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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제2장 천악비고(天惡備考)(5)
“다시 생각해 보시죠. 무려 천악각입니다.”
“충분히 생각했어.”
“걸리면 한 방에 훅 가는 겁니다. 사지절맥이 끊겨 뇌옥에 갇히고 싶습니까?”
“괜찮아. 난 대공자라서 사지절맥이 끊길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뇌옥에 가봐야 하루 이틀이면 나올걸? 길어야 일주일이지.”
“제가 안 괜찮습니다. 전 끊기고 백 년 동안 갇힐 겁니다.”
무천이 고개를 돌려 운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얼굴은 왜 웃고 있어?”
“그거야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러면서 왜 말리는데?”
“그래야 나중에 혹시나 걸려도 발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난 가기 싫었는데 억지로 끌려갔다. 뭐 그런 겁니다.”
“허이구. 그래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오래오래 사세요.”
무천의 퉁명스러운 말에 운휘가 실소를 지었다.
천악각에 도달하기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천의 거처도 그렇고 천악각도 그렇고 모두 내당에 있었기 때문에 가는 길목에 관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는 천악각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무사들이었다.
과연 천악각을 지키는 무사답게 그들이 지닌 무위는 하나같이 일류였다. 외당의 무사들 역시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내당의 무사들은 그야말로 정예라고 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숨어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무천이 손을 뻗었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두 명의 무사가 천악각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돌격.”
무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운휘의 신형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응?”
한 무사가 옆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미처 고개가 다 돌아가기도 전에 뒷목에 강한 충격을 받고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무슨……?”
동료가 쓰러지는 소리에 몸을 돌리던 무사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코앞에 한 복면인이 눈웃음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
턱!
운휘의 손이 무사의 입을 덮었다. 무사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날리며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운휘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퍽!
그의 복부에 운휘의 주먹이 틀어박히자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운휘는 그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힌 후 무천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천이 다가오고 있었다.
“돌격이 뭡니까, 돌격이?”
운휘의 퉁명스런 말에 무천은 히죽 웃고는 고개를 들었다.
천악각의 웅장한 자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순찰 교대까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이각이면 충분해.”
무천은 현관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세 명의 무사가 무천과 운휘를 발견하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복면을 착용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웬 놈이냐!”
두 명의 무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나머지 한 명은 품속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순간 앞으로 튀어 나간 운휘가 손을 떨쳤다.
서걱!
운휘의 손에서 뻗어 나간 단도가 무사의 입에 물려 있는 피리를 갈랐다. 피리는 반듯하게 잘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무사들이 자신들을 지나간 섬광에 주춤거릴 때 운휘는 어느새 그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퍼퍽!
두 번의 타격음과 함께 무사들의 신형이 고꾸라졌다. 운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닥을 박차 신형을 날렸다.
피리가 잘리며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자 검을 뽑아 들던 무사는 다가오는 운휘에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가 뿌린 검은 운휘의 움직임에 비해 한참이나 느렸다. 운휘가 살짝 허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그의 검을 피하고 품 안으로 파고들기 충분했다.
퍽!
운휘가 그의 턱을 쳐올리자 무사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다신 움직이지 않았다.
“가시죠.”
운휘가 무사들을 구석으로 치우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무천은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각층마다 무사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한 명이 도는 순찰이었기에 무천과 운휘가 최상층에 도달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퍽!
뒷목을 맞은 무사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운휘는 그를 안아들고 조심히 눕히며 고개를 들었다.
“여깁니까?”
“응.”
“희한하군요. 비고라면서 고작 한 명만 순찰을 돌고 있다니.”
“그거야 극소수를 제외한 아무도 여기에 비고가 있는지 모르거든. 거기에 이 패를 지녀야만 문을 열 수 있어. 강제로 열려고 하면 천악비고 전체가 봉인되어서 절대 열 수가 없게 되지.”
무천은 자신의 앞에 있는 거대한 벽으로 다가갔다. 그 중앙에는 마귀의 얼굴 형상이 새겨져 있었고 마귀가 벌리고 있는 입에는 주먹만 한 홈이 파여져 있었다.
무천은 품속에서 천악패를 꺼내 들고는 그것을 홈에 박아 넣었다.
철컥!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들리자 손을 빼낸 무천은 조용히 기다렸다.
곧 마귀의 입이 오므라들며 천악패를 삼켜 버렸다. 그러자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마귀의 얼굴이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그긍!
벽이 갈라지자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천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어두컴컴한 어둠 때문인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천은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지 걸어가며 품속을 뒤적거렸다.
화악!
꺼내든 화섭자에 불을 붙이자 어둠이 밀려 나갔다.
뒤따라 들어온 운휘는 밝혀진 공동의 모습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동 안에는 빼곡하게 책장이 늘어져 있었고 그 책장마다 수많은 두루마리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운휘가 눈을 찡그렸다.
“여기가 비고입니까?”
“응.”
“두루마리뿐이 없잖습니까.”
“맞아. 하지만 저 두루마리 안에는 천악각의 모든 것이 담겨 있지. 말했잖아. 비고라고, 무고가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여기가 진짜 천악비고가 아니라는 거야.”
“예? 그럼…….”
운휘의 의문에 무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짜지. 저 두루마리 속에 담겨진 정보 역시 한물간 정보거나 싸구려들 뿐이야.”
“그럼 왜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겁니까?”
“만에 하나 천악비고가 털린다면 진짜보단 가짜가 털리는 게 낫잖아? 그리고 진짜 천악비고는 사부님하고 천악각주 외에는 아무도 몰라. 아마 천악부각주도 그 존재를 모를걸?”
운휘는 무천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사실을 당신은 어찌 알고 있냐는 뜻이었다. 무천은 그런 운휘의 시선에 히죽 웃었다.
“알려고 하지 마. 큰 코 다쳐.”
“끙. 그럼 여긴 뭐하러 온 겁니까? 설마 저 두루마리 속에 무슨 보물지도라도 숨겨져 있습니까?”
운휘의 투덜거림에 무천은 품속에서 작은 단합을 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자 작은 살구 크기의 구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색으로 빛나는 구슬을 하나 집어든 무천은 그것을 운휘에게 건넸다.
“여기에 내공을 주입해. 그러니까 느낌상으로 이 구슬의 반 정도를 내공으로 채운다고 생각해. 적당히가 아닌 정확하고 완벽해야 해. 할 수 있지?”
“그거야 간단한 일이지만 이건…… 경천뢰잖습니까?”
운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경천뢰를 받아들며 묻자 무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응. 여길 폭파시킬 거거든.”
“……!”
콰어어엉!
거대한 섬광과 함께 웅장한 굉음이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운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단 기절시켰던 사람들을 일제히 깨우고 몰래 빠져나와 인명 사상은 없을 거라 여기지만 그거와 달리 이건 문제가 있었다.
운휘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천악각의 지붕이었을 기와 잔해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가 있었다.
그때 문득 괴공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놈은 그냥 미친놈이야! 네놈은 정상인 거 같아서 충고하는데 결코 저놈 곁에 있어서 좋은 꼴 못 볼 거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에라도 저놈에게서 떨어져!”
그땐 상당히 화가 났었지만 지금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고개를 돌려 무천을 바라보니 그 역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운휘가 물었다.
“어쩔 겁니까? 이거 장난으로 안 끝납니다. 내 장담하는데 공자님이라도 사실이 밝혀지면 백 년 동안 뇌옥살이입니다.”
무천의 고개가 천천히 운휘에게 돌아갔다. 무천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설마 이 정도일지는 나도 미처 몰랐어.”
제3장 대신회의(大臣會議)(1)
“음냐음냐……. 달샘아!”
마희운은 요번에 새로 들인 첩의 이름을 부르며 방바닥을 뒹굴었다. 해가 뜬 지 오래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저벅저벅!
그가 잠든 방 밖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마희운이 잠든 방문 앞에 멈춰섰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리며 붉은 무복을 걸친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형한 눈빛을 뿜어대는 그들은 원래 그런 것인지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들 중에 제일 먼저 방으로 발을 들여놓은 이가 뒤따라온 무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옆에 있던 무사가 손에 들린 양동이를 마희운 얼굴에 뒤집었다.
촤악!
“어푸! 뭐, 뭐야!”
찬물이 폭포수처럼 마희운의 얼굴을 적셨다. 마희운이 벌떡 일어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무사가 양동이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네놈!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알고 있소.”
대답은 그의 옆에서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이들과는 달리 허리에 황금 띠를 두른 사내였다.
그는 마희운의 앞으로 가며 허리춤에 메인 거무튀튀한 끈을 손에 들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마희운으로 하여금 눈이 튀어나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감찰단 제오조장 인태호요.”
“감찰단? 감찰단에서 왜 나를?”
“오늘 새벽. 천악비고가 날아갔소.”
“뭐?”
천악비고가 날아갔다니.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마희운은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았는지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인태호는 그런 마희운의 모습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술병이 주변에 어지럽혀져 있는 것이 꽤나 크게 한판 벌인 것 같았다. 그 광경에 실소를 흘린 인태호는 손에 들린 끈을 마희운에게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천악부각주 마희운! 그대를 련주님의 명으로 체포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