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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제5장 모사재인(謀事在人)(5)


칠흑의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천천히 말을 몰고 있는 종리우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장수와도 같았다. 그의 등 뒤에 메인 묵직해 보이는 중검은 적을 단번에 쪼갤 것처럼 위압적이었다.
그 모습에 압도당한 사람들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그런 행렬을 따라 뛰어다녔다.
그런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한 노인이 눈을 빛내며 숨죽이고 있었다. 그 노인의 시선은 종리우의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무천에게 꽂혀 있었다. 바로 괴공 견자생이었다.
무천이 돌아간 후 집에 들어간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고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뻥 뚫려 있는 지붕이 들어왔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폭뢰비를 숨겨놓은 벽지를 뜯어냈다. 그러자 들어난 텅 빈 공간.
직감적으로 무천의 짓이란 것을 알아차린 그는 곧바로 무천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무천은 이미 내당으로 들어간 후였고 사정상 정체를 밝힐 수 없던 그는 내방 밖에서 무천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내당이 보이는 건물의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는 지나가던 무사들이 하던 말을 듣고 말았다.
대공자가 호연세가로 간다!
그 말을 들은 견자생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호연세가로 갈 준비를 하고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무천을 쫓는 견자생의 눈이 순간 이채를 발했다.
무천이 오른손에 착용한 폭뢰비가 보인 것이다. 소매로 감춘다고 감췄지만 손 부분은 들어날 수밖에 없었다.
‘씹어 먹을 놈! 육시랄 놈! 감히 그게 어떤 물건인데!’
견자생의 눈으로 실핏줄이 튀어나왔다.
일생 동안 연구한 결실이 담겨 있는 물건이었다.
무림에 내놓으면 천금을 주고도 못 구할 비보 중에 비보라고 장담하는 그였다. 그것을 빼앗긴 견자생은 지금 당장에라도 무천을 덮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지금 나선다면 틀림없이 뼈도 못 추리리라.
안전하게 폭뢰비를 회수하려면 무천이 홀로 남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혹시나 싶어 만리추종향(萬里追從香)을 폭뢰비에 발라놨었다. 그 향만 남아 있다면 그 어디를 가든 추적할 수 있었다.
견자생은 점점 멀어지는 무천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제6장 호연세가(皓燕勢家)(1)


호연세가주 호연중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전서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미 일은 진행될 만큼 진행되었고 더 이상 물러 설 곳은 없었다. 죽이 되나 밥이 되나 앞만 보고 달려가야 했다.
“염화대성이 혈천검대와 혈랑대를 끌고 온다는구려.”
“호, 제법 강단 있게 나오는군요.”
“사마련의 일처리가 그렇소. 다신 그런 자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밟을 때 확실히 밟아 놓지. 압도적인 전력으로 말이오.”
“그렇구려. 하지만 그 정도로 나서 주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곤란할 거요. 최대한 많은 전력을 이끌어 낼수록 이득이니까.”
호연중은 힐끗 시선을 들어 앞에 앉아 있는 중년인, 마철강을 바라보았다.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다른 표정은 전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때문에 그와 알고 지낸 지도 꽤 되건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속내가 무엇인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걱정 마시오. 호연세가는 무림의 으뜸으로 자리 잡게 될 거요.”
마철강이 호연중의 생각을 읽은 듯 내뱉었다. 그 말에 호연중은 실소를 지었다.
“무림의 으뜸으로 불리는 문파와 가문이 수두룩하게 나타나게 되겠구려.”
“하하! 그래야 계획을 잘 따라 줄 것 아니오? 본래 사냥개를 조련할 땐 먹잇감을 주고 시작하는 것이오.”
“본인은 견(犬)이 아니오.”
“물론 잘 알고 있소. 그러니 내가 이렇게 와서 함께하고 있는 것 아니겠소? 그분께서도 호연세가를 중히 여기고 있다오. 이번 일만 성공적으로 성사된다면 분명 그만한 보답이 내려질 것이오.”
“보답이라…….”
보답은 이미 상당히 받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인지 천년설삼(千年雪蔘) 세 뿌리와 만년설삼(萬年雪蔘) 한 뿌리를 보내온 것이었다.
천년설삼만 해도 한평생 보지 못한 영약이었다. 그런데 만년설삼은 오죽 하겠는가.
호연중은 만년설삼을 얻음과 동시에 그것을 섭취하고 연공에 매달렸다. 그 덕에 삼십 년의 내공 증진과 함께 엄청난 성취를 얻어내었다. 지금 상태라면 아무리 종리우라도 자신을 쉽게 상대하지 못할 것이다.
“전과 같은 보답이 계속 내려진다면 목숨이라도 팔 무인이 이 무림에는 수두룩할 것이오.”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들 가주만 하겠소?”
마철강의 말에 호연중은 미소를 걸쳤다.
마치 혀에 꿀이라도 바른 듯 그의 말은 달콤했다. 하지만 호연중은 알고 있었다. 사람을 다를 줄 아는 이런 사람이 진정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그럼 그렇게 알고 물러가겠소.”
“그러시오.”
마철강이 몸을 일으키자 호연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들고 있던 서찰로 시선을 주었다. 마철강은 그런 호연중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드륵!
문을 열자 나타난 여성에 마철강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호연세가의 장녀 호연애린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내린 그녀는 과연 무가의 여식답게 여장부의 기운을 흘렸다.
날카로운 두 자루의 세검을 허리에 찬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마철강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인사였지만 오히려 그녀의 도도한 매력을 한층 더 덧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마철강은 눈을 빛냈다.
“이거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지시는구려.”
“과찬이십니다.”
“아버님께 볼일이 있으신 거요?”
“그런 것까지 말씀드려야 하는 건가요?”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마철강은 고개를 저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럴 리가 있겠소? 이거 식객이 너무 주제넘었구려. 사과드리리다.”
“아니에요.”
호연애린은 빠르게 그를 지나쳐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언제 봐도 꺼림칙한 기운이 가시지 않는 그였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살갑게 대하고 싶어도 뱀의 시선과도 같은 그의 눈빛에 언제나 주눅이 드는 그녀였다.
그 모습을 감추기 위해 항상 차갑게 대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그가 너무도 무서웠다. 그리고 앞으로 가문에 닥칠 일 역시도.
“후우…….”
한편 마철강은 문을 닫고 사라진 그녀의 체취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달콤한 향이 폐부를 가득 매웠다.
아마 그분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녀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마철강은 잠시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다시 몸을 돌려 발을 놀렸다.

“왔느냐.”
“예.”
호연중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성취가 있은 후 직접 보지 않아도 숨소리 발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호연애린은 차분한 발걸음으로 그의 앞으로 가 섰다.
“이번에 그가 온다하더구나.”
“그라면?”
“사마련의 대공자 무천.”
“……!”
그녀의 기도가 일순간 흔들렸다. 그것을 느낀 호연중이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곱게 다문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풍파를 맞이한 갈대처럼 흔들렸다.
마철강과 만났을 때의 반응과 같았지만 그 안에 품고 있는 뜻은 달랐다. 그리고 호연중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 게냐?”
“…….”
“내공을 잃은 그는 더 이상 무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를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 게냐?”
“그분을 사모했던 것은 무공 때문이 아니에요.”
그녀의 대답에 호연중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남들에겐 절세미녀이자 여장부이자 모범이 되는 여성이었지만 부모인 자신이 보기에는 철부지에 불과했다. 아직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 때문이었다.
앞서 나간 마철강이 모시고 있는 사람이 호연애린에게 관심을 주고 있다는 것은 호연중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와 호연애린이 혼인이라도 하게 된다면 호연세가에는 그만한 힘을 등에 짊어질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보여준 능력은 사마련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무천이 내공을 잃자마자 바로 약혼을 강제로 파혼시키고 그녀를 그에게 보내려 했다. 하지만 아직도 무천을 잊지 못하는 그녀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고 있는 여자를 받아줄 남자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꾸욱!
그 말에 호연애린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호연중은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의 죽음을 보고 마음을 정리하여라. 그렇다면 너의 판단 역시 쉽게 설 것이다. 전부 너와 가문을 위한 일이다.”
“저와 가문이요?”
호연애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찡그린 그녀의 눈은 더없이 서글펐다.
“아니요. 아버지는 저를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오로지 가문만!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있죠.”
“…….”
“딸의 가슴을 찢어 놓으시더니 이젠 일말의 희망조차 짓밟아 버리시는군요.”
“너의 희망은 망상일 뿐이다.”
“아니요. 아버지의 욕심에 걸림돌이겠지요.”
“너도 곧 나를 이해하게 될 것이야.”
“아니요. 아버지를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차라리 자결하겠어요.”
결코 부모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호연중은 여전히 서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호연중이 들고 있던 서찰을 한쪽으로 치우고 옆에 놓인 양피지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그만 가보거라.”
“…….”
호연애린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한 방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말을 이렇게 했다지만 결국 자신은 아비의 말을 따르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에게 혈육은 영원히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와도 같았다.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만 나가거라.”
다시 한 번 호연중의 입에서 축객령이 떨어졌다.
분을 참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때문일까. 호연애린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