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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제5장 모사재인(謀事在人)(4)


무천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알고 있는 운휘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여?”
“…….”
실소를 지은 무천은 호연애린을 떠올렸다.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다.
여자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처음 느꼈던 여자가 바로 그녀였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여자가 그녀였다.
그래서일까. 무가의 딸로 태어나 내공을 잃은 자신을 버린 것은 이해하나 그래도 적잖게 상처를 입었었다.
나쁜 여자라고 욕이나 실컷 하고 떠내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무천은 아직도 그녀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감싸던 그녀의 손길은 그만큼 따뜻했고 그녀의 눈길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무천에게 그녀는 연인이자 어머니이자 누이이자 친구였다.
“누가 날 보내라고 했는데?”
“련주님의 명이십니다.”
“사부님이 날 정말 미워하나 보군. 그래서 나 말고 또 누가 가는데?”
“지악각주님과 혈천검대. 그리고 혈랑대가 간다더군요.”
“그 양반이?”
무천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예. 호연세가를 치는 무리들은 사가장을 단 하루 만에 멸문시켰다고 합니다.”
“……!”
무림에 관심을 끊은 지 꽤 됐으나 그래도 사가장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고 있는 무천이었다.
무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내리깔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출발은 언제야?”
“두 시진 후입니다.”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게나. 이리 와서 앉게.”
엄태화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오는 공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공각은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미안하군. 바쁜데 불러서.”
“아닙니다.”
“이번에 내려온 명령은 들었겠지?”
“예. 호연세가로 향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그래. 자네와 혈랑대가 가서 힘을 써줘야겠네.”
“음……. 헌데 그들의 정체는 알고 계십니까?”
엄태화는 고개를 저으며 찻잔에 찻물을 부었다.
그윽한 향이 찻잔에서 흘러나오자 잔을 공각 앞에 내려놓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네. 그들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하지만 범상치 않은 자인 것만은 분명하지.”
“그래 봐야 겁없이 달려드는 승냥이 떼에 불과할 겁니다. 감히 겁도 없이 본 련의 영역으로 다가오다니.”
공각의 말에 엄태화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두 개의 서찰을 꺼내 그의 앞으로 내려놓았다.
푸른빛과 분홍빛이 감도는 서찰은 마치 연서를 연상시키듯 했다.
“이건…….”
“대공자도 함께 간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푸른빛이 도는 서찰은 호연세가의 장녀 호연애린에게. 그리고 분홍빛이 도는 서찰은 호연세가에 도착 후 대공자에게 전해주게.”
“예?”
엄태화는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네를 함께 보내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라네.”
“…….”
공각의 시선이 연서로 가 닿았다. 그의 머리가 순간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어느 결론에 도달하자 눈을 번뜩였다.
“대공자를…… 없앨 심산이시군요.”
“왜? 싫은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지인각주가 함께 가잖은가?”
엄태화의 담담한 대답에 그의 계략을 엿본 공각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흘렸다.
그는 기다릴 줄 아는 자였다.
상대방에게 한번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보통 사람은 분노 때문에 알맞은 판단을 내릴 수 없거나 어떻게든 빨리 복수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냉정을 유지하여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완벽한 계획을 짜놓고 거기에 두 겹 세 겹 보험을 들어 놓는다. 그의 계략에 걸린 자는 위기를 넘겨도 또 다른 위기가 그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정녕 그가 무서운 점은 어떤 일에도 자신이 개입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아마 지악각주 역시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하고 그의 꾐에 넘어갈 것이다.
“그럼 그가 죽는 순간 곧바로 화운 공자님께서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시겠군요.”
“아니, 시간은 좀 걸릴 것이네.”
“예?”
“우리는 대공자가 죽은 것을 숨길 것이야.”
“어째서 말입니까?”
엄태화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공각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대공자가 죽는다면 분명 본 련은 범인을 찾기 위해 수색을 시작하겠지. 하지만 나오지 않는 범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을 거야. 단서조차 나오지 않으니까 말일세. 하지만 행방불명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거기에 호연세가의 장녀조차 사라진다면?”
“……도피로 여기겠군요.”
“결국 수색은 흐지부지되고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겠지. 이미 련주님께도 버림받았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안다네. 그리고 그가 고작 계집 때문에 대공자의 자리를 버렸다는 것을 화운 공자가 알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엄태화가 입을 닫으며 다시 자신의 찻잔에 찻물을 따르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공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운 공자가 대공자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공자가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면 분명 화운 공자는 그에게 크게 실망할 테고 스스로 후계자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눈엣가시도 없애고 거기에 화운 공자의 마음도 굳힐 수 있는 계략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는 없네.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하지 않던가? 하지만 대공자가 아무리 뛰어난 지략을 지니고 있다고는 해도 걸려들 수밖에 없을 거네. 자신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흐흐흐. 그렇군요.”
공각이 소름 끼치는 웃음을 흘리며 서찰을 자신의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게나.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촉박할 터인데 괜히 시간을 빼앗았군.”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공각은 예를 취했다.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내 기대하고 있겠네.”
그 말을 끝으로 공각은 집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엄태화의 옆으로 검은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엄태화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삶아야겠지.”
“존명.”
검은 인영이 나타났을 때처럼 다시 몸을 숨기자 찻잔을 들어 올리는 엄태화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무천이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혈천검대와 혈랑대가 도열에 있었다. 그리고 종리우가 단상 위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등에 메인 혈루검이 흔들거렸다. 무천을 발견한 것이다.
천하 십대 보검에 드는 혈루검을 메고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위풍당당했다.
“대공자. 어서 오시게.”
“오랜만입니다. 지악각주님.”
“허허! 그렇군. 이거 갑작스레 호연세가로 간다고 해서 당황했나 모르겠네.”
“적잖게 놀랐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자네는 내가 지키도록 하지.”
“말씀만이라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천이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종리우는 그런 무천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종리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엄태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전형적인 무인인 종리우는 무인보단 모사에 가까운 엄태화를 그렇게 좋게 여기지 않았었다.
무천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내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생활하는 그의 모습이 참다운 사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 출발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종리우는 엄태화에게서 몸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태화는 그런 종리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한 발 다가갔다.
“실은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각주님께만 말씀드리고 싶군요.”
엄태화가 옆에 있는 무천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무천이 웃음을 흘렸다.
“저에게도 비밀이 생긴 겁니까?”
“대공자께도 말씀드리고는 싶으나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일이라서 말입니다.”
“그렇다면야 뭐 할 수 없지요.”
무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반달로 휘어진 무천의 눈가가 번뜩였다. 엄태화의 말에서 알 수 없는 냄새를 맡은 것이다.
몸을 돌리는 바람에 그 눈빛을 보지 못한 엄태화는 무천이 멀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주변 삼 장 안에 둘만이 남게 되자 종리우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여기 이것을 가져가시지요.”
엄태화가 품 안에서 붉은 봉투에 담긴 서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는 종리우는 서찰을 살피며 물었다.
붉은 실로 봉인되어 있는 것이 상당히 중해 보이는 서찰이었다.
“이건?”
“암영각주가 비밀리에 얻은 정보입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는 뭐해 이렇게 서찰로 준비했습니다. 꼭 호연세가에 도착하는 즉시 열어보시지요.”
“암영각주가?”
종리우가 이채를 발했다.
암영각주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사적인 마음은 잠시 접어 두고 엄태화의 말에 따라야 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소.”
종리우가 서찰을 품속으로 갈무리하자 엄태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 수하들을 살피고 있던 공각과 눈이 마주쳤다.
공각이 그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엄태화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한편 종리우와 엄태화로부터 멀어진 무천은 운휘와 함께 멀찍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냄새가 나.”
“뭐가 말입니까?”
“이번 일…… 천악각주가 개입된 것 같아.”
“그렇다면?”
운휘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개입됐다면 그의 복수가 시작됐다는 말과 같았다.
틀림없이 온갖 계략으로 무천의 신변을 위협할 것이다.
무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 새는 둥지를 떠나면 목숨을 잃는 법. 아무래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될 것 같군.”

사마련의 정문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종리우가 이끄는 혈천검대와 혈랑대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