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불량신선 1권(3화)
제1장 여기가 선계여?(3)


“아우, 저것이 무엇인가?”
평원 한복판에 커다란 항아리가 솟아오르자, 다른 다섯 신선도 슬슬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검선은 석두에게 다가와 슬쩍 물었다. 석두가 무슨 일을 하든 엮이지 말자고 모의한 여섯 신선이었기에, 그것에 대해 묻는 것조차도 은밀할 수밖에 없었다.
“아따, 형님! 뭐긴 뭐다요! 술이제, 술! 사는 데 술이 없으면 쓰겄소?”
“술? 그럼 그 천도복숭아로 술을 담갔단 말인가?”
“아, 그럼 먹지도 않는다는데 술이라도 담가야지 어디다 쓰겄소? 자자, 걱정 말고 다들 기다려 봅시다. 자자!”
석두는 걱정 없다는 듯 다른 신선들의 등을 떠밀었다.
한편, 신선들은 저마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실 그들로서도 오랜만에 맛보는 술, 그것도 천도복숭아주는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술은 마시되, 책임은 모두 부선에게 덮어씌우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들의 계획은 무리 없이 돌아갈 듯했다.
다른 신선들은 우뚝 솟은 항아리에 의문을 표했으나 그것이 부선이라는 신선이 행한 일임을 알고 신경을 끊었다.
혹여 천제의 분노를 살 만한 사고를 치는 데에 말려들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들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캬아! 벌써부터 향이 장난 아니구마이! 안 그렇소? 아따, 빨리 먹어 보고 싶은데 아직 덜 익은 것이 분명하단 말이여.”
석두의 말 그대로였다. 항아리에서 풍겨 나오기 시작한 복숭아주의 달콤한 향은 선계 가득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 향이 짙어짐에 따라 홍조를 띤 채 항아리를 돌아보는 신선들의 숫자는 하나 둘 늘어 갔다.
물론 다들 겉으로야 신선이 어찌 술을 마시겠냐며 손사래를 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복숭아주의 향이 시큼하게 변하자, 석두는 항아리 위로 올라섰다.
“아따! 완전히 제대로 되어 부렀구만! 형님들, 어서 와 보시오!”
여섯 명의 신선은 주위의 시선을 살피며 항아리로 다가섰다. 하지만 이내 신선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항아리 쪽을 의식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만이 아니었다.
“모든 신선들이 항아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역시 비선일세.”
가장 머리가 비상한 비선과 그와 죽이 잘 맞는 검선이었다. 아직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는 나머지 네 신선에게 비선은 입을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며 계책을 속삭였다.
“우리는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누가 보아도 참지 못할 만큼 맛있게요. 아셨습니까?”
“아, 알았네. 그것만큼은 걱정 말게.”
협선과 광선, 화선, 그리고 병선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도 흐르는 군침을 참느라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따!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요? 흐흐흐, 오늘은 먹고 죽어 보자, 이것이지라!”
“하지만 선계에서 음주는 아니 된다 알고 있네.”
신선들은 각자 신선술로 술잔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비선은 짐짓 거부하는 척하며 슬쩍 잔을 들어 올렸다. 석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상관없다는 듯 호리병을 들어 올렸다.
“걱정 마시라 하지 않았소! 혹여 천제께서 노하신다면 그 죗값은 아우가 다 받을 테니 걱정 말고 드시여! 자자! 한 잔씩 주욱 들이켭시더! 그렇지, 그렇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잔을 들이대는 신선들이었다. 죗값을 자신이 치르겠다고 호언장담했으니 더 이상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비단 비선과 검선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캬아!”
“크어!”
“정말 맛있구먼!”
게 눈 감추듯 한 잔을 비워 낸 신선들은 복숭아주의 그 새콤달콤하고 쌉싸래한 맛에 중독되어 버린 듯했다.
두 잔째까지 일거에 들이켜 버린 그들은 어느새 붉게 변한 볼을 자랑하듯 벌떡 일어섰다.
“먹고 죽읍시다!”
“오오!”
검선이 외치자 석두를 비롯한 다른 신선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잔을 들어 올렸다.
꿀꺽!
“마, 맛있어 보이지 않소?”
“허, 허험. 그, 그래도 어찌…….”
그런 그들의 모습은 다른 신선들의 피를 말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곳곳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선들 중에 무인이 아니었던 이들은 극히 드물었고, 무인치고 술을 싫어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개중에는 몇백 년 만에 술 냄새를 맡아 보는 이도 있었으니, 그들이 느끼는 유혹은 도를 깨우칠 때보다 결코 덜한 것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자, 한 잔 더 갑시다! 아직 여기 모든 신선들께서 드셔도 모자람 없을 만큼 남아 있습니다!”
석두의 외침이 그들의 귀에 쐐기를 박듯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정적인 한마디.
“캬아아! 천도복숭아로 담근 술이라 그런지 맛이 더욱 특별하구먼! 크허허!”
도를 깨우친 신선들이 이리 사악할 수 있을까. 검선은 마치 다른 신선들에게 광고라도 하듯 큰소리로 외치고는 술을 들이켰다. 사실, 정말 술 맛이 좋기도 했다.
“흐, 흐흠. 나도 한 잔 줄 수 있겠소, 부선?”
결국 한 신선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석두에게 다가왔다. 석두는 기다렸다는 듯 술잔에 복숭아주를 가득 부어 주었다.
꿀꺽! 꿀꺽!
“파하―!”
모두의 시선이 술을 들이켜는 신선에게로 모아졌다. 이윽고 단번에 한 잔의 술을 들이켠 신선의 입에서 달콤한 복숭아 향이 뿜어져 나오자, 신선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석두에게 달려들었다.
“먹고 죽읍시다!”
비선의 그 말이 딱 들어맞는 하루였다.

구구구!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하얗고 부드럽게 흐르던 구름들의 기운이 순간 변하기 시작했다. 성이 난 듯 회색빛으로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구름. 그리고 그 사이로 새하얀 빛줄기가 뿜어져 올랐다.
개문(開門). 하늘의 문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의 문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더라도 일정 기간마다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다만, 그럴 때는 이미 신선의 몸이 되어 속세의 모든 것을 초월한 이들만이 선계로 올라올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의 경우가 그랬다.
크르르릉!
열린 하늘의 문으로 청록색의 거대한 것이 솟아올랐다. 뱀처럼 긴 몸체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신물. 바로 청룡이었다.
선계에 들어온 청룡은 크게 포효하며 하늘의 문 앞에 몸을 숙였다. 마치 주인을 맞이하는 문지기 같은 모습이었다.
후우웅!
하늘의 문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마침내 청룡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의 장발을 가진, 붉은빛에 용이 그려진 용포의를 입은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
그는 하늘의 모든 법도를 다스리는 자, 바로 천제(天帝)였다.
천제가 선계의 구름에 발을 내딛자 청룡은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창공에서 천제의 위를 돌며 천제의 호위를 하기 위함이었다.
천제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아마 자신을 마중 나온 신선들을 보기 위함일 것이었다.
“음?”
이내 천제는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마중 나왔으리라 생각한 신선들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천제의 귀로 들려온 것은 왁자지껄한 소란과 유난히 크게 들리는 외침이었다.
“아따! 신선님들께서 통이 크시구마이! 자자, 한 잔 더 받으시우! 쭈욱, 쭈욱! 그렇체에!”
천제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캬아아! 죽이는구먼!”
“끌끌끌, 제선께선 생전에 한 술 하셨나 보구려!”
“천상의 안주와 천상의 술! 그야말로 극락이로구나!”
천도복숭아를 안주 삼아 천도복숭아주를 먹고 있는 수백 명의 신선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것은 이십 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신선과 그 주위를 맴도는 여섯 신선이었다.
“어라? 여기 한 분 더 계셨네이? 안 오시고 뭐 하고 있는 겁니꺼어?”
이미 거나하게 취한 석두는 한쪽 구석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신선을 발견했다. 맨 정신이었다면 그 신선의 옷차림이나 머리색이 자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겠지만, 이미 술이 머리끝까지 올라 사물을 제대로 판가름할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술을 마시지 않는 신선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신선에게는 술을 마시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섯 신선들은 다른 신선들의 사이를 누비며 신선술로 만든 호리병으로 술을 따라 대고 있었다. 그러니 어디 석두와 석두가 다가가고 있는 상대에 대해 신경을 쓸 수 있겠는가.
“아따! 이 신선께선 되게 젊으시네이! 히끅! 자, 자! 한 잔 받으소, 자!”
천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에게 다가온, 술이 얼큰하게 취한 이 신선은 자신이 천제라는 것을 알아보지도 못할뿐더러 도리어 자신에게 술을 권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천제는 엉겁결에 그에게서 술잔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천제라 해서 이곳의 신선들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천제나 염라대왕을 놀려먹는 인간의 이야기, 짐승의 이야기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눈에는 한없이 바보같이 보여도, 도를 깨우치고 인간과는 다른 존재인 그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아따! 형님이라 불러도 되겄소? 자자, 한 잔 받으시오, 형님!”
석두는 천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천제의 손에 들린 술잔에 복숭아주를 가득 따라 주었다.
“아, 고, 고맙네, 아우. 잘 마시겠네.”
천제는 크게 당황했다. 한편으로는 내심 반갑기도 했던 터였다. 선계, 천계, 지옥을 통틀어 자신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이를 만나기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이렇게 살갑게 대해 준 이는 또 처음이지 않던가.
더군다나 이런 왁자지껄한 술판을 난생처음 접해 보았기에 천제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꼴깍! 꼴깍!
석두는 술이 얼큰히 취해 발그레하게 변한 얼굴로 술을 단박에 들이켜는 천제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술판에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그였다. 게다가 살면서 한 번도 맛볼 수 없었던 맛 좋은 술과 맛 좋은 안주까지 있으니 오늘 먹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자, 형님! 이쪽으로 오시면서 한 잔 더 받으시어이! 옳지!”
“크으―! 고맙네, 동생.”
어느새 석두에게 자연스럽게 하대를 시작한 천제였다.
“어이야―!”
“어이야―!”
술판은 이제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신선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깨동무를 하며 노래를 불러 댔고, 그들의 중심에는 당연히도 석두와 천제, 그리고 여섯 신선이 있었다.
평소의 신선들이라면 천제를 단박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그것도 주량 이상을 마셔 버린 그들에게 이미 사람을 제대로 식별할 능력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천제도 마찬가지였다. 선계에서는 금주(禁酒)의 법칙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그것을 폐지할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크르릉.
다만, 하늘 위의 청룡만이 그 장면을 불안하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따, 형님! 그런데 그동안 어디 계시었소이? 처음 뵙는 것 같은데!”
“하핫, 동생! 내 일이 바빠 자주 들르지 못했네. 내 앞으로 동생을 위해서라면 자주 선계에 들름세!”
“하핫!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형님이 천제라도 되시는 모양이우? 까짓, 천제라 해도 상관없소! 한 번 형님은 죽을 때까지 형님이제이!”
“그 말 잊지 말게! 하하핫!”
이렇게 천제(天帝)와 의형제를 맺어 버린 석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