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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제5장 모사재인(謀事在人)(3)
엄태화는 갑자기 날아온 호출에 태청으로 향하였다.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해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이미 도착해 있던 것인지 태사의에 앉아 있는 기태천을 본 엄태화가 고개를 조아렸다.
“어서 오게. 이른 댓바람부터 불러 미안하군.”
“아닙니다. 련주님께서 부르신다면 맨발로도 달려와야지요.”
“일단 자리에 앉게나.”
“예.”
엄태화는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주변을 둘러보니 불려온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지악각주 종리우와 인악각주 태무종이 서로를 마주보며 자리하고 있었고 무슨 일 때문인지 낯빛이 어두운 암영각주 역시 자리했다.
엄태화는 각주들과 간단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분위기가 적잖게 무거웠기 때문이다.
대청이 조용해지자 사무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일단 일이 급해 여기 계신 분들만 호출하였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종리우가 물었다.
사무언은 기태천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 새벽. 암영각에 한 가지 정보가 날아왔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사가장(沙嘉莊)을 멸문시키고 호연세가(皓燕勢家)로 진격 중이라 합니다.”
“호연세가로?”
정파무림에 오대세가가 있으면 사파무림에는 칠대세가가 있었다. 그 칠대세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호연세가는 세검(細劍)으로 이름을 날린 집안으로서 사마련에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가문이었다.
특히 호연세가의 가주 연비검(燕飛劍) 호연중은 두 자루의 세검을 귀신같이 다루는 절정고수로 무림혈전 당시 수많은 정파고수를 베어 공적을 쌓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지원 요청을 해온 것이오?”
“그렇습니다. 사가장을 멸문시킨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나 단 하루 만에 멸문시켰을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빠른 속도로 호연세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지도 않고 말입니다.”
“음…….”
각주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비록 변방의 문파라고는 하나 사가장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칠대세가를 비롯한 사파 십오대 문파에는 들지 못했으나 언제든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문파였다. 그런 문파가 단 하루 만에 멸문당했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본인이 가겠소.”
“지악각주님께서 말입니까?”
종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을 열자 붉은 수염이 씰룩였다.
“그렇소. 내가 가서 감히 사파를 능멸한 그놈들을 육시하고 오겠소이다. 본인이 이끄는 혈천검대(血天劍隊)라면 능히 그놈들을 소탕할 수 있을 것이오.”
그 말에 사무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종리우가 직접 키우다시피 한 혈천검대는 하나하나가 일류고수로 이루어진 타격대로 사마련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강한 집단이었다.
“지악각주님께서는 지악각의 일이 있을 테니 자리를 비우지 않는 것이 옳다 생각됩니다.”
그때 엄태화가 입을 열었다.
대중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자 엄태화는 다시 말했다.
“지악각주님께서는 일단 고정하시고. 혈천검대 그리고 혈랑대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혈천검대는 본 련의 중요한 전력입니다. 하지만 상대의 무공 역시 범상치가 않아 보이니 혈랑대까지 함께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혈천검대를 무시하는 것이오?”
종리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주뼛주뼛 서 올랐다. 그가 흥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엄태화는 그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혈천검대의 위력은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혈천검대에 타격이 가해지면 본 련으로서는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혈랑대 역시 함께 보내는 것이 옳다 생각됩니다.”
“흥!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오!”
코웃음을 친 종리우가 고개를 돌려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결정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대중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자 기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본 련에는 못 미친다고는 하나 사가장 역시 강호였던 가문. 그러한 곳이 단 하루 만에 멸문당했네. 지악각주가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리고 천악각주의 말대로 혈랑대도 끌고 가게. 처절하게 밟아 다신 그 누구도 본 련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하란 걸세.”
“물론입니다. 련주!”
고개를 끄덕이며 호탕하게 말한 종리우가 엄태화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엄태화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련주님께 한 가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뭔가?”
“그곳에 무천 공자님을 함께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아이를?”
“예.”
기태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단번에 그의 의중을 파악한 것이다. 그 옆에 있던 사무언이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아니 됩니다! 그곳은 혈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곳입니다. 만약 대공자님께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스윽!
기태천은 턱을 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의 말대로 그곳은 전쟁터가 될 수 있었다. 아니, 될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사가장을 단 하루 만에 멸문시킨 단체였다.
아무리 혈천검대와 혈랑대라지만 그런 그들이 겁먹고 도망갈 리는 없었다. 그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호연세가를 치려는 것일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뭔가?”
“호연세가는 사파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놓은 곳입니다. 그런 곳에 대공자께서 친히 가셔서 힘을 빌려주신다면 호연세가도 그렇고 사파 동도들도 그렇고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 련에 득이 되면 되었지 결코 실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공자님께서는 내공을 잃어 무공을 사용하진 못한다지만 지략 역시 출중하신 분이 아닙니까?”
“안 됩니다. 차라리 화운 공자님을 보내시지요. 그곳은 무천 공자님께서 가시기에 너무 위험한 곳입니다.”
사무언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다시 외쳤다. 하지만 엄태화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화운 공자님께서는 지금 연공 중이십니다. 그리고 무천 공자님도 본 련의 떳떳한 대공자이십니다. 거기에 나이도 나이인 만큼 이제 슬슬 세상에 나오셔서 천하를 굽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이를 함께 보내자?”
“예.”
기태천의 물음에 엄태화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사무언이 기태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만에 하나 공자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군사. 그 말은 날 믿지 못한다는 것이오?”
그때 종리우가 그의 말을 잘랐다. 시선을 돌리니 그가 누런 이를 드러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걱정 마시오. 공자님은 내가 지킬 터이니.”
사무언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저런 무식한 새끼! 이렇게 대가리가 안 돌아가는데 걱정 안 될 턱이 있냐!’
사무언은 엄태화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었다. 난전이 벌어질 위험이 높은 호연세가에 무천을 보내 그를 없앨 심산인 것이다. 혼전을 틈 타 무천에게 해를 가한다면 무천은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절명하고 말 것이다.
“그러도록 하지.”
“련주님?”
그때 태사의에서 흘러나온 음성에 깜짝 놀란 사무언이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기태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게. 지악각주는 무천 그 아이와 함께 호연세가로 향하게나.”
“존명!”
사무언은 굳은 얼굴로 시선을 돌려 엄태화를 바라보았다. 엄태화는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취하는 종리우의 모습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암영각주님.”
“음? 아! 무슨 일입니까?”
대청을 빠져나가던 암영각주 무전은 뒤에서 자신을 붙드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엄태화가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정보를 담당하는 단체의 수장답게 무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가 자신을 보자고 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 따로 자리를 만들어 만난 적도 없었고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 그렇습니다.”
“흠…….”
상대는 사마련 삼대 세력에 속하는 천악각의 각주였다. 결코 누구에게 고개를 숙일 자리는 아닌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자리를 요청하고 있었다.
“알겠소.”
무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쓰는 것보단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주군! 어째서 공자님을 함께 보내신 겁니까? 필시 천악각주는 공자님을 해하려 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주군!”
사무언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답하는 기태천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 기태천이 그를 불렀다.
“이보게.”
“말씀하시지요.”
“자네는 무천 그 아이가 언제까지 온실 속에서 자라길 바라는가?”
“예?”
“만약 무천 그 아이가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그 아이는 더욱 큰 힘을 지니고 돌아오게 될 것이야. 그렇게 된다면 천악각주 역시 쉽사리 그 아이를 상대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사무언은 기태천이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했다.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무천을 성장시킬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부가 제자에게 주는 마지막 가르침이라 생각하게. 이 정도 위기는 넘길 수 있어야 이 강호에서 살아갈 것 아닌가?”
* * *
“뭐?”
갑작스런 호출에 염천각을 다녀온 운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천의 가슴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호연세가에…… 다녀오시랍니다.”
“갑자기 왜?”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호연세가를 친다는 정보가 들어왔나 봅니다. 그래서 본 련에서 지원을 하는데 공자님도 함께 다녀오라 하십니다.”
“…….”
단지 혈전이 벌어질지도 모를 장소에 가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무천의 심장이 고동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호연세가의 장녀. 호연애린.
무림에서 흑도사화(黑道四華) 중 한 명에 속하고 무천의 약혼녀였던 여자다. 하지만 무천이 내공을 잃은 직후 약혼은 곧바로 파기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자주 오던 연서(戀書)도 그날로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