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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17화)
“호호호, 그거 재밌겠는데.”
사마령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모두 말을 하지 않을 뿐 속으로는 두 사람이 싸우길 바라고 있었다.
남의 목숨보단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
“왕오! 저따위 비겁한 수작에 넘어가지 마라! 네가 왼팔이 다친 것을 보고 일부러 도발하는 것이야!”
혁련위가 왕오를 붙잡았다.
하지만 괜찮다는 듯 혁련위를 밀어낸 왕오가 북궁호 앞에 나섰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기회가 되면 놈을 없애려 했다.
물론 이번 암동을 통과하며 확인한 혁련위의 무위를 생각한다면, 오세 우두머리들의 실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안다.
그동안 오세 아이들과 맞서도 충분할 만큼 강해졌다 여겼으나, 아직도 그 격차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북궁호 놈이 혁련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왕오가 죽게 될 확률이 더 높았다.
하지만 공력은 딸릴지 모르나 임기웅변과 싸움에 임하는 집중력만큼은 왕오가 앞서고 있었다.
어차피, 한번은 부딪혀야 할 놈이다.
왕오는 이 기회에 놈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라던 바이다!”
왕오가 메마른 목소리로 북궁호에게 말했다.
북궁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건방진 새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말과 동시에 북궁호가 달려 나왔다. 얄밉게도 왕오의 다친 왼쪽 팔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채앵!
왕오가 검을 들어 북궁호의 공격을 흘려냈다.
손이 찌릿하게 울릴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역시 혁련위만큼의 위력은 없었다. 해볼 만한 싸움인 것이다.
“으합!”
순간 북궁호의 오른발이 다시 한 번 왕오의 왼쪽을 공격해 왔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비난할 순 없었다. 북궁호의 입장이라면 왕오 역시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왼팔로 막을 수 없어 왕오가 뒤로 물러났다.
쉬익!
북궁호의 오른발이 왕오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며 바람 소리를 냈다. 북궁호는 집중적으로 왕오의 왼쪽을 공격했다.
왕오는 제대로 된 공격도 못해보고 밀릴 수밖에 없었다.
북궁호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고는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여기저기가 붉게 물들었다.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는 혁련위와 무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왕오의 처지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소소 역시 한쪽에 서서 주먹을 꽉 쥔 채 안타깝게 왕오를 지켜보고 있었다.
삼십여 수가 지났을 때 뒤로 밀리던 왕오가 결국 위기를 맞았다.
바닥의 튀어나온 돌뿌리에 걸려 중심을 잃은 것이다.
북궁호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북궁호의 검이 왕오의 머리를 내려쳤다.
채앵!
왕오가 오른손으로 검을 들어 간신히 북궁호의 공격을 막았으나, 무릎을 굽힌 상태인데다, 두 손으로 찍어누르는 북궁호의 힘을 한 팔로만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조금씩 북궁호의 검이 왕오의 머리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검날이 왕오의 눈앞에 거의 도달했을 때였다.
흐릿하던 왕오의 눈빛이 선명해지고 양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북궁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처음부터 너무 밀리는 왕오를 한 번쯤 의심했어야 했다.
하지만 왼팔의 부상 때문에 너무 쉽게 보았다.
북궁호의 부릅뜬 눈이 왕오의 왼팔을 향했다.
왕오의 왼팔 소매춤에서 한 자루 소도가 섬전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왕오는 북궁호의 공격을 계속 당해준 것이다. 왼팔의 상처가 깊으나, 무리하면 움직일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왕오는 왼팔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북궁호를 속였다. 피가 흥건하게 묻은 옷 때문에 북궁호가 상처의 경중(輕重)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노린 것이다.
북궁호는 자신이 왕오에게 당했음을 깨달았다.
있는 힘껏 왕오의 검을 내리누르고 있던 중이어서 갑자기 뒤로 몸을 뒤로 빼기도 힘들었다.
“이익!”
북궁호가 얼굴이 창백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채앵!
“그만하면 됐다. 내 친구를 해하게 놔둘 순 없다!”
그 순간 갑자기 혁련위가 끼어들었다.
혁련위가 북궁호의 검을 쳐내며 양 측을 뒤로 민 것이다.
왕오의 단도가 닿지 않는 거리였다.
왕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의 다잡은 북궁호를 놓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혁련위는 자신의 어깨 부상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설지주와 싸울 때도 힘들지만 사용했던 어깨다.
거기다 자신이 단도를 숨겼음도 안다.
너무도 공교로운 순간에 끼어들어 왕오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분명 마지막에 자신의 왼손에서 단도가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막은 것이다.
왕오가 차가운 표정으로 혁련위를 보았다.
“억울하겠지만, 참아라 왕오 아직 너의 상대가 아니야. 많이 다치진 않았겠지?”
혁련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왕오에게 말했다.
왼손에 숨긴 단도를 보지 못한 아이들의 눈엔 혁련위가 위기에 처한 왕오를 구한 듯 보일 것이다.
사실 혁련위는 왕오가 일부러 북궁호의 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소매의 단도가 북궁호의 가슴을 향하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는 북궁호의 죽음을 간과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던 북궁호는 오세의 사람이다.
왕오가 북궁호를 죽이게 되면, 평범한 마동이 오세의 우두머리를 거꾸러뜨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세의 권위에 상당한 흠집을 내게 될 것이다.
왕오 외에도 우두머리들에게 도전하는 녀석들이 생겨날 테고, 그것은 혁련위 자신에게도 좋지 않았다.
반면, 왕오와 북궁호의 대결을 중지시킴으로 인해, 혁련위는 비난을 무릅쓰고 위험에 처한 친구를 도와 의리를 지킨 사내가 되었다.
또한, 중재자로 나섬으로써 은연중에 북궁호나 다른 오세들 사이에서 중심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왕오는 아쉽지만 분노를 삼켜야 했다.
역시 혁련위는 만만한 놈이 아니다.
혁련위에 대한 감정을 애써 흩어 버린 왕오는 살기 띤 눈으로 북궁호를 노려보았다.
북궁호는 창백해진 얼굴로 왕오를 마주보고 있었다.
혁련위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창피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했다.
이제 왕오는 예전처럼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북궁호는 나중을 기약하며 속으로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치욕은 반드시 되갚아 주겠다!’
마음속 깊이 다짐한 북궁호가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바꾸며 앞으로 나섰다.
“혁련위, 이젠 어떻게 할 거지? 우리 싸움을 막아섰으니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것이겠지?”
북궁호가 날이 선 목소리로 혁련위에게 물었다.
“크악!”
그때 갑자기 들려온 비명 소리에 놀라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한쪽을 향했다.
사마령의 무리였다.
사마령이 검을 뽑아 자신의 무리 중 중상 입은 아이 하나를 죽여 버린 것이다.
“자, 이제 인원이 딱 맞지? 사내 녀석들이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니?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야! 빨리 해약이나 먹자구!”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천사 같은 얼굴로 오른손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든 채 미소 짓고 있는 사마령의 모습이 섬뜩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왕오는 다시 한 번 이들이 마인임을 상기시켰다.
아무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위기를 극복한다 해도 그들과는 근본적인 사고(思考)부터가 다른 것이다.
하지만 과연 현재의 자신은 이들을 욕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십칠호, 너 역시 나를 죽이고 북궁호의 졸개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죽였잖아.’
죽은 십팔호가 왕오에게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후훗, 좋아! 이제 인원이 맞는군. 다들 해독약을 먹도록!”
조교가 나서서 한 명씩 해독약을 나눠주었다. 혹시나 있을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미 시험이 끝난 이상 마동들 하나하나가 천마신교의 소중한 자원이었다.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죽어간 일곱 아이는 어느새 잊은 듯 자신이 살았남았음에 만족하고 환호했다.
아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조금씩 마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왕오는 해독약을 마시고 운기조식을 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단단히 두드려 마음속 깊은 곳으로 묻어 버렸다.
저들과 같이 되려면 더 독해지고, 더 잔인해져야 한다.
저들이 한 명을 죽이면 두 명을 죽일 것이고, 저들이 팔을 자르면 왕오는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마인들보다 더욱 마인다워야 그 안에서 복수를 이룰 수 있다.
아이들은 조교를 따라 들어왔던 곳과는 다른 지름길로 암동을 벗어났다.
밖에는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의원들과 총교령 홍탁이 대기하고 있었다.
“수고들 했다!”
아이들이 모두 나와 자리를 잡자 홍탁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비로소 마도의 전사가 될 자격을 갖추었구나! 너희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홍탁이 두터운 입술을 실룩거리며 특유의 역겨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아이들은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몸과 마음을 갖추었다.
암동은 그것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관문이었다.
암동을 통과한 아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천마신교의 전사가 될 자격을 갖춘 이들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해 상당히 만족한 모습이었다.
마동들은 천마신교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것을 이루어낸 것은 바로 홍탁 자신인 것이다.
만일 마도천하가 도래한다면 자신의 공이 적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이제 이곳 지옥곡을 벗어나 암동 북쪽에 위치한 천마제이서고(天魔第二書庫)에서 자신이 원하는 무공을 찾아 사 년간 마음껏 익힐 수 있다. 사 년의 기간이 지나면 너희는 마지막 시험을 끝마치고 진정한 마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우선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인솔자를 따라 천마제이서고로 향한다! 이상!”
말을 끝마친 홍탁이 지옥곡으로 사라지자, 아이들은 긴장이 풀려 자리에 쓰러졌다.
드디어 이 지옥곡을 벗어나는 것이다.
천마제이서고가 어떠한 곳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최소한 지옥곡보다는 나을 것이다.
앞으로 사 년간은 목숨을 건 시험도 없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고난쯤은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왕오와 네 명의 아이들도 속으로 안도했다.
이제 사 년 후면 제대로 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고, 원수에 대해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무림맹에서도 정보망을 이용하여 아이들의 원수를 찾는데 도움을 주기로 되어 있었다.
‘반드시, 놈의 심장에 검을 꽂으리라!’
왕오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지옥곡을 드디어 벗어난다는 해방감에 아이들은 그날 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난 백오십 명의 아이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광장에 집합했다.
“어제 총교령님께 들었듯이, 오늘부터 너희는 천마제이서고에서 생활하게 된다. 각자 자신에 맞는 무공을 마음껏 익힐 수 있고, 몇 분의 교령들이 대기하시며, 너희가 수련하는데 도움을 주실 것이다.”
수석 조교가 아이들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