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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제1장 사마련의 대공자(4)


운휘가 숨을 깊게 몰아쉬며 말하자 무천이 그를 바라보았다.
“요물입니다. 무슨 무공을 익힌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를 보는 순간 영혼조차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한눈에 반한 건 아니고?”
운휘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반했다면 중매라도 서주시렵니까?”
“오! 장가가려고?”
“저 정도 미인이라면 생각해 볼 만하지요.”
“요물이라며?”
“세상 구하는 셈 치지요.”
그의 대답에 무천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운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몸은 어떠십니까?”
“몸이라…….”
자신의 건강 상태를 물어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물어보는 것은 바로 내공의 회복.
비록 몸 상태는 좋다하지만 단전을 가득 채우던 내공은 이제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다.
“뭐 여전하지.”
“그렇군요. 걱정 마십시오, 언젠가는 돌아올 것입니다.”
“그럴까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무천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그때의 일이 기억난다.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났다.
어느 날과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다르다면 단 한 가지.
희한하게도 바람이 포근했다. 그 기분은 마치 구름 속을 걷는 것과 같았다.
그 기분에 눈을 감고 주먹을 뻗는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내뻗는 주먹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고 몸속에서 용솟음치는 힘은 거침이 없었다.
단전에서 솟아나는 내기가 전신을 향해 뻗어 나갔다.
무아지경.
세상이 내가 되고 내가 세상이 된다.
전신에서 흐르던 구슬땀이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무공을 펼치며 이렇게 편안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희열?
쾌락?
무엇으로 이 기분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작스레 허공이 갈라지며 그 틈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틈은 마치 거대한 문처럼 천천히 열렸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 문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황홀경!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무엇이든 거침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온몸의 기운이 넘쳐흐른다. 조금 전까지 무공을 펼쳐 지친 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활력이 솟아났다.
하지만 그 문은 금세 닫혀 버렸다.
극 쾌락을 맛본 후유증인지 온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문 밖으로 튕겨져 나온 순간…….
내공을 잃었다.
잃어버린 무공을 되찾기 위해서 별의별 짓을 다 해봤다. 옛 서적을 몇 달 동안 뒤적거리기도 했고 천년설삼부터 시작해 저잣거리의 싸구려 약까지 섭취했었다. 하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내공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영약의 기운 역시 밑이 깨진 독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외공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내공과 외공은 빛과 그림자 같은 존재.
내공이 없는 외공은 반쪽짜리 무공과도 같았다.
“뭐 그까짓 거 없으면 어때?”
“큰일이군요.”
“뭐가?”
“나중에 공자님이 후계자가 되면 한자리 꿰차려고 따라다니던 거였으니까요.”
“하하! 왜? 화운에게 말해서 한 자리라도 만들어줄까?”
“기왕이면 잘 먹고 놀 수 있는 자리로 부탁드립니다.”
운휘의 농에 무천이 다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는데.”
“뭡니까? 재미있는 일입니까?”
무천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창공이 한눈에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 무천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주 재미있는 일이야.”



제2장 천악비고(天惡備考)(1)


“계십니까?”
무천은 허름한 초가집의 문을 두들기며 인기척을 살폈다. 운휘는 낯선 집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마련에 기거한 지도 꽤나 지났지만 몇 번 보지도 못한 집이었다.
말이 서른세 개의 전각이 모인 곳이지 사마련에 기거하는 사람만 삼천 명이 넘었고 하루에 들락날락거리는 사람은 그 배가 넘었다. 그렇기에 전각 외에도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사마련은 하나의 소도시와도 같은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누구냐!”
금방에라도 부서질 것 같은 문지방을 넘어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무천은 얼굴에 지은 미소를 거두지 않고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에는 한 노인이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누가 감히 허락도 없이 문을…….”
노인의 시야에 무천의 웃는 얼굴이 들어오자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대공자가 이렇게 행차했는데 그 표정은 뭡니까?”
“대공자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대공자? 난 귀가 없는 줄 아느냐? 너 곧 있으면 그 자리에서 쫓겨난다며?”
“그렇게 된다면 어르신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하하하!”
“내가 미쳤냐? 네놈을 따라가게?”
노인은 일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천은 그런 그의 행동이 익숙한 듯 신을 벗고 방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운휘는 노인과 무천의 대화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문 앞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설마…… 춘화?”
무천이 노인의 어깨 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노인은 보고 있던 것을 잽싸게 손으로 덮었다.
“정신 줄 놨냐? 어디다 고개를 내밀어? 그리고 누가 들어오랬어?”
“같이 보면 안 됩니까? 좋은 건 함께! 나쁜 건 혼자! 춘화면 당연히 함께 봐야죠!”
“춘화 아냐!”
“그럼 뭡니까?”
“아, 진짜!”
계속 옆에서 치근덕거리는 무천에 짜증이 났는지 노인이 눈살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그냥 궁금합니다.”
“이이…….”
노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무천은 그런 노인의 모습에도 싱글벙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노인은 당장에라도 무천의 얼굴에 일장이라도 처넣고 싶었다. 하지만 비록 내공을 잃었다지만 아직은 대공자의 위치에 있는 그였다.
그때 운휘가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공자님. 그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아, 운휘는 처음이지? 인사해. 괴공이란 분이시다.”
운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괴공(怪工) 견자생.
사파의 전대고수로 이름이 높은 자지만 무공보다는 다른 것으로 이름을 날린 자였다.
괴공이라는 별호에 맞게 괴이한 물건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그 물건 하나하나가 무가지보에 부족함이 없어 과거에는 한동안 무림인들이 그를 찾아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몇 년 전에 무림에서 종적을 감춰 죽었다고 알려진 그였다. 그런 그가 설마 사마련 내에서 아무도 모르게 기거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괴공이십니까?”
운휘가 놀란 음성으로 묻자 견자생은 더욱 얼굴을 구기며 무천을 노려보았다.
“내가 비밀이라고 했지?”
“아차!”
무천이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곧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운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닐 정도로 입이 가벼운 애도 아닙니다. 그렇지?”
“아, 예…… 꼭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운휘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견자생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네놈을 방 안으로 들인 것이 일생 일대 최고의 실수였다.”
견자생은 진심으로 그때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대공자가 이런 성격인줄 알았다면 곧 죽어도 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리라.
“에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시기는.”
무천의 말에 견자생의 손이 꿈틀거렸다.
견자생은 다시 숨을 크게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네놈하고 대화했다간 제 명에 못 죽겠다. 그래 오늘은 대체 뭔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게냐?”
“아, 맞다. 어르신 ‘그것’ 좀 내주십쇼.”
“그거라니?”
“경천뢰(驚天雷).”
“……!”
견자생의 눈이 부릅떠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살짝 벌어진 입을 뻐끔거리기까지 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가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그게 뭔지는 알고 말하는 게냐?”
“물론!”
“그걸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설마 그것도 모르고 달라 하겠습니까?”
“허…… 허허…….”
견자생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운휘는 낯선 단어에 무천에게 물었다.
“경천뢰가 뭡니까?”
“그냥 폭탄이야.”
“예?”
“폭탄 몰라? 펑! 하고 터지는 구슬.”
“알긴 합니다만…….”
물론 폭탄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난데없이 폭탄이란 말인가. 거기에 그가 폭탄을 소지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때 견자생이 고개를 들어 운휘를 바라보았다.
“너. 이놈 곁에 얼마나 있었냐?”
“꽤 됐습니다.”
“지금에라도 늦지 않았다. 당장 이놈 버리고 이 공자라도 찾아가서 그놈에게 붙어.”
“예?”
운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견자생이 무천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저놈은 그냥 미친놈이야! 네놈은 정상인 거 같아서 충고하는데 결코 저놈 곁에 있어서 좋은 꼴 못 볼 거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에라도 저놈에게서 떨어져!”
운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무리 그가 무천과 친해 보인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래도 무천은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었다. 수하로서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도가 지나친 말이었다.
턱.
그때 무천이 운휘의 손을 잡았다. 운휘가 그를 바라보자 무천은 미소 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다시 견자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딱 한 알만 부탁합니다.”
“일없다!”
견자생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정말 안 되겠습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다. 대체 경천뢰는 어디에 쓰려고?”
“그런 일이 있습니다.”
“설마 자폭이라도 할 생각이더냐?”
“에이, 설마요. 하하하!”
무천이 큰 웃음을 터트리자 견자생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