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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제6장 호연세가(皓燕勢家)(2)


그녀는 한동안 호연중을 노려보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게 되자 호연중은 고개를 들어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딸자식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모든 것이 가문을 위한 일이라며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만 제대로 진행된다면 호연세가는 다시없을 큰 호황을 누리게 될 것이다.
“후우…….”
다시 한숨을 내뱉은 그는 고개를 젓고는 양피지로 시선을 내렸다.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훑어가는 호연중의 눈가에 살기가 맺혔다.
‘이제 여기서 무림의 새 역사가 써질 것이다.’

* * *

사마련 외에 다른 곳에도 지원을 요청한 것인지 호연세가로 다가갈수록 많은 무인들이 모습을 속속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연세가 내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주점이나 객잔은 만원을 이뤘고 길거리에는 많은 무인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흉흉한 눈빛을 내뿜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무인들 사이에는 뛰어난 무인들도 있고 어눌한 초출도 있을 것이다.
호연세가에서 직접 지목하여 온 무인이 아닌 그들은 이번 기회를 삼아 명성을 날리기 위해 모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사가장이 단 하루 만에 멸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듯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천하를 울릴 명성을 손에 쥐느냐 아니면 불길로 뛰어드는 하루살이로 사라지느냐. 그것은 목숨을 건 도박과도 같았다.
무천 일행은 그들 사이로 말을 몰았다.
그들을 알아본 무인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사파 무인이라면 혈천검대와 혈랑대의 깃발을 모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혈천검대와 혈랑대의 위용은 사도무림을 넘어 중원 각지에 퍼져 있었다. 거기에 더하면 더했지 그들을 이끄는 종리우의 명성은 사파에서도 전설적이었다. 그의 정체를 몰랐다 하더라도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에 그 존재감이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들의 앞으로 인파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비연대(飛燕隊)다!”
누군가 외쳤다.
하얀 무복을 걸친 무리들은 절도 있는 걸음으로 걸어와 무천 일행 앞에서 멈췄다.
“비연대주 하연! 가주님의 명으로 사마련의 영웅분들을 마중 나왔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장 앞줄에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한 발 나오며 포권을 취했다.
무복에 금실을 단 그는 단정한 외모에 이제 갓 삼십 줄이 되어 보이는 외모였다. 그의 등장에 다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비연대주 하연! 정주의 삼객(三客)을 단칼에 죽인 자가 아닌가!”
“아니, 그뿐인가! 비연대주 하연이면 역대 비연대주의 최연소 대주가 아닌가? 그의 쌍검술은 날랜 제비와도 같다더군!”
삼객은 낯선 이방인처럼 세상을 떠돌며 사파무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냥꾼들이었다. 비록 사냥꾼이라지만 그들이 지닌 실력은 일류를 넘어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그들을 단칼에 벤 자가 바로 하연이었다.
종리우 역시 그의 명성을 들은 바가 있는지 말을 앞으로 몰아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우라 하네. 본 련에서 혈천검대를 이끌고 있지.”
“선배님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뵐 수 있게 되어 후배로서 무궁한 영광입니다.”
다시 고개를 숙인 하연의 몸에서 당당함이 흘러나왔다. 그의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종리우는 미소를 지었다.
“다 허명일 뿐이네. 그리고 여기 이분은 본 련의 대공자라네.”
하연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무천이 방긋 웃음을 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본 하연은 속으로 적잖게 당황했다.
사마련의 대공자에 대한 소문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가 속한 호연세가에서 그 때문에 파혼을 하지 않았던가. 그 누구보다도 소문에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 그였다.
“반갑습니다. 본 가를 위해 이렇게 귀한 걸음을 하시다니…….”
“사해가 동도라 위험하다면 당연히 도와야지요.”
하연의 인사에 무천이 답했다. 하지만 그런 대답에도 호연애린과 그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하연은 껄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희가 본가로 모시겠습니다.”
“그러게나.”
종리우가 그의 요구를 수락하자 하연은 몸을 돌려 자신이 데려온 수하들을 이끌며 길을 트기 시작했다.

호연세가에 다가갈수록 보이는 무인들 역시 많아졌다. 기광을 번뜩이며 주위를 살펴보는 그들의 모습에서 결코 하류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 무천은 혀를 놀렸다.
“마치 전쟁이라도 벌어질 것 같군.”
“같은 게 아니라 그럴 겁니다.”
운휘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무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데 말이야.”
“걱정 마시죠.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물론 운휘는 믿지. 다만 칼과 피가 튀기는 무대에서만 말이야.”
힘없는 무천의 대답에 운휘가 웃음을 흘렸다. 그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무천의 마음속에는 곧 벌어질 혈전 따위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걱정과 신경을 잡아끄는 존재. 바로 호연애린.
실제로도 무천은 그녀를 볼 생각에 가슴이 터질 듯 콩닥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고수들 앞에서도 기죽음 없이 당당하게 말하던 공자님이 한 여인 때문에 가슴을 졸이는 것을 세간의 사람들이 안다면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전에 대신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무천은 그의 말에 코웃음 쳤다.
“그러라지. 하지만 어떻게 해? 신경을 안 쓸려고 해도 절로 떠오르고 가슴이 뛰는 걸.”
“음…… 욕구불만 아닙니까?”
무천이 운휘를 힐끗 쳐다보았다.
“말만 하시죠. 당장에라도 춘화를 대령하겠습니다.”
“귀가 솔깃하긴 한데 지금은 춘화도 눈에 안 들어올 것 같다.”
“참으로 중증입니다.”
“나도 알아.”
무천은 투덜거리며 말을 몰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운휘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면 긴장된 마음도 어느새 풀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운휘에 대한 믿음이 깊다는 증거였다.
과거 내공을 잃고 속으로 적잖게 당황하고 절망했을 때도 운휘는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단순한 관심이라도 적잖게 큰 힘이 될 그 시기에 함께 있어 준 그는 형제와도 같았다.
“이곳이 바로 저희 호연세가입니다.”
그때 앞서 길을 가던 하연이 몸을 돌려 대답했다.
몇 번 와본 적이 있던 종리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난생처음으로 와본 무천은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시죠. 촌놈 소리 듣습니다.”
지나가는 듯한 운휘의 말에 무천은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호연세가의 정문을 바라본 무천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
무천은 벌써부터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건네야 할지 속으로 연습했다. 그런 그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혈랑대주 공각이었다.
공각은 다시 한 번 짠 계획을 검토하며 품속에 들어 있는 서찰을 느꼈다.
‘여기서 그는 죽는다.’
공각은 자신의 생각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호연세가로 들어가자 이미 호연중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호연중은 저자세를 취하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마치 하연의 당당함은 그에게서 물려받은 듯했다.
종리우가 말에서 내리자 다른 이들도 그를 따랐다. 그러자 호연중이 앞으로 한 발 나오며 포권을 취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종리우 대협.”
“허허. 오랜만이군. 호 가주. 그동안 별일 없었나?”
“이번 일만 무사히 지나간다면 태평성대를 누릴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럴 거야. 하연 같은 아이가 있는 걸 보면 호연세가는 틀림없이 무림에 드높은 명성을 떨치게 될 것이야.”
“대협의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주 기도가 출중한 아이더군. 그런 아이가 있는 한 호연세가의 앞날은 창창할 것이네.”
계속되는 종리우의 칭찬에 호연중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무천을 바라보고는 다시 포권을 취했다.
“이거 무천 대공자가 아니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의 인사에 대답하는 무천은 마음이 껄끄러웠다.
자신과 호연애린이 파혼할 당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원망스럽기도 하다만 그녀의 아비라는 것 때문에 그런 마음조차 갖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저번 일은 결례가 많았소. 부디 공자의 아량으로 이해해 주길 바라오.”
파혼했을 당시의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무천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당연한 겁니다. 다만 자녀분께서 마음의 고통이 심할 것 같습니다.”
무천의 말에 가시가 돋아났다.
마음속 깊이 누르고 있던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말로 튀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호연중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아이도 곧 이해하겠지요.”
순간 무천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그의 대답에서 그동안 오해하고 있던 사실 하나가 풀려났기 때문이다.
‘이해? 그렇다면 그녀는 아직……!’
무천은 진정되었던 가슴이 다시 뛰는 것을 느꼈다.
“자자! 이럴 것이 아니라 그만 안으로 드시지요.”
호연중이 몸을 옆으로 비키며 말하자 종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가의 안에도 역시 꽤나 많은 무인들이 있었는데 흘러나오는 기도가 세가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들 중 유독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는데 검은 무복과 자색 무복을 걸친 이들이었다.
형형한 눈빛을 뿌리는 그들은 누가 보더라도 일류의 무사들 같았다.
“천살문(千殺門)과 혈풍문(血風門)이군.”
그들을 발견한 종리우가 말했다.
천살문과 혈풍문은 호연세가보다는 못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실력자들이 있는 문파였다. 특히 혈풍문은 백년기재라 불리던 적사풍이 문주에 올라서면서 정파들도 혈풍문의 영역에는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다 하였다.
“예. 덕분에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군요.”
“다 자네의 복일세.”
종리우의 말에 호연중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처세술이 뛰어나고 정파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많은 무인들이 따르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이 상황에 모여드는 무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협께서 이렇게 오셨으니 본 가에 머물고 있는 동도들의 사기도 더욱 올라갈 것입니다.”
“과연 어떤 놈이 이곳에 겁도 없이 오는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군.”
종리우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