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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제2장 천악비고(天惡備考)(4)


마희운이 묻자 무천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술을 단번에 털어 넣고는 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사도천하(邪道天下)!”
“……!”
마희운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천이 말한 것은 짤막했지만 그 안에 품고 있는 뜻은 굉장히 큰 것이었다. 단순히 후계자를 노리는 자신들과는 다른 뜻을 그는 품고 있었다.
마희운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분명 무천의 재량은 그만한 재량이 되었다. 비록 내공을 잃어 무공에 약한 면모를 보이고 있지만 지도자는 무공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공의 허점을 충분히 메울 수 있는 재량을 무천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뛰어나도 너무 뛰어나다. 화운 공자와는 그릇부터 달라!’
무천이 후계자가 된다면 분명 틀림없이 그는 천하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다. 하지만 무공이 없음에도 사마련주의 자리에 오른 그가 과연 뛰어난 수하를 필요로 할까?
무천이 사마련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아무리 그를 돕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단순히 장기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각주님께서는 나의 야망에 보탬이 되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천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져 미소를 그리고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패왕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보던 마희운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으로 인해…… 내가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후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사마련 삼대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천악각만 존재하게 될 테지요. 그리고 부각주님께서는…….”
말을 끊은 무천이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부각주의 자리에만 계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마희운은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주도권은 그에게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주도권을 다시 빼앗기에는 무천은 굶주린 호랑이였고 자신은 그의 앞에 몸을 조아리고 있는 여우였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랬다.
단순히 그의 의중만 파악하고 이용하려 했건만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천악각에서 방해한다 하더라도 거뜬히 그것을 해쳐 나가고 이룰 만한 인물이었다.
“허허, 그런데 좀 덥지 않습니까?”
마희운이 소매를 걷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방 안에는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온기가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나른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이유가 아까 기녀가 가져온 향로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 때문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한 물건인가 봅니다. 대체 무슨 향입니까? 기분이 마치 구름 속을 노니는 것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예에…… 몸이 나른해지는군요.”
대화를 나눌 때에는 몰랐으나 향내를 의식하기 시작하니 더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아, 이제야 약효가 도는 모양입니다. 다행이군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지 걱정이었거든요.”
“에? 그게 무슨…….”
“이것을 드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무천이 자신의 잔에 따른 술을 그에게 건넸다. 이미 향내에 취해 몽롱한 얼굴로 변한 마희운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투명 무취한 액체를 단숨에 털어 넘기자 몽롱함을 넘어 쾌락이 느껴졌다.
“이건 무슨…… 술입니까?”
“술이 아닙니다.”
“그럼…….”
무천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부각주님을 잠재우는 약이지요.”
“예?”
무천의 말에 의아함을 보이던 마희운은 순간 머릿속이 핑하고 도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술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 모습에 무천은 곧바로 마희운에게 다가가 그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러자 손바닥 크기의 무언가가 느껴졌다. 무천은 그것을 꺼내 들었다. 그가 꺼내 든 것은 금패였는데 그 안에는 천악이라는 문자가 적혀져 있었다.

“분명 그는 천악패(天惡牌)를 소지하고 올 것이야. 세상에서 자기 품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운휘는 이 향의 약효가 충분히 돌 때까지 그의 신경을 빼앗아야 해 그가 향을 인식할 수 없도록. 일단 술부터 잔뜩 먹여. 그런 다음에 일을 시작하라고. 아, 해독제 미리 먹는 거 잊지 말고.”

거처에서 헤어지기 전에 했던 무천의 말이 떠올랐다. 무천으로 변장하고 있던 운휘는 그의 말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무천의 뱃속에는 수백 마리의 능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천이 가져온 향은 일종의 환각제였다. 그리고 마희운이 마신 술에는 소량의 수면제가 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환각제와 반응을 일으켜 효과가 배로 나타난 것이다.
설마 무천이 이런 꼼수를 쓸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마희운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술을 마셨고 운휘의 말에 집중해 서서히 환각제에 중독되어 가고 있는지도 몰랐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였다.
운휘의 눈동자가 쓰러져 잠이 든 마희운에게 향했다.
문득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천의 계획에 그는 단순한 희생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짝짝!
운휘가 손뼉을 두 번 치자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사도객잔의 점소이 중 하나였다.
운휘는 품에서 은자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요. 헤헤.”
은자를 받아든 점소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 점소이가 끝까지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후에 일이 생겨 무사들이 점소이를 닦달하면 그는 분명히 사실을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단지 오늘 밤만 이 사실을 숨기면 그걸로 되었다.
운휘는 금패를 품속에 갈무리하고는 곧장 그 자리를 벗어났다.

화운이 무천의 거처로 도착한 것은 해시가 다 되어서였다.
“어서 와. 사제!”
무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운을 맞이했다. 화운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럼 앉도록 해. 꽤 많은 음식을 준비하긴 했는데 사제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무천이 의자를 가리키자 화운이 자리에 앉았다.
무천과 화운이 마주 앉은 사이에는 커다란 식탁이 있고 수많은 음식이 놓여 있었다.
무천이 앞에 놓인 호리병을 집어 들어 화운에게 내밀었다.
“한잔해야지?”
“예.”
무천과 화운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주고받았다. 거진 한 시진가량 술만 마시니 어느새 무천의 옆에는 술독이 여러 개 쌓여 있었다.
“사형, 괜찮으십니까?”
“아? 아아, 괜찮고 말고…… 왜? 우리 사제는 힘든가?”
“아닙니다.”
화운이 고개를 젓자 무천이 갑작스레 키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화운이 의문을 표하자 무천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나? 옛날에 사제가 내가 먹던 술 뺏어 먹고서 사흘간을 병상에 누워 있었잖아?”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화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땐 참 귀여웠었지. 말은 참 안 들었지만 말이야.”
“철없을 적 이야기입니다.”
“오호! 지금은 철 있고?”
“예?”
화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천은 여전히 실실거리며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며 화운을 바라보았다.
“사제.”
“말씀하시죠.”
“넌 후계자가 되면 어떻게 할 거야?”
“……!”
화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게 무슨……. 본 련의 후계자는 당연히 사형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 그래도 너도 후계자의 승계권을 지니고 있지. 내가 없어지면 네가 후계자가 되는 거잖아.”
“사형!”
화운이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무천은 손을 저었다.
“일단 앉아봐. 아무튼 그래. 혹시라고 치고 만약에…… 만약에! 네가 후계자가 되면 어떻게 할 거야?”
“만약이고 자시고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흐응…… 그래?”
무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술병을 들었다. 잔에 술을 따르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사제. 세상은 다 자기 생각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그게 무슨…….”
“이건 말 안 해도 알 텐데? 이미 본 련에서는 나와 사제를 중심으로 가신들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
“물론 사제 쪽이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지만.”
무천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잔 위에는 잔잔한 달이 떠 있었다. 그 달을 바라보던 무천이 잔을 화운에게 건넸다.
“이젠 사제도 결정해야 할 거야. 자신의 고집만을 앞세우는 어린아이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정말 본 련의 공자로서…… 자신의 뜻도 굽힐 수 있는 어른이 될 것인가.”
화운은 아무 말 없이 무천의 잔을 받아 들었다. 무천과 화운은 그것을 끝으로 아무런 대화도 없이 대략 반 시진가량 더 술잔을 나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밤이 깊어지자 화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많이 늦었네. 이 시간까지 붙잡고 있어서 미안해.”
“아닙니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아아.”
무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운이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다 발걸음을 멈춘 화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전…… 그때의 사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다지만, 그때의 사형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고 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 련의 후계자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사형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화운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천은 술잔을 바라보며 그 말을 들었다. 그런 무천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화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무천의 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형제간의 우정이 아주 돈독합니다.”
“왜? 질투나?”
“조금요.”
“하하하! 어땠어? 갔던 일은?”
무천이 뒤를 돌아보자 운휘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그에게 다가왔다.
“공자님 말씀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이 패가 대체 뭡니까?”
운휘는 천악패를 무천에게 건넸다. 무천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혈천비고(血天秘庫)를 알지?”
“본 련의 비고가 아닙니까?”
“그렇지. 그리고 공연한 비밀이지만 본 련을 지탱하는 세 개의 각에도 각자 비고를 하나씩 지니고 있어. 천악각도 마찬가지. 이 천악패는 천악각의 비고를 열 수 있는 열쇠지.”
“예?”
운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그곳을 털 생각이십니까?”
무천이 천악패를 품에 갈무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운휘를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보면 알아. 자! 그럼 슬슬 가볼까.”

어둠 속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민첩한 몸놀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두 복면인은 달빛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