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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신선 1권(22화)
제8장 무식이 죄는 아니여(4)
석두와 옥녀는 현배의 안내를 받아 안뜰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은 유릉 대사가 거주하는 방장실의 뒤편에 위치한 곳으로, 가끔 귀한 손님들을 접대할 때 이용하는 장소였다.
“흘흘. 그래, 무상거사와 인연이 닿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무상거사? 그것이 무슨 말씀……. 억!”
석두는 유릉 대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다가 발에서 느껴지는 뜨끔한 고통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옥녀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오든 수긍하고 넘어가라는 의미가 가득 담겨 있지 않은가.
“아, 하, 하핫. 그래라. 지가 원래 발이 좀 넓지라.”
아무리 눈치가 없는 석두라도 그리 절박한 눈빛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석두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림에 찾아온 이유가 십팔나한진을 통과하기 위해서라고?”
이내 현배가 차를 내오자 유릉은 차의 향을 음미하며 물어 왔다. 석두는 옥녀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진을 통과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네. 나한(羅漢)들은 소림에서도 내로라하는 최고의 절정고수. 그들의 연수합격과 기관진식을 상대로 하여 살아오는 것만으로도 힘들 터인데, 정말 괜찮겠는가?”
꿀꺽!
석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열여덟 명의 나한들이 얼마나 고수인지는 들어 본 적이 없어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유릉 대사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만나 본 어떤 무인들보다 강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석두는 자신의 허리춤에 굳건히 매인 신력거부를 내려다보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것을 다시 선계에 가져다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자신이 도를 깨우치기로 한 이상 선녀인 옥녀의 말을 잘 들어야 하기도 했다.
“할 것이어라. 지는 해낼 수 있지라.”
석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릉 대사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미를 알기 힘든 웃음을 지었다.
“흘흘. 십팔나한들에게 도전하기 위해서는 녹옥불장이 필요한데 자네에게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구먼.”
녹옥불장은 소림의 신물로 녹옥이라는 귀중한 보석으로 만든 불장이었다. 십팔나한진에 도전하기 위해 녹옥불장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은 십팔나한들에게 도전하는 이를 걸러내기 위한 의미가 훨씬 컸다. 녹옥불장이 보관되고 있는 것은 백의전. 그곳의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삼 갑자의 내공이 필요하니, 녹옥불장을 가져오려면 절정고수의 반열에 올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유릉 대사는 자신이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석두가 백의전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석두가 삼 갑자의 내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대환단과 소환단을 그만큼 복용하고도 산 이상, 지금은 훨씬 더 심후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으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객당으로 돌아가 기다리도록 하게. 혹 또 배가 고프면 그땐 동자승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된다네.”
이야기를 마치며 당부하는 유릉이었다. 석두가 또 무슨 사고라도 칠까 노심초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걱정 마셔라! 지가 무슨 사고라도 쳤대요? 헤헷!”
그런 유릉 대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답하는 석두였다.
석두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 옥녀는 조심스럽게 유릉 대사에게로 다가왔다.
“저…… 대사, 이것을…….”
옥녀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차를 음미하는 유릉 대사에게 품에 숨기고 있던 것을 꺼내 놓았다.
“이것이 무엇인가?”
“감천수이옵니다. 무림에서는 공청석유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들었습니다.”
공청석유! 한 방울만 복용해도 일 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영약이 아니던가! 선계의 곳곳에 시냇물처럼 흐르는 감천수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내 유릉 대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옥녀의 손에 들린 것은 손바닥만 한 호리병. 그 안에 가득 담긴 것이 공청석유란 말인가!
“이, 이런 것을 어찌 구했는가.”
‘천계에서는 식수로 쓰는데…….’
무척이나 놀라는 유릉 대사를 보자 도리어 미안해지는 옥녀였다. 그저 지상에 와서 자신이 마시기 위해 가져왔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사실 옥녀도 공청석유라 불리는 감천수가 지상의 무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영약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경악할 만큼 굉장한 영약이었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저희 서방님께서 저지른 일이 이것으로 보상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비록 모자라더라도 너그러이 받아 주시어요.”
유릉 대사는 그제야 옥녀가 주는 감천수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대환단과 소환단을 공청석유와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결코 손해가 아니지 않은가.
“내 이런 것을 받고자 함이었다면 이미 이전에 자네의 지아비에게 큰 벌을 내렸을 것이라네. 대환단과 소환단은 또 만들면 되니 그리 심려치 말게나.”
하지만 유릉은 그 호리병을 밀어냈다. 그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물욕을 제어할 수 있을 만큼 수행이 깊은 유릉이었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리 수행이 깊은 유릉이 가지고 싶은 욕구를 느낄 만큼 공청석유가 진귀한 영약이라는 말이 되었다.
“아닙니다. 소녀를 보아서라도 꼭 받아 주시어요. 그럼 소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지만 옥녀도 단호했다. 그녀는 끝내 유릉 대사의 손에 그 호리병을 쥐어 주고는 몸을 돌렸다.
“대단한 그릇이로다. 아내의 그릇이 저리 크니 그 남편 또한 누구보다 크게 자라겠구먼. 흘흘.”
지객당으로 몸을 돌리는 옥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대는 유릉 대사였다.
수많은 무승들과 속가제자들이 본관 앞 상석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엇 때문에 소집을 한 것인지 의아해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무엇인가 중대한 발표가 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마침내 상석 위로 유릉 대사와 유릉 대사의 직속 사제들인 오대 법승이 올라섰다.
유릉 대사와 오대 법승이 함께 무엇인가를 선언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무승들은 잔뜩 긴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릉 대사가 입을 열었다.
“나한전을 개방하기로 논의되었음을 선포하오!”
“……!”
유릉 대사의 선포가 끝나자 무승들은 놀란 표정으로 저마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나한전은 몇십 년에 한 번 주기 없이 개방되는 곳으로 그 안의 수많은 기관진식과 소림 최강의 십팔나한들과 무를 겨루게 되지 않는가. 게다가 그곳을 모두 무사히 통과하고 나면 차기 십계십승(十戒十僧)이 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가.
십계십승이라 하면, 방주와 나한들을 제외하고 소림에서 가장 높은 위치. 무승들의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생각하오만, 나한진에 도전할 수 있는 이는 두 명뿐이오. 하나, 이번에는 한 명의 도전자가 이미 정해졌으니, 남은 한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여야 할 것이오!”
“뭣이?”
이내 무승들의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역대 나한전의 출전자가 미리 정해져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데다가 그 참가자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도전자는 누구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이내 무승들 중 한 이가 손을 들며 외쳤다. 다른 이들보다 기골이 장대한 것이 무승들 중에서도 특출한 이인 듯했다.
“으음.”
유릉 대사는 침음성을 흘렸다. 저 무승의 법명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본저(本?). 근본을 쌓아 가는 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의지와 무공이 다른 이들보다 특출했다. 누군가가 물어 오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으나 하필 저 아이란 말인가. 그는 석두 외에 또 다른 도전자가 저 아이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들의 뒤편에 있지 않은가.”
유릉 대사는 다소 허무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이내 무승들과 속가제자들의 시선이 그들의 뒤편에 서 있는 석두와 옥녀에게로 모여들었다.
“이, 잉?”
이내 노골적인 적대심과 비아냥거림, 의문이 담긴 시선들이 자신에게 향하자, 석두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무승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처음에는 그를 관찰하는 듯하다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거나 혹은 적대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분명 저 흰 옷의 시주께서 도전하시는 것이 맞습니까?”
본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보기에 석두의 몸에서는 한 점의 내기도 느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약해 보였던 것이다.
“분명 그가 맞네.”
“…….”
이내 사방에서 믿을 수 없다는 웅성임이 터져 나왔다. 하나같이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지는 않으나 유릉 대사의 결정에 수긍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쯤 되자 본저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풀썩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소승이 수행이 부족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전자의 강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소승과 또 이곳의 모든 사제, 사숙 분들이 납득하실 수 있는 물증을 보여 주십시오!”
“놈! 방장께 말버릇이 그것이……!”
유릉 대사의 뒤에 서 있던 팔척장신의 무승이 발끈하여 앞으로 나섰다. 십계십승의 한 명이자 망어계(妄語戒)의 법도를 다스리는 망어승이었다. 당장이라도 본저를 찢어 죽일 듯 앞으로 나서던 망어승의 앞을 유릉 대사의 팔이 막아섰다.
유릉 대사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본저의 눈빛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좋네. 그럼 내 가장 확실한 물증을 보여 줄 터이니 따르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본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의 다른 무승들도 말은 없었으나 하나같이 그의 뜻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럼 자네가 직접 저 시주와 손을 섞어 보게. 자네가 이긴다면 내 두말 않고 첫 번째 도전자의 자격을 자네에게 주도록 하겠네.”
“예?”
본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저런 한주먹 거리도 되어 보이지 않는 사내와 손을 섞으란 말인가!
한편, 그의 말에 경악한 것은 본저만이 아니었다. 석두 또한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흐, 흐미! 저 스님은 엄청 강해 보이는디 나보고 어쩌란 말인감!’
사실 석두의 눈에 들어오는 본저의 모습은 그야말로 나찰과도 같았다. 불도를 수행하는 스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끝이 위로 솟은 날카로운 눈썹과 투기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그리고 단단한 몸집은 무척이나 위압적이고 강해 보였던 것이다.
“부선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상대입니다.”
그때 그의 뒤에서 옥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석두로서는 답답할 뿐이었다. 어떤 면을 보아도 자신이 유리하다 생각되지 않는데 옥녀는 언제나 여유 만만이지 않은가.
“하, 하지만…….”
“손속에 사정을 두시길 바랍니다. 부선께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정작 옥녀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옥녀는 저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투지를 뿜어내고 있는 땡중이 불쌍하기만 했다. 그가 석두에게 일말의 타격을 줄 리도 없을뿐더러 자칫하다간 석두가 본의 아니게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도, 도대체 뭘 믿고 그리 여유로우실까나. 에효…….”
옥녀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음을 꿈에도 모르는 석두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지만 말이다.
팽하건이라는 망나니는 비교도 되지 않는 투기와 위압감. 옥녀의 노력에 의해 그간 피어올랐던 석두의 자신감이 다시 금세 꺼질 듯 줄어들고 있었다.
“결정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본저는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방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질 일은 만에 하나라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흘흘. 여부가 있겠는가. 상석 위로 올라오게. 시주께서도 어서 오시게.”
유릉 대사도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무상거사의 제자들인 데다가 그만큼의 대환단과 소환단을 복용하고도 까딱 없이 일어났다. 어쩌면 자신이 저 석두라는 이의 공력을 읽어 낼 수 없는 이유가 그만큼 순수하고 깊은 공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본저 정도의 무승에게 진다면 십팔나한진에 들어간다 해도 살아나올 가능성이 없었다. 이 비무로 석두의 진정한 무위를 다른 무승들에게 알리고, 또 어느 정도 읽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유릉 대사였다.
“흐미, 어찌 일이 이렇게 풀린다냐.”
석두는 미적미적 상석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의 힘을 믿으세요!’
우연일까. 석두는 자신의 머릿속에 옥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수십 번 해 주었던 그 말이 이런 순간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해 보는 거여. 까짓, 죽으면 죽는 것이제.”
석두는 이를 악물었다. 옥녀의 말대로 자신을 믿어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흠!”
크게 콧바람을 한번 뿜어낸 석두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기세로 상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