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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신선 1권(23화)
제8장 무식이 죄는 아니여(5)
후우웅.
바둑판을 늘려 놓은 것 같은 모습의 상석 위는 석두의 생각보다 훨씬 넓을 뿐만 아니라 높아서 위에 올라서자 상석 아래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작고 멀게 느껴졌다.
석두의 반대편에는 본저가 기수식을 취하며 석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석두가 준비할 시간을 주려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석두는 기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을 배운 적이 없었다. 검선에게 구룡검법(九龍劍法)의 모든 절기를 들었으나 그저 머릿속에 그 구결이 들어 있기만 할 뿐, 의지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우웅!
이내 상석 위가 투지와 살기로 가득 찼다. 석두의 허리춤에 맨 신력거부도 그 기운을 느꼈는지 진하게 울어 대기 시작했다.
“후우―.”
석두도 그 살기들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말 또렷이 느끼고 있었다. 평소라면 당장에라도 꽁무니를 빼고 도망갔을 법한 어마어마한 투기와 살기.
그러나 이번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왠지 나서서 싸워야 할 것만 같았다.
상석 위에 올라섰기 때문일까, 이곳에서 전의를 불태웠던 이전의 많은 무인들의 의지가 석두에게 전해진 것인지도, 혹은 허리에 매인 신력거부가 그에게 투기를 전해 주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주께서 먼저 오지 않으시면 소승이 먼저 출수하도록 하겠소!”
마침내 본저가 먼저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는 소림오권(少林五拳)을 주력으로 연마해 온 뛰어난 무승이었다. 소림오권 중 하나이며, 호랑이를 본떠 만들었다는 호권연골(虎拳練骨)의 수행은 특히 뛰어났다.
“흐아압! 흑호시조(黑虎試爪)!”
후우웅!
본저는 삽시에 석두의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이내 호랑이의 발톱처럼 움켜쥔 그의 주먹이 석두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석두는 평소와는 사뭇 그 기세가 달랐다. 석두는 어설프지만 빠르게 그의 주먹을 피해 냈다.
‘어, 어디로 공격이 올지 알 것 같어!’
석두는 스스로도 자신의 능력에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저의 손에서 이글거리는 공력이 손에 잡힐 듯 보였고, 그 진기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후웅! 후웅! 후우웅!
“이익!”
본저는 연달아 휘두른 주먹이 번번이 허공을 가르자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석두의 움직임이 빨랐을 뿐만 아니라 정형화된 초식도 없이 마구잡이로 피해 대고 있었기에 초식을 이어 나가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렇다면 소승에게도 생각이 있소이다!’
“차아앗! 호장파풍(虎掌爬風)!”
콰아앙!
크게 한번 발경을 내질러 석두를 뒤로 밀어낸 본저는 이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몸의 힘을 최대한 빼고 수 발의 장력을 뿜어내며 덤벼 왔던 것이다.
“흐, 흐미!”
간신히 자세를 다잡았던 석두는 이내 자신의 주위를 감싸듯 뿜어져 나오는 장력을 보며 헛바람을 삼켰다.
분명 진기가 어디로 뿜어져 나올 것인지, 그로 인해 주위에 분산되어 있는 자연의 기운들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눈에 보이건만 어느 곳으로 피할지가 암담한 것이었다.
“하, 하는 수 없구먼!”
석두는 양팔을 들어 올렸다. 어찌 될지는 모르겠으나 자신도 기운을 끌어 올려 공격을 막아 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흰빛의 기운들이 석두의 팔을 감싼 순간.
콰아앙!
본저가 뿜어낸 장력이 석두의 팔과 어깨, 복부를 난자하듯 터져 나갔다. 그 안에 담긴 기운은 일 갑자에 육박하는 것이었기에 주위에서 구경을 하는 무승들조차 손에 땀을 쥐었다.
“허, 헉!”
본저는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전신 공력을 담아 내지른 장력에 난자당하고도 석두는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어, 어라?”
한편, 석두는 크게 난감해 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기운을 끌어 올렸다 해도 어마어마한 충격이 온몸을 엄습해 오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저 가볍게 건드린 정도로 느껴졌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우웅!
허리춤의 신력거부가 거세게 울어 대었다. 그래서일까, 석두는 자신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더욱 용솟음치고 있음을 느꼈다.
“아, 아니!”
“저건? 설마!”
그런 석두의 모습에 무승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석두의 양팔에 맺힌 희고 강건해 보이는 기운은 강(|)의 기운인 권강(拳|)이 틀림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후우우―.”
석두는 길게 호흡을 내뿜으며 본저를 바라보았다. 그와는 이 장 정도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나 지금이라면 눈 깜빡할 사이에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우웅!
허리춤의 신력거부가 크게 울부짖었다. 그 때문일까, 석두는 몸속에서 진기가 주체할 수없이 용솟음침을 느꼈다.
“우오오오!”
콰르르르륵!
석두의 입에서 천지를 날려 버릴 듯한 사자후가 뿜어져 나왔다. 그 피를 토하는 외침 속에 담겨진 진기는 무척 강렬했지만 그 기세만큼이나 흉포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으, 으아아!”
주위의 무승들이 그의 사자후가 내뿜은 파장을 견뎌 내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내상을 입지 않은 것은 석두의 진기가 순수하여 그들의 혈맥을 진탕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크흑!”
그러나 그것이 본저에게까지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자신의 전신 공력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기에 석두의 사자후에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크오오오오!”
그 순수하고 얼빠져 보이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석두는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기들을 잠재우기라도 하려는 듯 고함을 내지르며 발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이내 석두의 발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이내 석두의 몸이 균열이 생긴 상석 위로 날아올랐다.
“으랴아아!”
공중으로 날아오른 석두의 몸이 잠시 멈추어 섰다고 생각된 순간, 그의 오른 주먹에서 강기가 폭발하듯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강렬하고 위압적이던지 무승들은 넘어진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우웅!
이내 석두의 몸이 흰색의 섬전과 함께 사라졌다. 무승들은 석두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 어찌 된 것인가. 아니!”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무승들은 아까의 사자후와는 비견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충격파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콰드드득! 콰르르릉!
흰빛의 선이 상석 위로 떨어졌다 생각된 순간, 상석의 중앙은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부서져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럴 수가!”
유릉 대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석 위를 바라보았다. 십여 장에 이르는 상석 전체에 균열이 갔을 뿐만 아니라 강기의 폭풍우가 휘몰아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보다 더욱 신비한 것은 그런 강기의 폭풍우에 휩쓸린 무승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이었다.
“불순한 것이 전혀 없는 순수한 내공이란 말인가! 어, 어찌…….”
유릉 대사는 이내 믿을 수 없는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순수한 내공. 인체의 혈맥과 경혈에 유입되어도 아무런 반발을 일으키지 않는 순수한 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쿠르르릉! 쿠릉!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지나가자 무승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이 사태를 하나 둘 인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보다 훨씬 더 걱정스러운 표정의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옥녀였다.
“서, 서방님은……!”
석두가 한꺼번에 이리 어마어마한 양의 진기를 발산하리라고는 옥녀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옥녀는 더 생각할 여유도 없다는 듯 상석 위로 몸을 날렸다.
휘우우욱!
옥녀의 발이 자연스레 허공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십여 장의 거리를 단번에 날아온 그녀는 그제야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머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상석의 한가운데에 주먹을 내리꽂은 석두와 그의 바로 옆에 선 채로 정신을 잃은 본저의 모습이었다. 그 충격파 속에서도 석두 주위 반경 일 장에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부선…….”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석두를 안아 들었다. 석두는 전에 없었던 어마어마한 진기의 소모 탓인지 큰 피로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석두는 자신을 안아 든 것이 옥녀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눈을 떴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옥녀는 어이없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런……. 빗나갔어라.”
“…….”
자신이 지금 만들어 놓은 상황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석두는 자신이 전력을 다해 내지른 주먹이 본저에게 적중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러 놓았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걱정 마시어요. 우선은 주무셔요, 뒷일은 소녀가 알아서 할 터이니.”
“헤헤. 고마워라, 지가 좀 피곤혀서…….”
석두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멋지다고 생각하는 옥녀였다.
“이것이 정녕 사람이 한 일이란 말인가.”
일 각이 지나자 공황 상태에 빠졌던 소림의 무승들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럼에 따라 석두가 벌인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놀라고 있었다.
굳건하고, 또 위풍당당함을 뽐내던 소림사의 상석은 그 본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단 일 권. 일 권에 상석의 중앙은 마치 벽력탄 수십 발을 던져 놓은 것처럼 변해 버렸고,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상석의 가장자리에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균열이 퍼져 있었다.
“무, 무엇들 하는가!”
유릉 대사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석 위를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외쳤다. 이내 그의 손짓을 받은 속가제자들이 상석 위로 달려 올라갔다.
“이쪽입니다.”
상석 위로 달려 올라간 속가제자들은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옥녀가 상석 위로 올라와 있을 뿐만 아니라 석두의 반경 일 장 안의 상석만은 이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맥의 상태를 보아 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시주의 상태는 어떠신지요?”
본저는 선 채로 오줌까지 지리고 기절해 있었다. 그의 맥을 짚어 본 속가제자는 다행이라는 듯 말하며 옥녀의 품에 안겨 있는 석두를 가리켰다.
“잠드신 것뿐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보다 스님을 어서 안채로 옮기도록 하세요. 그리고 적어도 한 달은 무공 수련을 하게 해선 아니 됩니다. 자칫하다간 심마에 빠질 수도 있어요.”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 속가제자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내 다른 제자가 들것을 가져오자 그는 조심스럽게 본저를 들것에 눕혀 상석 밖으로 빠져나갔다.
“굉장하구먼. 흘흘.”
“……!”
속가제자들이 상석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옥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건만, 그곳에는 어느새 유릉 대사가 서 있었다.
“자네들을 과소평가했던 것은 소림의 중들뿐만 아니라 나도 포함돼 있었던 것 같구먼.”
“…….”
옥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유릉 대사를 바라보았다. 자칫 말을 잘못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그의 말을 경청할 때였기 때문이다.
“흘흘. 이렇게 되었으니 자네 지아비의 나한진 도전에 토를 달 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게야. 그러니 심려치 말게.”
다행이었다. 옥녀는 유릉 대사의 말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석두를 안아 올렸다. 혹여 석두가 나한진에 도전하는 것을 막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던 것이다.
“여러모로 폐를 끼치게 되는 것 같아 면목이 없습니다.”
“흘흘흘, 폐라니. 세상 만물에는 이치가 있고 운명이 있는 것이야. 자네들과 나는 인연이 깊으니 이것도 모두 예정된 운명이 아니겠는가.”
옥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유릉 대사는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그리고 머잖아 천계에서 그를 보게 되리라는 것도 그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해 낼 수 있었다.
너무나도 큰 충격을 주었던 비무가 끝나고, 이틀 동안 소림은 그야말로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부서진 상석을 다른 무림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가져다 버리고 새로운 상석을 운반해 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 자리 남은 나한진의 도전권을 두고 무승들 간의 신경전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아우, 배가 왜 이리 아플꼬!”
소림의 말단 무승인 혜경(慧景)은 나한진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 중 하나였다. 남은 상석의 조각을 치우다가 그가 급히 해우소로 달려온 이유는 다름 아닌 배탈.
푸드드득! 푸드득!
“후우―. 이제야 살겠네. 부처님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누렇게 떴던 얼굴이 급속도로 생기를 찾아 갔다. 먹은 것이라곤 꽁보리밥과 나물뿐인데 나오는 것은 어찌 이리 많은지 그로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푸드득! 푸그르륵! 뿌웅!
“허어, 시원하다.”
속에 남은 마지막 덩어리들까지 알차게 배출해 낸 그는 뒤를 닦기 위해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 순간.
그르르르.
“으악!”
혜경은 변소 아래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어찌나 놀랐는지 변소 아래로 빠질 뻔한 그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어린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번뜩이는 붉은 안광.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변소 위로 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크르르, 크허엉!
“으, 으아악! 변소에 똥 괴물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똥 세례를 받은 혜경의 외침이 소림사 가득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