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1화
제4장 그녀는 예뻤다(2)


마희운이 고개를 숙였다. 엄태화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마희운이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였다. 때문에 마희운은 어떤 일을 할 때 몇 번이고 일을 검토하고 진행하였다. 그런 그를 함정에 빠트렸다는 것은 그만큼 대공자가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나에게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그가 후계 자리에 앉기 위해 우리를 경계해서 그런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야. 하지만 그가 본 각의 힘을 줄여놓으려고 한 것만은 확실하네.”
“면목이 없습니다.”
마희운은 진심으로 사죄했다.
자신의 선에서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엄태화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함께 책임을 짊어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엄태화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만큼 엄태화에 대한 자신의 충정이 깊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엄태화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후회해 봐야 뭘 하겠는가.”
“분하지 않습니까?”
마희운이 고개를 들어 엄태화를 바라보았다.
그가 실소를 흘렸다.
“분하지. 그렇기에 이렇게 자네를 찾아온 것 아니겠나.”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근신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지.”
확실히 근신인 상태에서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근신을 받고도 활동을 계속한다면 다시 감찰이 뜨게 되고 활동한 이유가 밝혀진다면 이번엔 근신이 아닌 뇌옥이었다. 아니, 뇌옥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기태천의 눈 밖에 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복수는커녕 재기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일단은 기다리도록 하세. 일단은 말이지.”

* * *

이십 일 후.
연공실을 나서는 화운의 얼굴에는 깊은 근심이 깃들어 있었다. 다름 아닌 얼마 전에 본 여성 때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
어떻게 보면 어리다고 할 수 있지만 사내로서 가정을 이룰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리고 화운에게는 이성의 감정을 처음으로 느낀 나이였다.
그때도 어느 날과 같았다.
수련을 끝내고 연공실에서 나온 화운은 바람이라도 쐴 겸 자신의 거처 뒤에 자리 잡은 정원으로 향했었다.
정원에 도착한 화운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기상이 담겨 있던 그의 눈동자는 마치 태풍을 맞이한 갈대처럼 흔들렸고 가슴을 두들기는 심장은 전장의 북처럼 쿵쾅거렸다.
십 수년간의 수련으로 단련되어 온 튼튼한 다리는 백만 대군을 맞이하는 일개 졸병처럼 후들거렸다.
화운의 시선이 고정된 그곳.
그곳에는 그녀가 있었다.
정자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담긴 눈빛을 화운은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애처로울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이 어찌하여 저리 안타까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긴 머리카락이 찰랑이는 순간 그녀의 고개가 화운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화운은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화운은 그 자리에서서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 역시 화운을 바라보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그 순간은 한 시녀로 보이는 여성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순간 깨져 버렸다.
그녀는 시녀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운은 발에서 뿌리가 돋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심마인가.’
그때의 일을 떠올린 화운은 땀에 젖은 손을 강하게 쥐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심마인가 싶었다. 하지만 무공을 연마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화운은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본 날부터 화운은 거처로 향하지 않고 매일 정자로 향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장소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시켜서 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이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언제나 그곳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아!”
정자에 도달한 화운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며칠 동안 찾아다녀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정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여전히 깊은 애(哀)를 품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다보던 화운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한 발 앞으로 내밀었다. 무공을 접했던 그날처럼 화운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어렵게 내민 첫발과는 달리 화운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자에 발을 들여놓고 가까이에서 그녀를 바라보자 멈춰 서고 말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보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고민했던 말들은 전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화운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놓인 어린 새와도 같았다.
스륵.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려 화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화운은 다시 한 번 전율을 느껴야 했다.
“흠흠!”
얼굴이 붉어진 화운은 괜스레 헛기침을 내뱉으며 포권을 취했다.
어차피 내친걸음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말이라도 걸어봐야 적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 안녕하시오. 화운이라 하오.”
“…….”
그녀는 화운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지닌 슬픔이 그렇게 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며칠 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시오?”
만나긴 뭘 만났단 말인가.
단순히 멀리서 마주보기만 하지 않았던가.
질문을 꺼냈던 화운은 곧바로 자신의 말을 후회하며 자책했다. 그때 그녀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아!’
그 반응에 화운인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다행히 그녀는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소저의 성함을 알 수 있겠소?”
화운은 이미 바싹 말라 버린 입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긴장한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사부인 기태천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화운을 응시했다. 화운 역시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그런 둘 사이에 고요함이 내리앉았다.
‘꿀꺽!’
화운이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손은 이미 축축이 젖어 있었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화란(花蘭).”
모기 소리마냥 작은 미성이 화운의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화운에게는 청천벽력이 치는 소리였다.
‘란! 이처럼 그녀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화운은 그녀의 이름에 또다시 감탄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혀서일까. 화운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그녀에게 다가갔다.
화란의 앞으로 다가간 화운은 무릎 위에 얌전히 포개 놓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화란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운은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적진을 가로지르는 선봉장처럼 거침이 없었다.
“나와 혼인해 주시오!”
“…….”

화운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볼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볼은 아직도 얼얼했고 뜨거웠다.
남자의 손이 철퇴와도 같다면 여자의 손은 날카롭게 선 검과도 같다 했던가. 그만큼 그녀의 손길은 매웠다.
‘무례하군요.’
아직도 그녀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오늘 뭐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녹이 슨 문지방처럼 화운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그곳에는 어느새 찾아온 시녀와 함께 멀어지는 화란의 모습이 보였다.
화란은 천천히 그리고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화운은 다시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따뜻하다.’
그녀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화운은 그 온기가 사라질까 두려운지 볼을 덮은 손을 내려놓지 못했다.
열여덟의 어느 날.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감정은 산들바람을 타고 날아와 화운의 가슴에 열화와도 같은 불을 지폈다.

* * *

무천은 깊은 어둠 속을 응시했다.
이곳이 어딘지는 모른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친숙한 기분이 드는 공간이었다.
‘여긴……?’
주변을 둘러보아도 어둠뿐이었다.
분명 자신은 운휘와 함께 술잔을 나누다 그대로 잠이 들었었다.
‘응?’
그때 무천은 따뜻한 느낌에 흠칫 놀라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올라 있는 손.
마치 불덩이를 얹어놓은 것 같았다.
손에서 피어오른 불길은 빠르게 무천의 몸을 침식해 갔다.
그 광경에 무천은 적지 않게 놀랐다.
이 현상이 무슨 현상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염화심법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는 순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내공이 사라진 이상 결코 나타나지 말아야 할 현상이었다.
무천이 무슨 생각을 하던 불길은 무천의 어깨를 타고 가슴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배꼽에 도달한 순간 비어 있던 단전이 꿈틀거렸다.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결코 한기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거늘 단전에서 솟아나오는 기운은 극한의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 극한의 기운이 불길과 맞닿자 단전을 차지하기 위한 거친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단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그 기운들은 서로를 할퀴고 헐뜯으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 여파로 인해 무천은 단전이 찢어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그 순간 무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내공을 잃었던 그날.
자신을 삼켜 버렸던 문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공간을 가로지르듯 천천히 열린 문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 쏟아져 나온 빛은 칠흑처럼 검은빛이었다.
그 빛은 무천의 온몸을 휘감았다.
‘끄으윽!’
무천이 이를 악물었다. 갑작스레 엄습해 오는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다. 무천은 멀어져 가는 정신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