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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제2장 천악비고(天惡備考)(3)


그가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면 이런 비밀적인 만남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몰래 만난다는 것은 그만한 속내를 꺼내 놓겠다는 말이었으니까.
대공자의 계획만 알 수 있다면 후에 화운 공자를 후계자로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희운은 손에 쥐어진 면구를 강하게 쥐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품에 갈무리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대의 생각이 대체 무엇인지 낱낱이 파헤쳐 주겠소이다. 무천 공자.’

연공실에서 나온 화운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외의 사람에 깜짝 놀랐다.
“사, 사형?”
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려 단정하게 묶은 무천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야! 몸 좋은데?”
무천의 눈동자가 화운의 몸을 훑었다. 그런 무천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런 무천의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낀 화운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사형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사제를 찾아가니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더군.”
무천이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화운의 시야에 하나의 커다란 건물이 들어왔다. 자신의 거처였다. 아마 시비 중 누군가 말해줬으리라.
“그런데 저는 어쩐 일로…….”
“아아! 맞아. 실은 사제하고 저녁이나 함께하려고 말이지. 왜? 방해돼?”
“그건 아닙니다만 갑자기 왜…….”
“왜? 싫어?”
“아닙니다.”
“그럼 이따가 보자고. 해시에 맞춰 내 거처로 오도록 해. 오랜만이잖아? 둘이서 함께 식사하는 것도.”
그러고 보니 그와 함께 식사해 본 적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그때의 화운은 무천의 옆에만 꼭 달라붙어 다녔었다. 무천은 그런 화운을 친동생처럼 아껴주었고 그럴수록 화운은 더욱더 그를 더 따랐었다.
“우리 사제도 이제 다 컸으니 술 한두 잔은 마실 수 있겠지?”
“아, 예에.”
“좋아! 그럼 오랜만에 흠뻑 취해보자고. 하하하! 시간 잘 맞춰오도록 해.”
“아,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아아.”
무천은 손을 흔들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화운은 그런 무천을 바라보며 얼떨떨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화운의 연공실을 벗어난 무천은 곧장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길을 노닐던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무천은 일일이 그들에게 손을 들어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자신의 거처에 도착하자 무천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운휘가 탁자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됐어?”
“수락했습니다. 이따 해시에 사도객잔 별관에서 만나자니 알겠다고 하더군요.”
“그렇군.”
무천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휘가 물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쉽게 수락할지는 몰랐습니다. 그에게 대공자님은 껄끄러운 존재가 아닙니까?”
“왜? 나 껄끄러워?”
“그럼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속에 능구렁이만 수백 마리 기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왜 그래? 나처럼 청순하고 착한 사내가 어디 있다고.”
“…….”
운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자 무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탁자로 다가갔다.
“그도 알고 싶은 거겠지. 수백 마리의 능구렁이를 지니고 있는 머릿속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거기에 평소에도 자주 가서 익숙한 장소. 그로서는 한번쯤 만나볼 만하겠지.”
무천은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한 장의 인피면구가 놓여 있었다.
무천은 그것을 꺼내 운휘에게 건넸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해.”
“뭐, 노력해 보죠.”
똑똑!
“공자님?”
그때 밖에서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연화?”
“곧 저녁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무천이 운휘를 바라보았다. 왠지 퉁명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참! 연화. 오늘 저녁은 이따 해시에 먹도록 할 테니까 그때까지 성대하게 차려줘.”
“예? 누가 오시나요?”
다른 이라면 되묻는 그녀의 말에 화라도 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신분에 비하면 도를 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무천은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사제랑 거하게 한잔하려고.”

* * *

마희운이 사도객잔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시가 되기 일각 전이었다.
객잔 안으로 들어서자 그를 발견한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자주 오는 객잔이기에 마희운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점소이는 인피면구를 착용한 마희운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숙박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식사를 원하십니까?”
“별관…… 흠흠! 별관으로 안내해 주게. 미리 예약을 했을 것이야.”
헛기침을 내뱉은 마희운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하자 점소이는 품 안에서 얇은 책자를 꺼내 들었다.
“그러시군요. 예약하신 분 성함과 본인의 성함을 말씀해 주십쇼.”
“예약한 사람은 정팔. 그리고 난 소봉.”
점소이는 책자를 넘겼다.
“아! 여기 있군요.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점소이가 마희운을 안내하며 객잔의 뒷문으로 향했다. 뒷문을 빠져나오자 삼층 규모의 화려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관은 일반적은 객잔과는 달리 화장이 짙은 여성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두 이곳에서 일하는 기녀들이었다.
사도객잔은 객잔과 홍루를 겸영하는 곳 중 하나였다.
별관으로 들어간 점소이가 마희운을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한 사내가 기녀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내는 나타난 마희운을 바라보더니 환한 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시오.”
“제가 늦었군요.”
“아니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자! 자리에 앉으시지요.”
사내는 마희운을 자신의 앞으로 안내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역시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어 낯선 얼굴에 불과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분명 대공자의 목소리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조금이나마 대공자를 의심하고 있던 마희운의 눈빛이 한결 풀어졌다. 점소이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서자 무천이 마희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거 미안합니다. 괜히 바쁘신 분을 이렇게 불러들여서…….”
“허허, 아닙니다. 마침 한잔이 생각나던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뭐하느냐? 대인의 잔이 비어 있지 않느냐.”
무천과 마희운의 사이에는 술상이 거하게 차려져 있었다. 무천이 마희운의 옆에 앉아 있는 기녀에게 말하자 그녀는 마희운에게 달라붙으며 술병을 들었다.
“대인! 한잔하셔요.”
기녀가 콧소리를 내며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무천의 잔에도 역시 술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무천이 잔을 들었다.
“한잔하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마희운이 술을 단숨에 삼켰다. 그 모습에 무천이 웃음을 흘렸다.
“역시! 소 대인의 주도는 정말로 사내대장부답습니다. 하하하!”
“술이란 자고로 이렇게 마셔야 하지요. 사내로 태어나 술잔을 앞에 두고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무슨 꿍꿍이가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 모두 털어놓자는 이야기였다.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인 무천은 다시 잔을 들어 올렸다.
“물론 그래야지요! 자! 이번엔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잡담을 하며 술잔을 비웠다. 분위가 익어가면 갈수록 잔을 비우는 속도는 빨라졌고 어느 순간 취기로 인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잔 더 드십시오.”
무천이 다시 술병을 들어 올리자 마희운이 고개를 저었다.
“잠깐 쉬겠습니다.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군요.”
이대로 가다간 술만 마시다 끝날 분위기였다. 단순히 술이 고파 온 자리가 아니었기에 더 이상 취기가 오르기 전에 무천의 속내를 파헤쳐야 했다. 내공으로 취기를 몰아내는 방법도 있다만 대공자의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까? 참! 그런 취기에 좋은 게 있는데 어디 한 번 보시겠습니까? 효과는 장담합니다. 하하하!”
“뭐, 보도록 하지요.”
마희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천이 기녀에게 말했다.
“가서 그것을 가져오거라.”
“예.”
기녀가 밖으로 나가고 반각이 흐르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기녀의 품 안에는 작은 향로(香爐)가 들려 있었다. 향로에 꽂힌 향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 이럴까 해서 특별히 준비한 물건입니다. 이 향을 맡고 있으면 금세 숙취가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져 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정말 좋은 물건이군요.”
“이따 가실 때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받아야지요.”
마희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은 꽤나 불편한 상태였다. 무천이 주도권을 지니고 있는 이상 정말 술만 마시다 이 자리가 끝날 것 같았다.
결국 마희운이 먼저 선공을 취하기로 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마희운의 의중을 파악한 것인지 무천이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기녀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만 나가 보거라.”
방금 전과는 달리 무천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사라지고 위엄이 자리 잡았다. 기녀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물렀다.
“듣는 사람이 적을수록 부각주님이나 저나 편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대공자님.”
“오늘 왜 부각주님을 뵙자고 했는지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마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천이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렸다.
“실은 천악각주님께 먼저 연락을 드리려 했는데 그전에 부각주님의 의중을 파악하고 싶어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어떤 의중 말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천악각은 저와 화운이 중 누가 후계자가 되길 바랍니까?”
순간 마희운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저희가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 전부 주군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따를 뿐이지요. 대공자님과 이 공자님. 모두 저희가 따를 분들입니다.”
“하하하! 과연 천악각의 충심은 소문대로군요.”
무천이 술병을 들어 올렸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마희운이 거절하자 고개를 끄덕인 무천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연거푸 석 잔의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다보니 이거 주제넘은 욕심이 생기더군요. 거기에 꾀까지 늘어만 갑니다.”
“사내는 모름지기 야망을 품고 사는 법이지요.”
“야망이라…… 그렇지. 야망일 것이오. 그것은…….”
문득 무천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부각주님께서는 제 야망을 함께 지고 가실 수 있겠습니까?”
“그 말씀은…… 역시 후계자를 노리시는 모양이군요.”
“사내대장부라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전 단순한 후계로만 만족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대공자님께서 품은 야망의 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