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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제6장 호연세가(皓燕勢家)(3)


호연중의 안내로 본관에 도달한 그들은 각자 머물 거처를 배정받았다.
무천은 운휘와 함께 한 방에 머물게 되었다. 대공자라는 신분에 독방이 아닌 것은 무례일 수도 있으나 무천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말에 호연중은 못 이기는 척 같은 방을 쓰게 하였다.
“반 시진 후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배가 고프시겠지만 조금만 더 참으시지요.”
“아닐세. 일이 바쁠 터인데 이렇게 신경 써 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당연한 거지요. 그럼 일이 있어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해가 저물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호연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종리우는 혈천검대 부대주와 공각을 불러 간단한 지시를 내린 후 자신이 배정받은 거처로 향하였다.
“각각 배정받은 숙소로 가 휴식을 취한다.”
종리우가 모습을 감추자 혈천검대 부대주와 공각이 수하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무천과 운휘 역시 자신의 방으로 향하였다.
안내하는 시녀를 따른 무천은 주위를 기웃거렸다.
세가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컸다.
사마련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무천은 마치 다른 세상에라도 온 듯 신기해 했다.
“그러고 보니 운휘는 몇 번 무림에 나간 적이 있었지?”
“예.”
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무천이 내공을 잃기 전 그가 연공에 들 때 각주들의 요청으로 몇 번 임무에 나선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무천이 내공을 잃고 사 년 전의 임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에게 임무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운휘의 얼굴에 그림자가 비췄다.
“다른 문파들도 이렇게 커?”
“그런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지요. 하지만 단일 세가가 이렇게 큰 곳은 저도 처음입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무천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지원 온 무사들 때문에 사람이 많이 보이지만 평소에는 꽤나 한적할 것 같았다. 항상 사람이 붐비기만 하는 사마련에 비해서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장소였다.
인공으로 만든 호수에 걸친 다리를 넘어 이층으로 이루어진 숙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연세가에 딸린 별관으로 귀빈들이 찾아오면 머물게 하는 객실이었다.
본래라면 종리우도 이곳에 머물러야 했지만 총책임자로 온 그였기에 언제든 빠르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본관으로 배정받았다.
“이곳입니다.”
숙소에 들어서 이층으로 올라가자 시녀가 여러 문 중 한 곳을 가리키며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수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가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식사가 준비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편히 쉬시지요.”
시녀가 단정한 자세로 말하자 운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
코앞까지 다가와 고마움을 표하는 운휘의 모습에 흠칫 놀란 시녀는 붉어진 얼굴을 감싸고 총총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무천이 입을 열었다.
“욕구불만은 너 아니야?”
“전 그냥 친절할 뿐입니다. 친절과 평화는 인류의 친우가 아닙니까?”
“결코 본 련의 무사들에게서 나올 말은 아니군.”
무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방 가운데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걸치고 있던 장포를 벗었다.
“뭡니까. 그건?”
장포 속에 숨겨진 물건에 운휘가 물었다.
가죽으로 만든 듯 짙은 갈색을 지닌 띠가 그의 몸을 묶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한 취미가 생기셨습니다. 정말 춘화라도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거 아냐.”
“설마…… 당하는 게 좋은 겁니까? 그래서 그런…….”
“아니라고! 나 그런 거 안 좋아한다고!
욱한 무천이 버럭 소리치고는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두르고 있던 띠를 풀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자 제법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가까이 다가온 운휘가 띠를 살펴보았다. 띠에는 작은 쇳덩이가 촘촘히 묶여져 있었다. 바로 폭뢰비에 장착하는 암기였다.
“들고 다니기 간편하게 하려고 만들었지. 괜찮아 보이지?”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이걸로 뭘 하시려고…….”
“그냥 살펴보려고. 이왕 만든 거 더 괜찮게 만들어야겠지.”
“으흥…….”
운휘가 기묘한 콧소리를 냈다.
순간 눈썹을 꿈틀거린 무천이 그를 바라보았다. 운휘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가까운 곳에 있으니 안절부절못하겠습니까?”
움찔!
“곧 밥 먹을 때가 되면 그녀를 만날 수도 있겠군요. 그때 건넬 말은 준비했습니까?”
“하아…….”
무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집에 가고 싶다.”

정략혼.
그녀가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들은 말이다.
어리지만 알 것은 다 알 나이. 정략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던 그녀는 심술을 부릴 법도 하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정략혼을 강요받았다.
말을 돌려 말하긴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속뜻은 좋은 문파에 시집을 가 가문을 빛내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런 말을 항상 들으며 자라온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운명으로 여겼다.
정략혼이 결정 나자 호연중의 손에 이끌려 사마련으로 간 호연애린은 방긋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아이와 만났다.
그 아이가 바로 무천이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며 호연애린이 느낀 것은 그저 잘 웃는 귀공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 아이와 함께 온 중년인과 자리를 비우자 그 아이와 단둘이 남게 된 그녀는 다소곳이 앉아 차만 홀짝였다.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인해 일찍부터 다도와 예절을 깨우친 그녀는 최대한 예의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무천은 달랐다.
냉큼 자기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내려서더니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몇 살이야?”
“……열한 살.”
“나보다 한 살 많네. 누나라고 불러도 되지?”
“응…….”
어린 호연애린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후로 무천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어릴 적의 무천은 상당히 장난꾸러기여서 여러 가지의 일을 벌이고 다녔는데 호연애린은 그런 그를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가 걱정되어서였다. 저러다 다치면 어쩔까 하는 행동을 그는 서슴없이 했던 것이다.
“아가씨.”
문밖에서 들려오는 시녀의 목소리에 호연애린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
호연애린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미 그가 이곳에 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분명 아버지가 자신을 부른 이유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자는 것이리라.
“알……았어.”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가야 했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쏟아진 물이었고 자신은 그 길을 걸어야 했다.
정략혼이라는 이름하에 팔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운명.
드륵!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눈가에 맺혀 글썽이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천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흰 장포를 걸치고 머리를 틀어 올린 그는 귀공자 그 자체였다.
무천은 불안한 얼굴로 뒤에 서 있는 운휘를 바라보았다.
“나 괜찮아?”
“괜찮습니다.”
“안 이상해? 이거 그냥 벗고 올 걸 그랬나?”
무천이 장포를 잡으며 말하자 운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거 벗으면 더 이상합니다.”
“그래? 그런데 정말 정말 괜찮아?”
“솔직히 말하면 안 괜찮습니다.”
“정말? 이거 큰일인데. 어쩌지?”
“…….”
운휘는 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깊이 반성했다.
조금 전 식사하라는 시녀의 말에 운휘는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를 던졌었다.
그 자리에 호연애린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그 뒤로 무천은 몇 번째 자신의 옷차림을 물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냥 벗으십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벗는 겁니다. 옷이 공자님의 진정한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헉! 아, 안 돼. 아직은…….”
무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운휘의 표정은 무심했다.
“그보다도 그 왼손에 문신 좀 어떻게 해보시죠.”
무천이 자신의 손을 들었다.
예쁘장하게 그려진 꽃문양이 더없이 빛나고 있었다.
“지우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진해지는 걸?”
“그럼 가리던지요.”
건성 어린 운휘의 말에 무천은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그때 종리우가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공각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무천이 몸을 일으켰다.
“아아, 앉아 있게나.”
종리우가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무천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잠시 후 호연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아닐세.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우리를 반겨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호연중이 의자에 앉자 곧 시녀들이 음식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때가 때인지라 차린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호연중의 말과는 달리 나온 음식은 말 그대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거기에 꽤나 신경 쓴 듯 모양새나 향이나 절로 군침이 돌 정도였다.
“이거 잔치를 벌여도 되겠군.”
종리우의 말에 호연중이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는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올렸다.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니.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를 마당에 그럴 수는 없지.”
종리우가 고개를 저었다.
“과연!”
호연중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럽지 않은 직책에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그의 모습에 진정한 남아라 느낀 것이다.
“그런데 그 무리들에 대한 정보는 들어온 것이 있나?”
종리우의 말에 젓가락을 들던 호연중의 손길이 멈칫했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없습니다. 거기에 그들이 어째서 본 가를 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정파의 잔당들은 아닌가?”
무림혈전 이후로 휴전을 맺은 네 개의 거대한 세력들은 웬만해서는 다툼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암중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고 하루에도 수십 개의 중소문파가 사라지고 생겨났다.
“그건 아닐 겁니다. 그들이 본 가를 친다면 그것은 곧 제이의 무림혈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들과 앙숙이라고는 하나 또다시 전쟁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긴 그도 그렇겠지. 아무리 미쳤다 한들 그런 전쟁을 또 하고 싶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