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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제2장 천악비고(天惡備考)(2)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약 이각의 시간이 지나자 한숨을 내쉰 견자생이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꺼낸 그의 손에는 작은 목합이 들려 있었다.
“이 안에는 딱 세 알의 경천뢰가 잠들어 있다. 가져가려면 가져가거라. 대신! 이것을 가져간다면 네놈과의 연은 그걸로 끝이다.”
“망할 놈. 빌어먹을 놈. 육시랄 놈. 똥물에 튀겨 죽일 놈.”
견자생의 입에서 별의별 욕이 쏟아져 나왔다.
목합을 내려놓고 입을 열자마자 잽싸게 주워간 무천 때문이었다. 연을 끊겠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망설임 없이 목합을 주워들었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무천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던 견자생은 열려진 방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 보면 피도 눈물도 없다 여길 수 있지만 그에게 든 정과 그동안 보아온 그로 봐서는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놈도 불쌍하긴 불쌍한 놈이지.’
푸른 하늘이 붉은색으로 물들며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런 하늘을 바라보던 견자생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앞으로 무천의 앞으로 펼쳐질 길을 보는 것 같았다.
* * *
날이 밝자 연화는 조식이 담간 소반을 들고 무천의 거처를 찾았다. 매일 같이 하는 일이지만 연화의 얼굴에는 오히려 홍조마저 피어 있었다.
똑똑!
“공자님. 연화입니다.”
언제나 같이 문을 두들긴 연화는 곧 흘러나올 무천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반각이 흐르고 일각이 흘러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공자님?”
다시 문을 두들기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주무시는 건가?’
연화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슬쩍 방문을 열었다.
조금한 틈새로 무천의 방 안이 연화의 시야에 들어왔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방 안을 살펴보았지만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레 다시 문을 닫은 연화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대체 어디 가신 거야?’
“응?”
마희운은 길을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닐고 있었다. 모두 사마련에서 기거하는 하인들과 무사들이었다. 하지만 마희운이 뒤를 돌아본 이유는 그들 때문이 아니었다.
집을 나온 이후로부터 기분 탓인지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미행을 당한다면 마치 이런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사마련이었다. 사마련 안에서 천악각의 부각주로 있는 자신이 미행당할 일은 결코 없었다.
한동안 주변을 살펴보던 마희운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여 장 떨어진 건물 옆에서 두 명의 무사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평무사로 변장한 무천과 운휘였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그는 천악각의 부각주입니다.”
“알아.”
“그런 그를 미행하는 겁니다.”
“안다니까.”
무천은 고개를 돌려 운휘를 바라보았다. 허리춤에 달린 철검이 철컹거렸다.
무천은 어젯밤에 각자의 거처로 헤어지기 전에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정말 나 믿지?”
“그렇다고 치죠.”
“나중에 가서 혼자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 그랬다간 자네가 시켰다고 말할 거야.”
“지금에라도 달려 나가서 소문낼까요? 사마련의 대공자가 천악부각주를 미행하고 다닌다고.”
운휘가 당장에라도 쓰고 있던 가발을 벗으려는 듯 말하자 무천이 웃음을 흘렸다.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곁에 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언제든 함께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운휘는 무천에게 친우이자 형제였고 유능한 수하였다.
“그런데 왜 그를 미행하는 겁니까?”
“그 어떤 증거도 남기지 말아야 하거든.”
“예?”
“그냥 내가 사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만 생각해 둬. 날 믿는다며?”
화운 공자에게 주는 선물과 천악부각주를 미행하는 것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운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천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지만 무천은 그저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앗!”
그때 마희운의 신형이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사라졌다. 무천과 운휘는 재빨리 그를 다시 뒤쫓기 시작했다.
무천과 운휘의 미행은 삼 일간 지속되었다.
그 미행으로 알아낸 것으로는 마희운이 거처에서 나와 천악각으로 들어가는 데 정확히 이각(二刻)이 걸렸다. 그 시각이 사시였다. 그리고 오시가 되어서 그는 천악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사마련 내에 자리 잡고 있는 사도객잔이었다.
평무사들도 많이 이용하는 이 객잔에서 마희운은 항상 점심을 때웠다.
객잔에 들어간 그가 부푼 배를 두들기며 나온 시간은 들어간 지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
식사를 끝낸 그는 반 시진가량 산책을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고작 천악각 근처를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미시가 되자 그는 곧바로 천악각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술시가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고 곧바로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그날 밤. 불도 켜져 있지 않은 컴컴한 방 안에 무천과 운휘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운휘의 손에는 한 장의 양피지가 들려 있었는데 삼 일간 마희운을 미행하며 그의 행동거지를 적어놓은 것이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으로 인해 양피지를 보는 데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양피지의 안의 내용이 불편했다. 운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칼 같은 사람입니다. 지난 삼 일간 단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나 같으면 답답해서 못살 텐데.”
“저 같아도 못살 겁니다. 정말 이런 사람 밑에서 일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내 몸이 밧줄로 묶여 있는 기분입니다. 자!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며칠을 미행해도 하루하루가 똑같을 것 같은데.”
운휘가 양피지를 무천에게 건네며 물었다. 양파지를 받아든 무천은 다시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을 쭉 훑어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보통 이렇게 완벽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전혀 약점이 없을 것 같지. 하지만 그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고치지 못해. 아니, 고칠 수 없다는 것이 옳겠지. 그들은 그것을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생각할 테니까. 우리는 그 약점을 파고들 거야.”
“무슨 약점…… 아!”
운휘가 눈을 번뜩였다.
“완벽함 그 자체가 약점이군요.”
“그렇지. 우리는 그 약점을 이용할 거야.”
“그럼 전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운휘가 묻자 무천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을 바라본 운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무천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방에 보내 버리자고. 크크크!”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마희운은 제 시간에 출근하여 제 시간에 퇴근하였다. 단 한 시의 시간도 넘기지 않고 칼 같이 지켰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마희운은 그런 생활 습관을 꽤나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시간을 지킴으로서 자신이 완벽한 인간이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오늘도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악각을 나왔다.
“훗.”
길을 걷던 마희운의 입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을 보고 있자니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낸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귀가하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가벼웠다.
그런 마희운의 발걸음이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멈췄다.
골목 안에서는 한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자네가 어쩐 일인가?”
자신을 바라보며 인사하는 운휘의 모습에 마희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실은 운휘가 꽤나 껄끄러운 그였다.
자신을 어렵지 않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그의 뒤에 대공자가 있다는 사실도 불편했다.
“실은…….”
근처로 다가온 운휘는 주변을 살펴보고는 조심스레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하나의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운휘는 그것을 마희운에게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
“대공자께서 전해드리라 하였습니다.”
“무천 공자께서?”
마희운은 종이를 받아들고는 그것을 펼쳤다. 그 안에는 시원시원한 필체가 적혀져 있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
오늘 밤 사도객잔의 별관에서 뵈었으면 하오.
비밀을 요하는 일인지라 정팔이라는 가명으로 자리를 잡았소. 본인도 인피면구를 쓰고 기다릴 것이니 마희운 부각주께서도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홀로 오시길 바라오.
인피면구는 운휘가 전달할 것이오.
“음…….”
글을 읽어 내리는 마희운의 표정이 심심찮게 변했다.
분명 이것은 밀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운휘를 시켜서 전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몰래 만나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후계자를 노리고 사람을 구하고 있는 것인가!’
종이를 쥐고 있던 마희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중대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 대공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후계자를 완전히 포기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연기라는 생각이 들자 천악각주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공을 잃기 전의 그는 전형적인 무인이자 뛰어난 사내였지.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그의 머리가 모사(謀士)의 머리라는 것이야.”
뛰어난 주군은 그렇게 많은 수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뜻을 이행할 손발이 되어줄 수하만 필요할 뿐이었다.
무천이 그랬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나 뛰어났기에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고 스스로 사람을 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금 움직이고 있었다.
마희운은 종이를 구겨 품속에 넣고는 운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운휘는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다시 무언가를 꺼냈다.
인피면구였다.
“주군께서 해시(亥時)에 만나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시간에 맞춰 가도록 하겠네.”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참, 다시 말씀드리자면 공자님께서는 이 만남이 비밀리에 이뤄지길 바라십니다. 그러니 그 뜻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일세.”
마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휘는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이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등을 돌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마희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대공자.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쯤 만나 의중을 파악하는 것도 괜찮겠지.’
무천을 만나 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의 의중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