크크크. 어쩔 테냐 덕호!”
아신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덕호에겐 이것저것 따질 이유가 없었다. 아신이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좋다! 앞으로 나와 내 무리는 아신을 따르겠다!”
덕호가 주먹을 가슴에 대며 외쳤다.
“그래! 잘 생각했다. 이쪽으로 와라!”
아신도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게 되면 다른 무리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막으려면, 세력을 더 확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여서 다른 무리가 감히 함부로 도발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나머지 놈들 중에서도 지금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해약을 나눠주겠다!”
아신의 외침에 몇몇 아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제 죽어야 할 사람은 일곱이었다.
각 세력에서도 실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나 부상자들은 희생양이 될 확률이 높았다.
눈치를 보던 아이들 중 몇 명이 아신을 향해 달려갔다.
북궁호의 눈에서 살광이 일었다. 북궁호의 무리 중 세 명이나 달려 나간 것이다.
“저런! 개 같은 놈들!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당장 저 배신자 놈들을 죽여라!”
북궁호가 자신의 무리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신에게 가려던 여섯 명의 아이가 북궁호와 그 무리들의 손에 피를 뿌리며 죽었다.
처참한 광경에 아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한 명만 더 죽으면 모두 해독약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흥! 이제 한 놈만 더 죽으면 되는군! 어디 또 배신할 놈이 있으면 나와봐라!”
북궁호가 두 눈을 번뜩이며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감히 아신에게 다가갈 엄두를 못내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북궁호의 눈에 혁련위와 함께 있는 왕오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마에는 피딱지가 내려앉아 있었고 왼팔은 상당한 부상을 당한 듯했다.
‘가만!’
북궁호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그렇지 않아도 눈엣가시 같던 놈이다. 지금 여기서 놈을 제거한다 해도 크게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거기다 지금 놈은 왼팔에 부상을 당했다. 맞붙게 된다면 자신이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왕오! 어차피 네놈이나 나나 서로 받을 게 있지 않더냐! 여기서 결판을 내자! 우리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나머지 한 명은 해독약을 먹는 것이지!”
북궁호가 흥에 겨워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싸워서 그중 하나가 죽는다면 나머지 인원은 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