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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신선 1권(19화)
제8장 무식이 죄는 아니여(1)
“그런데 그렇게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그냥 나와도 상관 없겠어라?”
석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옥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옥녀는 한 점의 걱정도 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큰일이야 있겠어요. 부선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많은 무인들에 달려들수록 저로선 좋은 일이니까요. 호호홋!’
정작 중요한 뒷말은 마음속으로 꿀꺽 삼킨 옥녀는 부선을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허리춤에 매인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무엇이여? 물?”
“한번 드셔 보시어요.”
석두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옥빛 호리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옥녀의 표정이 딱히 의심이 가는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뚜껑을 따자 퍼져 나온 향긋한 냄새에 두말할 것 없이 호리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 오메? 이거 신선주 아녀! 이걸 어디서 가져왔어라?”
‘선계에 갔을 때 조금…….’
그의 질문에 옥녀의 낯빛이 조금 하얗게 질렸다. 선계에 내려갔을 때 남몰래 슬쩍해 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호홋, 시, 신선주의 맛이 워낙 유명하여 천제께서 선녀들에게도 맛보라 주신 것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근심이 좀 풀리십니까?”
“캬아! 역시 이 맛! 이렇게 맛있는 술을 맘껏 먹을 수 있었던 때가 좋았는데 말이지라. 아따! 근심이고 뭐고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만 같네이!”
단숨에 호리병 안에 담긴 신선주를 들이켠 석두는 금방이라도 우화등선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옥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소림에 도착해서도 그 기세가 변함이 없으시길 바라요. 후훗.”
“와하하! 걱정 마셔라! 지가 이래 봬도 인내와 끈기 하나는 알아준당께요? 와하핫!”
석두는 마냥 기분이 좋은지 희희낙락하며 외쳤다. 하지만 석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소림의 나한들이 호락호락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중원 오악 중 중악(中岳)이라 불리는 숭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솟아 있는 세 개의 봉우리는 숭산 아래의 마을인 등봉(登封)에서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일부러 숭산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든 듯한 악산객잔(岳山客盞)의 이층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어따, 태산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줄 알았는데 저걸 보니 그렇지도 않네이.”
석두는 만두를 입에 쑤셔 넣으면서도 연신 숭산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 가운데 봉우리가 준극(峻極)이에요. 높을 만큼 높다는 이름답게 가장 험준하지요. 그리고 그 양쪽으로 태실(太室)과 소실(小室)이 위치하고 있어요.”
빼어나지는 않지만 웅장한 멋이 있는 숭산이다. 옥녀도 그 멋에 한껏 빠져 있었다. 천계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니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소림사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거여라?”
만두를 입에 넣고 한참 우물대다가 꿀꺽 삼킨 석두는 아까부터 그것이 궁금했던 듯 물어 왔다. 옥녀는 소실이라 불린 조금 낮은 봉우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소실의 북쪽은 낮고 평평해서 사찰이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해요. 그래서 소림사도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합니다. 왜요? 벌써 긴장되시나요? 후훗.”
옥녀는 연신 소실을 살피는 석두의 표정이 익살스러웠는지 웃음을 지었다. 석두는 쑥스럽다는 듯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지가 이런 델 와 본 일이 있어야 알 것인디, 신기해서 그러지라. 아, 그런데 선녀님은 이런 것을 어찌 이리 잘 아셔라?”
뜨끔!
국수 국물을 마시던 옥녀는 순간 움찔 굳을 수밖에 없었다. 천계의 자미궁에서 무림과 관련된 모든 서적들을 통달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보통 선녀들은 자미궁으로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고, 그것을 부선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석두가 그런 것을 알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호, 호홋. 선녀의 기본 소양이랍니다. 그보다 앞의 만두 어서 드시지 않으면 식겠어요.”
이 정도로 허둥지둥 말을 돌리면 무엇인가 눈치를 챌 만도 하련만, 석두는 그녀의 말에 빙긋 웃으며 남은 만두 하나를 집어 들 뿐이었다.
옥녀로서는 석두가 단순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소림사의 영향인지, 악산객잔에서 나오는 음식들에서는 고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만두에도 야채만 들어 있었으니 더 볼 것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숭산에는 수많은 사찰이 위치하고 있었기에 등봉에는 각지에서 온 중들이 묵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옥녀의 아름다움은 불도를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도 통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가 지나간 뒤에는 염불을 외는 이들의 목소리가 가득 들려왔던 것이다.
물론 옥녀도 그런 것을 눈치 채고 있었기에 행실 하나하나에 더욱 조심을 기하고 있었다. 아직 도를 깨치지 못한 이들일수록 심마에 빠지기 쉽고, 자신으로 인해 자칫 큰 거목이 될 수 있는 이들이 심마에 빠져 그동안의 수련이 도루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쿠웅!
“꺄아악!”
계산을 하고 객잔 밖으로 몸을 돌리던 옥녀는 무엇인가와 정면으로 충돌해 뒤로 풀썩 넘어졌다. 아무리 주위에 신경을 쓰느라 집중이 흐트러졌다지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다니 놀랄 일이었다.
“이, 이익……!”
게다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자신의 위로 풀썩 엎어진 그 인형의 손이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옥녀는 뺨이라도 쳐 줄 양으로 고개를 내렸다가 깜짝 놀랐다.
“어, 어머나?”
“흠? 흘흘. 이거 소승의 눈이 흐려 부딪치고 말았소이다. 괜찮소?”
옥녀와 부딪친 것은 적어도 환갑은 되었을 법한 노승이었다. 깡마른 얼굴과 팔다리에 눈빛에는 어찌나 장난기와 음흉함이 묻어나던지 마치 너구리를 연상시켰다.
“괘, 괜찮아요!”
옥녀는 여전히 자신의 허리를 더듬고 있는 노승을 화악 밀쳐 내고는 벌떡 일어섰다. 아무리 자신의 미모에 눈이 멀었다지만, 이런 땡중이 꼬일 줄은 그녀도 몰랐던 것이다.
“어, 어이쿠!”
하지만 괜히 너구리 같은 노승이 아니었다. 노승은 옥녀가 민 것에 비해 훨씬 더 강하게 뒤로 넘어지더니 뒹굴기 시작했다.
“스, 스님! 괜찮아라?”
석두가 놀라서 달려들었다. 노승은 짐짓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처럼 인상을 쓰며 외쳤다.
“허리, 허리……!”
“…….”
잠시 후, 석두와 옥녀는 자신들의 건너편에서 열심히 만두를 집어 먹고 있는 노승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물론 노승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노승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이 한없이 미안하고 죄송스러워 더 먹으라고 권하는 듯한 석두의 눈빛과는 달리 옥녀는 이를 뿌득 갈며 은은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 너구리 같은 땡중. 그런데 이상하게 현기가 감돈단 말씀이야.’
도를 수련한 이들일수록 자신의 기운을 더욱 깊이 감추는 법이다. 그런 것은 선녀라 할지라도 쉽게 알아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노인도 그러했다. 전혀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공허한 듯. 이런 경우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수련이 아주 깊어 우화등선이 멀지 않은 이이거나…….
‘땡중이지, 뭐. 후우. 하계로 내려와서 기운이 허해진 탓일까. 이런 일도 다 겪게 되네.’
단번에 상대를 땡중이라 치부해 버린 옥녀는 느릿느릿 만두를 씹고 있는 노승을 다그치기라도 하듯 바라보았다.
“하아―. 이곳의 만두는 몇 번을 먹어도 맛이 좋습니다. 고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어찌 이런 맛을 내는지…….”
‘오호라, 이런 짓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란 말이지.’
노승은 여간 허기졌던 게 아니라는 듯 말했다. 속으로 연신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옥녀와 달리 석두는 노승의 말에 재빨리 대꾸했다.
“그렇지라? 아이고, 연세도 있으신 분이 왜 굶고 다니셨소. 지가 돈은 얼마 없지만도 스님이 배불리 드실 만큼은 가지고 있으니 걱정 말고 드시어잉!”
“허허, 고맙네. 보아하니 무공을 배운 이는 아닌 듯한데 원래 등봉에 살고 있나?”
노승은 만두를 하나 더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석두는 고개를 저으며 재빨리 대꾸했다. 옥녀가 무어라 말릴 새도 없는 신속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숭산으로 가고 있지라. 헤헷. 원래는 태산에 살고 있었지만 말이여.”
“숭산에? 그곳에는 험악한 무승들만 있을 터인데 뭣 하러 자네 같은 이가 가려 하는지 모르겠구먼. 흘흘. 그러고 보니 옆의 보살께서는 미모가 매우 출중하신데, 혹 자네가 모시는 집안의 아가씨인가?”
노승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고는 옥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쯤 되니 옥녀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터. 그녀는 얼굴 가득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호, 호홋. 아닙니다. 이분은 제 지아비 되시는 분이니 제가 이분을 모시는 것이 되겠지요.”
“호오? 그렇습니까? 자네, 능력이 대단하구먼. 내가 본 보살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이를 아내로 두고 있으니 말일세!”
노승은 진심으로 놀란 듯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석두는 부끄럽다는 듯 뒷목을 긁적였다. 게다가 노승의 말에는 옥녀에 대한 은근한 칭찬도 묻어 있었기에 옥녀 또한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하아, 잘 먹었네. 자네, 이름이 어찌 되나?”
“지 말이여? 석두라 하지라. 그러고 보니 지도 스님의 존함을 모르네요이.”
일 인분으로도 모자라 이 인분의 만두까지 깨끗하게 먹어 치운 노승은 그제야 살 것 같다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순박하게 웃고 있는 석두를 능글맞은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땡중의 이름을 알아서 뭣 하겠나, 흘흘. 잘 먹었네. 인연이 되면 또 봄세.”
“어라? 벌써 가시려 허요. 저희는 오늘 하루 이 마을에서 묵을 것인데, 이리 헤어지면 아쉬운데…….”
노승이 미련 없이 일어서자 석두는 못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새 그 노승과 정이 들어 버린 것도 있지만, 석두의 성격상 워낙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흘흘, 몰래 나온 것이라 말이야. 인연이 닿으면 또 볼 수 있을 테니 걱정 말게. 그리고 아내를 잘 모시도록 하게. 참 좋은 분을 안사람으로 두었구먼. 흘흘.”
“아이고, 별 말씀을. 그럼 나중에 꼭 또 뵙길 바라겠어라. 헤헤.”
석두는 뒷목을 긁적이며 답했다. 노승은 가래 끓는 웃음을 지으며 객잔 밖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노승이 사라졌음에도 옥녀는 한참 동안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따. 선녀님께서도 스님이 가신 게 못내 섭섭하신 모양이어라?”
“아? 아, 아닙니다. 이제 마을 구경도 좀 해 볼까요?”
석두가 말을 걸자 옥녀는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듯 빙긋 웃으며 일어섰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옥녀의 머릿속에는 좋은 분을 안사람으로 두었다 말하는 그 노승의 깊은 눈빛이 맴돌고 있었다.
‘그 눈빛……. 도를 깨우친 이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어.’
석두의 손에 이끌려 객잔 밖으로 나가면서도 그 너구리 땡중의 정체가 그저 파렴치한만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는 옥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