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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제1장 사마련의 대공자(3)
“사부님께서 염화단을 주신답니다.”
“오! 정말?”
무천이 깜짝 놀라며 화운을 바라보았다. 화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정말 대단한데? 염화단이면 나도 한 번도 못 본 거잖아? 역시 화 사제라니까. 이보게, 혈랑대주.”
“예?”
갑작스레 무천이 자신을 부르자 놀란 공각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천은 미소 지은 얼굴로 화운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말했지? 자네 화 사제한테 꼭 붙어 있으라고, 그럼 배고플 일은 없을 거야.”
“아, 예에.”
공각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형. 어딜 다녀오는 길입니까?”
“그냥 뭐…… 사부님께 다녀오는 길이지.”
대답하는 무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천이 매일 기태천을 만나기 위해 염천각을 오고 가는 것을 알고 있는 화운이었다. 하지만 무천은 염천각 앞에서 한 시진 이상을 기다린 후 발걸음을 돌리곤 하였다. 단 한 번도 기태천은 무천을 받아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였으면 그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할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안도였고 다행이었다. 하지만 가슴 언저리에 무언가가 얹힌 듯 답답했다.
“사형. 대체 언제까지…….”
“이거 사형제분들께서 이렇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좋습니다.”
그때 화운의 말을 끊고 한 중년인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를 발견한 공각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천악각 부각주님을 뵙습니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다가온 학사풍의 사내.
사마련에서 가장 큰 세 세력 중 하나인 천악각(天惡閣)의 부각주 마희운이었다. 그리고 화운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공각의 인사에 화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금 전 무천을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천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무천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마희운을 반겼다.
“이 시간에 웬일이시오?”
“이유랄 게 뭐 있겠습니까?”
마희운은 무천의 말을 받아넘기며 화운을 바라보았다.
“련주님께서 염화단을 내리신다 들었습니다. 모두 공자님의 복이옵니다.”
“고맙소.”
화운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마희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무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 공자님께서는 이런 시간에 왜 나와 계신 겁니까? 몸도 안 좋으실 텐데.”
“하하! 그러니 더욱 돌아다녀야지요. 일사병이라도 나서 픽 쓰러져야 우리 마 부각주께서 두 손 들고 좋아하실 것 아닙니까?”
무천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속뜻을 숨기지 않은 그의 말에 마희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곧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잔치를 벌여야지요.”
“잔치라……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내 침실에 음식 좀 보내주시구려. 오랜만에 잔칫상 좀 받아봅시다.”
“그 음식을 드시고 아무 탈이 없으시다면야 능히 보내드려야지요.”
주위에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무천과 마희운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마 부각주께서는 저를 미워하시나 봅니다.”
낯선 목소리와 함께 무천의 옆으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천은 갑작스레 나타난 사내에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운휘! 자네로군. 나타날 때 인기척 좀 내주면 안 돼? 간 떨어질 뻔했어.”
“대공자님과 이 공자님을 뵙습니다.”
긴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은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천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반겼고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말인가? 내가 자네를 미워한다니?”
“그거야 천악각에서 대공자님께 음식을 드리면 제가 먼저 먹어야 하니까요.”
“허허! 누가 들으면 내가 마치 대공자님께 해라도 끼치는 줄 알겠네.”
“설마요. 부각주께서 저희 본 련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잖습니까?”
운휘와 마희운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화운은 불편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사형.”
“어? 맞아. 아까 하려던 말이 뭐야?”
무천의 물음에 화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려고?”
“예.”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우리 사제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야 원.”
“예. 제가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무천에게서 몸을 돌리던 화운은 마희운을 한번 노려보고는 멀어져 갔다. 그런 화운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마희운은 무천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읍을 취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시오.”
무천이 자리에 일어나 마주 포권을 취했다.
몸을 돌리던 마희운이 운휘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워낙 빠르게 지나간 터라 본인 외에는 아무도 그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운휘는 그런 마희운의 눈빛에도 지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희운이 자리를 뜨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공각은 재빨리 무천에게 읍을 취하고는 마희운을 따라나섰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게.”
무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몸을 돌린 공각은 마희운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러다 화운 공자님의 눈밖에라도 나면 닭 쫓던 개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걱정할 것 없네. 아직은 어려 사리분별을 못할 뿐이니까.”
“하지만…….”
“그가 후에 후계자가 된다면 싫어도 알 게 될 걸세. 우리 천악각이 어떤 곳인지 말이야.”
길을 걷는 마희운의 얼굴에 마치 산보라도 나온 듯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 * *
“여전히 무공을 회복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희운의 말에 천악각주 엄태화는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몇 년간 온갖 영약을 먹였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줌의 내공조차 회복하지 못한 몸이 아닌가? 약왕각주가 말했듯 무인으로서의 생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입에 미소를 걸고 있지만 그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일 처리가 철두철미했고 계략에 능한 전형적인 모사였다.
삼대 세력에 속했다지만 다른 세력에 비해 밀리던 천악각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엄태화는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이대로라면 계획대로 화운 공자가 후계자가 되겠군요.”
“물론.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아서는 아니 될 것이야. 비록 여의주를 잃었다고는 하나 그는 용이니까.”
대공자 무천.
그는 엄태화의 말대로 용이었다.
무공을 잃기 전의 그를 가까이서 자주 보아왔던 마희운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웃음 속에 숨겨진 패왕의 기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신을 내보이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는 단순히 호랑이 새끼인 줄 알았더니 이미 승천하기 직전의 이무기였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무공을 잃은 것은 엄태화에게 천우였다.
“참 들으셨습니까? 주군께서 화운 공자에게 염화단을 내렸습니다. 주군께서도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더 늦기 전에 우리도 그에게 무언가를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엄태화는 비워 버린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게 뭐가 있을 것 같나?”
“글쎄요. 이미 염화단이 내려온 이상 그에게 영단은 한동안 필요 없을 테고, 그렇다고 주군의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 비급 역시 필요 없을 겁니다.”
“그렇지. 그렇다고 해서 혈화폭무신공을 익히고 있는 그에게 검을 줄 수도 없고 말이야.”
혈화폭무신공은 병장기를 사용하기보단 권법, 수법, 장법에 특화된 무공이었다. 그런 그에게 보검 같은 병장기보단 차라리 수갑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보의나 수갑은 얼마든지 그가 구할 수 있었다.
“그럼 무엇을 줘야 합니까? 무인에게 필요한 건 전부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무인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태지.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아직 필요한 게 있지.”
“예?”
마희운은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답이 보이지 않았다.
엄태화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바로 계집이라네.”
“계집…… 말입니까?”
마희운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를 떠올린 그가 눈을 번뜩이며 웃음을 흘렸다.
“과연!”
“그 훌륭하던 오왕(吳王) 부차도 결국에는 서시(西施)에게 눈이 멀었지.”
오나라의 왕이었던 부차는 밤낮으로 전법과 무예를 익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패퇴시켰다. 하지만 그 후 구천을 죽이라는 오자서(伍子胥)의 간언을 듣지 않은 부차는 구천의 충신인 범려가 보낸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사를 게을리 하였고 결국엔 월에 패배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그러한 여성이 있습니까? 미녀라면 본련에도 꽤 많지 않습니까?”
마희운은 시녀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사마련에는 수많은 미녀들이 시녀로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 역시 몇 명을 첩으로 들였을 정도였다.
그런 여성들을 보고 자란 운휘였기에 어지간한 미녀로는 성이 차지 않으리라.
외모와는 다른 성향의 매력이 필요했다.
“그 계집을 보면 자네조차 눈을 떼지 못하게 될 게야. 나도 자칫 홀릴 뻔했으니까.”
“그 정도입니까?”
마희운의 질문에 실소를 흘린 엄태화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눈을 빛냈다.
“그 계집은…… 요물을 뛰어넘는 요마(妖魔)라네.”
“저 여성은…….”
“응?”
무천의 뒤를 따르던 운휘는 어떤 여성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무천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한 여성이 분홍빛의 비단옷을 갖춰 입고 조심스레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운휘뿐이 아니었다. 길을 가던 모든 무사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겨 있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시간이 멈춘 듯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 허리까지 닿은 그 여성은 주변의 시선에도 아무 표정 없이 발을 놀리고 있었다.
시원한 콧날과는 다르게 무언가 진득한 슬픔을 지니고 있는 듯한 눈동자는 남성들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 속을 걷던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한순간에 녹아 버린 눈처럼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마치 꿈이라도 꾼 듯 고개를 젓고는 하던 일을 했다.
“후우, 요물이군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