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0화
제7장 드리우는 어둠(2)
엄태화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의자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누군가가 그의 몸을 두들겼다.
점혈을 당한 것이다.
곧 그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푹!
“……!”
엄태화의 복부로 날카로운 검이 뚫고 나왔다.
그의 앞에서는 마희운이 차가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
검을 그의 복부에 꽂은 그대로 누군가 엄태화의 앞으로 나타났다.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엄태화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아무리 냉정하고 머리가 비상한 그였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의 앞에 나타난 이는 바로 사마련의 총군사. 사무언이었다.
“이 친구 많이 놀란 모양이군.”
“그럴 테지요.”
사무언은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계략에 능하고 머리가 좋으면 뭐하는가? 자신의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데 말이야.”
“그가 말한 대로 그쪽에서는 오늘 일을 벌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이쪽도 준비가 끝났네. 자정이 되면 시작할 것이야.”
엄태화는 사무언과 마희운의 대화에 이성을 잃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혈마저 점혈을 당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복부에 나 있는 검상은 그로서 생각에 빠지는 것을 방해했다. 그야말로 지독한 통증이었다.
“그동안 애쓰셨습니다. 분명 보답이 있을 겁니다.”
“훗. 뭐 딱히 별다른 보답이 없어도 상관은 없다네. 이것은 그냥 그분에 대한 나의 충심이니 말이야. 무엇보다도 암천무제(暗天武帝)의 흔적을 찾아야 하네. 그것을 찾지 못한다면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이 모두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
“걱정 마시죠. 이미 어디에 있는지 알아놨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기대되나?”
사무언이 물었다.
마희운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이거 곧 가야 할 사람을 앞에 두고 말이 많았군.”
사무언이 엄태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엄태화의 두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게나. 자네도 대공자를 사지에 몰아넣지 않았던가?”
사무언은 엄태화의 두 눈을 손으로 덮었다. 그리고는 그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가게나. 그리고 아쉬우면 위에서 지켜보게나. 이 세상이 어찌 변하는지를.”
퍽!
* * *
사람은 살다 보면 타의든 자의든 남을 속이게 된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다.
남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운휘는 지금 그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아직 그분은 공자님을 잊지 못하고 계십니다.”
“…….”
“무슨 착오가 있던 것일 겁니다. 아까 그분 얼굴 보셨습니까? 하얗게 질리더군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직접 가서 들으셔야 합니다.”
운휘는 탁자에 얼굴을 박고 있는 무천을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혼이 빠진 사람처럼 무천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운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상태의 무천에게는 그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기대를 하고 온 걸까?”
“예?”
여전히 얼굴을 파묻은 무천에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잖아? 그녀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가정을 가질 때도 되었지.”
“공자님.”
“이런 내가 한심해?”
무천이 고개를 들어 운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는 슬픔이 한가득 맺혀 있었다. 운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느 남자라도 그럴 것입니다. 자신이 사모하는 여인이 시집을 간다면……. 하지만 오랫동안 마음에 두진 마십시오. 공자님께선 할 일이 많습니다.”
무천은 그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가슴속에 자리 잡은 앙금은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에라도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녀도 자신을 잊기 위해 크나큰 노력을 하고 있을 테니까.
똑똑!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운휘가 몸을 돌려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한 시녀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아가씨께서 이것을…….”
시녀는 숨기고 있던 서찰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운휘가 그것을 받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천 공자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
운휘가 무천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 역시 놀란 눈으로 운휘를 바라보았다. 운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를 돌려보낸 뒤 서찰을 무천에게 건넸다.
무천은 봉인되어 있는 서찰을 조심스레 뜯어낸 후 안의 내용을 펼쳤다.
세가의 뒷산. 제가 당신께 항상 말하던 그곳에서 기다리겠어요. 자정에 뵙도록 해요.
호연애린.
얼마 되지도 않은 짧은 문장의 서찰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품고 있는 내용은 무천이 무척이고 바라던 내용이었다.
“뭐라고 써져 있습니까?”
서찰을 읽어 내리던 무천이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자 내용이 궁금해진 운휘가 물었다.
무천은 서찰을 다시 조심스레 접은 뒤 자신의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녀가…… 만나자는군.”
“그렇군요.”
이미 서찰이 왔을 때 예상하고 있던 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깃을 가다듬었다.
“나 안 이상해?”
“…….”
운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무천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시진 뒤.
자정까지 남은 시간 동안 무천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 같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둠이 내려앉자 호연세가의 사람들은 더욱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주시했다.
무사들은 조를 짜 주변을 순찰했고 지원 나온 무사들 역시 자신의 병장기를 점검하며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준비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응.”
운휘가 자신의 검을 손질하며 묻자 무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손에는 폭뢰비가 착용되어 있었다. 본래는 그냥 가려고 했는데 안전을 요한 운휘의 성에 못 이겨 착용한 것이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그 피리. 꼭 부십쇼.”
“알았어. 걱정 마. 어차피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아.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기겠어?”
무천이 손을 저으며 말했지만 운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접지 못했다. 호연세가를 친다는 정보가 들어온 이상 이곳도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헌데 다른 곳은 오죽할까.
물론 그런 사실은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는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고자 저렇게 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운휘였다.
“그럼 도중까지만 함께하겠습니다. 호연 낭자도 무공을 익힌 몸이니 여차하면 제가 갈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겠지요.”
“응. 무슨 일이 생기면 피리 불고 그녀 뒤에 숨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아녀자의 등 뒤에 숨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지 둘 다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무공을 익힌 사람과 잃은 사람의 차이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벌어질 경우 무천이 호연애린을 보호한다고 앞으로 나서면 오히려 그녀에게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뿐이었다.
운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의 검신을 바라본 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런 그의 마음속에 불안함이 피어났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증거도 없는 이것은 그저 감이었다. 하지만 그 감으로 인해 사 년 전 그 임무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무천과 운휘는 방을 나와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나며 후문으로 향했다. 곳곳에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기는 했지만 돌아다니는 무인들이 워낙 많은 통에 그들에게 신경 쓰는 이는 문지기뿐이 없었다.
“지금 나가십니까?”
“그렇다네.”
“지금 본 가는 비상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본가 밖으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잠시만이라네. 그저 잠깐 이 주변을 둘러보고 올 것이야.”
“안 됩니다.”
문지기는 고개를 저으며 문을 열지 않았다.
운휘가 인상을 쓰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분이 누군지 알고 길을 막는 겐가?”
“설령 가주님이라 하더라도 문을 열 순 없습니다.”
문지기는 마치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흔들림 없이 말했다. 운휘는 고개를 돌려 무천을 바라보았다.
무천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운휘가 문지기에게 가깝게 다가갔다.
문지기는 그런 운휘의 행동에 창대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운휘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우리는 가주님의 명으로 비밀 순찰을 가는 걸세. 아마 자네에게도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야.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거지. 자네는 지금 그런 일을 막고 있는 거라네.”
문지기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죄송합니다. 설마 그런 일인 줄은…….”
“아니야. 그건 그렇고 자네 이름은 뭔가? 자네 같은 이가 호연세가에 있으니 참으로 믿음직스럽군.”
“철가입니다.”
“그래. 철가. 내 가주님께 귀띔이라도 들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문지기가 감사를 표하며 허리를 숙이려 하자 운휘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이 일은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네.”
문지기는 즉시 운휘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딱 이번 한 번 만입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알겠네. 고맙군.”
운휘의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문지기가 문을 열자 무천과 운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한참이나 떨어져 그 둘을 바라보던 한 쌍의 눈빛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한적한 정자에 서 있는 무천은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자는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되고 낡아서 지금에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호연세가의 바로 뒤에 있는 이 산은 호연세가의 사유지는 아니지만 세가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었다.
이곳은 어렸을 적 호연애린에게 많이 들었던 장소였다.
그래서 그런지 낯선 장소지만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수련을 해왔던 그녀에게 귀에 딱지가 들어앉게 들었던지라 몇 번 와본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