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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제6장 호연세가(皓燕勢家)(4)


지난 전쟁의 참상을 떠올린 종리우가 얼굴을 구겼다.
말 그대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
적이 죽고 자신의 수하가 죽고 모든 이들이 싸늘한 시체로 변했을 때 오로지 자신만이 피가 흐르는 대지를 딛고 서 있었다. 그때의 그 참담한 기분을 또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애써 키운 수하들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신이 한 명의 적이라도 더 베고 아군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참. 그런데 대공자께서는 많이 좋아지셨소?”
그때 호연중이 무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던 무천은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오?”
“아, 아닙니다.”
“혈색이 많이 좋지 않소. 이마에 흐르는 그건 땀이 아니시오?”
“하하! 날이 더워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무천이 얼버무리자 호연중이 실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장포를 걸치고 계시다니…… 보는 본인이 다 답답하구려.”
“아닙니다. 실은 오는 도중에 고뿔이 걸려서 이렇게 해서라도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런……. 쯧쯧. 오뉴월에 고뿔이라니. 몸도 안 좋으신 분이 여기까지 오셔서 고생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
무천은 멋쩍게 웃으며 소매로 자신의 이마를 쓸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연중의 말대로 소매가 흥건히 젖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운휘는 깊은 숨을 속으로 내쉬며 고개를 저었고 공각은 눈을 빛냈다.
엄태화가 준 서찰은 공각의 품에 잠들어 있었다. 공각은 그 서찰은 언제 건네줘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저벅!
그 순간 누군가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그녀는 바로 호연애린이었다.
진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한 화장은 그녀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고 옥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선녀와도 같았다.
그녀의 모습을 본 호연중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무천이 얼빠진 얼굴로 호연애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았다.
“흠흠! 어서 오거라. 많이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호연애린이 살짝 몸을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는 호연중의 옆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아니, 이 어여쁜 처자는 뉘신가?”
종리우의 물음에 호연중이 웃음을 흘렸다.
“그새 잊으셨습니까? 이 아이가 바로 애린입니다.”
“허! 아무리 세월이 강산도 변하게 한다고는 하지만 그 말괄량이였던 아이가 이런 절세미녀로 자라다니!”
무천과 어울려 다녔던 호연애린은 그와 함께 사마련 내에서 알아주는 사고뭉치였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호연애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아주 몰라보게 달라졌구나.”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나도 네 명성을 들은 적이 있단다. 설마 했는데 이런 모습이니 여럿 남성들이 열병을 지닐 만하구나.”
계속되는 종리우의 칭찬에 호연애린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참! 내 정신 좀 보게. 여기 이 사람은 기억하는가?”
종리우가 무천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무천 대공자일세.”
“……!”
호연애린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무천 역시 같았다.
무천은 지금까지 연습했던 수많은 단어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본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호연애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천 공자님.”
딱딱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무천의 눈동자가 또다시 흔들렸다. 지독히도 사무적인 말투가 타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오랜만……이오.”
“잘 지내고 계신가요?”
“그렇소. 소저는?”
“저 역시 잘 지내고 있어요.”
말하는 호연애린은 식탁 밑으로 내린 손을 강하게 쥐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 이렇게 힘든지는 정말 몰랐다.
강제로 약혼까지 했을 때도.
아버지의 말에 따라 사마련에 갔을 때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이제 두 사람도 과거의 일은 털어내고 잘 지내야 하지 않겠소?”
호연중이 무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천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대공자께서도 축하해 주시구려. 우리 애린이가 곧 있으면 혼인을 한다오.”
“……!”
“……!”
무천과 호연애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천은 호연애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무천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혼인이라니…….”
무천이 호연중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호연중이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는 지인과 혼담이 오고 가는 중이오. 이 아이도 이제 혼기가 찼으니 보내야 하지 않겠소?”
말을 끝낸 호연중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무천의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호연애린에게 고개를 돌린 무천의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무릎 위에 올린 그의 손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상태였다.
‘그게 정말이야?’
무천이 속으로 물었다. 그러나 호연애린은 무천에게 시선도 주지 못하고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무천의 마음이 허물어져 갔다.
드륵!
그때 호연애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 자리를 도망가듯 빠져나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호연중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입가에 지은 미소는 지우지 않았다.
이로서 무천은 딸에 대한 마음을 접을 테고 딸은 그에게 시집을 갈 것이다. 비록 당분간은 힘들어 할 테지만 시간이 약이다. 라고 호연중은 굳게 믿었다.
멀어지는 호연애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무천이 이를 악물고는 몸을 일으켰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생각보다 고뿔이 사람 속을 썩이는군요.”
“아, 더 드시지 않고.”
“많이 먹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구려. 모셔다 드리게.”
호연중이 옆에 서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무천이 고개를 저으며 막았다.
“괜찮습니다. 여기 운휘와 함께 가면 되니까요. 그럼 전 이만…….”
무천이 빠르게 운휘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호연중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아직은 아이들일세.”
“저는 저 나이 때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갔습니다. 그저 딸을 가진 아비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음…….”
그의 말에 종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간의 일에 자신이 끼어들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 가운데 공각만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서찰을 언제 전해줘야 하는지 감을 잡았다. 그리고 이번 일로 인해 서찰이 가지는 힘은 더욱 커질 것이다.
공각은 종리우의 식사 속도에 맞춰 천천히 음식을 비워 나갔다.



제7장 드리우는 어둠(1)


“괜찮나?”
엄태화가 물었다.
마희운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두운 방 안에 호롱불만 밝히고 있는 그의 얼굴은 더없이 창백했다.
“그저 그렇습니다. 그보다 천악각은 어떻습니까?”
“잘 돌아가고 있다네. 하지만 자네가 있는 것만큼은 아니더군. 어서 복귀해야지 않겠나?”
“그랬으면 저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련주님께 청을 넣고 오는 중이라네. 곧 복직할 수 있을 게야.”
마희운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마련주 기태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엄태화가 청을 넣었다고 해도 기태천이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마희운이 말하자 엄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자네가 좋아할 만한 소식을 가져왔다네.”
“뭡니까?”
“오늘밤…… 거사가 일어날 거야.”
“예? 거사라니요?”
마희운이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엄태화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윽한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 나오자 차향을 들이킨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일이 끝나면 알려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자네가 심히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하군요.”
“오늘 별이 떨어질 것이네.”
“……!”
마희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별이라는 게 누구를 뜻하는지 한번에 알아들은 것이다. 그는 주변을 훑으며 혹시나 누가 있는지 살폈다.
“그 말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네. 자네가 벼르고 있는 것은 알지만 때가 때인 만큼 어쩔 수 없었네.”
“대체 어떻게 그를 없앨 생각이십니까?”
“궁금한가?”
엄태화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묻자 마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천이 쉽게 계략에 넘어갈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호연세가에 간 건 알고 있겠지?”
“예.”
“그곳에 공각이 갔다네. 그리고 그에게 서찰 두 장을 건네줬지. 한 장은 호연세가의 장녀에게. 그리고 다른 한 장은 대공자에게 전해질 것이야.”
그걸로 끝이었다.
마희운은 그의 말에서 생각을 유추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눈을 빛냈다.
“과연 각주님이십니다.”
“곧 본 련에서 천악각은 으뜸이 될 것이네.”
“그렇군. 그래서 자네가 대공자를 그곳에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거였군. 덕분에 계획이 살짝 틀어지고 말았네. 보답은 해야겠지.”
“……!”
갑자기 들린 낯선 목소리에 엄태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분명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고 이 안에는 자신과 마희운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낯선 이의 목소리는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