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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제7장 드리우는 어둠(3)
여전히 이곳에서 수련을 하는지 곳곳에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무천은 손을 들어 정자의 기둥을 매만졌다.
왠지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저벅!
그때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천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어느새 온 것인지 호연애린이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무천은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식사 때 보았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옷차림 역시 바뀌었지만 같은 옷을 입고 있다 해도 달빛이 비추는 그녀는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였다.
지금에라도 당장 그녀의 등 뒤에서 날개옷이 솟아올라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저벅.
무천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호연애린은 천천히 정자로 다가왔다. 살짝 고개를 숙여 무천과의 시선을 피하며 다가오는 모습에 무천은 아찔함을 느꼈다.
그냥 두면 부서져 버릴 것처럼 가녀린 그녀의 모습이 무천으로 하여금 달려가 끌어안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천은 손을 강하게 쥐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가가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이미 혼사가 정해진 그녀인데 대체 무슨 말을 건네야 한단 말인가.
“…….”
어느새 정자에 올라 의자에 앉은 그녀가 자신의 옆을 쓰다듬었다. 무척이나 고운 그녀의 손길에 무천의 심장이 벅차게 뛰어올랐다.
“이곳…… 기억하시나 보군요.”
낯익지만 그만큼 낯선 그녀의 목소리가 무천의 심금을 울렸다. 무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저의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곳이에요. 당신과 만나지 못하던 날은 항상 이곳으로 와 수련에 전념했죠. 또다시 당신을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말하던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날이 어두워 드리운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감정이 얼굴에 나타난 것이다.
“그날도 같았어요. 그날도…… 당신을 계속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이곳에서 잠시나마……. 다시 만날 수 있는 그날까지 당신을 잊고자 수련에 또 수련을 했죠. 그리고 저녁이 되자 집으로 간 저는 듣고 말았어요.”
의자를 쓰다듬던 그녀가 손이 오그라들었다. 그 손은 작게 떨고 있었다.
“당신이 내공을 잃었다는 말과…… 그리고 당신과의 약혼을 파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호연애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을 바라보던 무천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이슬이 한 가득 맺혀 있었다.
“어째서죠? 어째서…… 어째서 내공을 잃은 거죠? 내공을 잃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자신도 놀랄 만큼 커다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무천에 대한 원망 역시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까짓 무공이 뭐라고!
그까짓 가문이 뭐라고!
거짓된 자유 속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무천은 현실의 탈출구이자 유일한 행복이었다. 그렇기에 그조차도 거짓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를 원하고 사랑했다. 단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당신에게 난 아무것도 아니었나요? 그렇게 쉽게 날 잊을 수 있는 건가요?”
아마 약혼을 파기한 후로 단 한 번도 연락도 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의 말에 무천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 너무나 강하게 쥐어서 그런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를 타고 슬픔이 전해져 온다.
그녀의 아픔이 자신의 마음을 찢었다.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결코 당신을 잊은 게 아니라고! 당신 역시 나에게 왜 단 한 번의 연락도 해오지 않았냐고. 모든 걸 잃은 날 버려둔 것은 당신이 아니냐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그녀의 모습은 요조숙녀 그 자체였다. 비록 자신 때문에 말괄량이로 찍히긴 했지만 그녀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참아야 했다. 지금 자신조차 가슴의 응어리를 내보이면 그녀가 더욱 아파할 것을 알기에. 그리고 무슨 사정이 있었든 연락하지 않았던 사실은 사실이었다.
자신은 아파하고 있는 그녀를 방치해 두고 있었다.
무천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호연애린은 그런 무천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이젠 저에게 말조차 건네기가 싫어진 건가요? 곧 다른 남자에게 팔려갈 여인이라서? 그런 제가 더러워진 건가요?”
갑작스레 그녀의 목소리가 표독스럽게 변했다.
무천이 고개를 들자 조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무천의 마음을 무저갱으로 떨어트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좌절은 지금 해야 할 때가 아니었다.
한때 무공으로 경지를 보았던 무천은 지금 호연애린의 상태를 정확하게 짐작했다.
‘심마!’
무인이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 점점 심해지면 그녀의 기혈은 뒤틀리게 되고 끝내는 무공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애린!”
무천은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호연애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소리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그녀의 행동에 무천이 발을 멈췄다.
호연애린의 두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뇌수까지 뻗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로 둔다면 그녀는 무공을 잃지 않는다 하더라도 평생 가슴속에 한을 지니고 살아야 했다.
그것은 절대 무천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입술을 강하게 깨문 무천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호연애린은 그런 무천을 악에 받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애절한 그 모습에 무천은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와락!
그녀를 안은 무천이 속삭였다.
“미안…… 미안!”
그녀의 몸이 자신의 품 안에서 느껴졌다.
마치 어미를 잃은 아기 새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이 모든 감각으로 느껴졌다.
무천은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품 안에서 호연애린은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한없이 쏟아냈다.
“시발! 지랄을 해라. 지랄을 해.”
멀리 떨어진 숲속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공각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홍루 빼고는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공각이었기에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도 고향에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며 돌아오는 날 혼인하자고 약속까지 했었다. 그렇게 사마련에 입문하고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자 곧장 고향에 들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이 떠난 지 한 달 만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 상태였다.
그 후로 공각은 사랑이란 것을 믿지 않았고 여성혐오증까지 생기고 말았다.
‘사랑은 개뿔! 다 개소리야. 결국은 저년도 다른 놈에게 다리를 벌려 줄 년이란 거지.’
문뜩 공각은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 연놈을 모두 단칼에 베어 버릴 생각이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지 여자가 범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공각은 호연애린을 품에 안는 것을 상상하며 침을 삼켰다. 아무리 죽여야 할 여인이라고는 하지만 사화라 불리며 절세미모를 지닌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품에 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에서 열기가 솟아났다.
만에 하나 그녀를 품고픈 욕심에 그들을 놓친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미리 엄태화에게 언질을 받았던 공각은 그가 종리우에게 준 서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사마련에 잠입한 첩자이니 인피면구를 착용할 수도 있으니 산에서 내려오는 이는 무슨 얼굴이든 즉시 베고 그의 품을 뒤지라는 내용이었다.
아마 이미 서찰을 뜯어본 그가 산 언저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슬슬 실행해야겠군.’
공각은 자신의 검을 빼 들며 슬슬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의 옆으로 하나의 인영이 날아왔다. 고개를 돌린 공각은 눈을 부릅뜨고 쓰러져 있는 시체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한줄기의 빛이 공각의 가슴에 꽂혀들었다.
“커……업!”
짧게나마 비명을 내지르려던 공각은 자신의 입을 막는 손길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흑풍의를 입은 사내들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 이놈들은 대체!’
난생처음 보는 인물에 공각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리고 가슴에 박힌 검이 옆으로 가로지는 순간 그의 숨이 끊어졌다.
* * *
호롱불을 켜놓은 서재에서 호연중은 이마를 손으로 받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흑풍의를 걸친 마철강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시작될 것이오.”
“…….”
“표정이 좋지 않구려. 무슨 걱정이라도 있소?”
마철강의 물음에 호연중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철강은 그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려 하니 두려움이 앞선 것이리라. 그가 이제 가야 할 길은 지금까지 알던 모든 이들을 적대시하는 길이었다.
“이미 배는 떠났소.”
“후회는 없소이다. 단지…….”
말을 잇던 호연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마철강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되었소?”
“걱정 마시오. 흑풍단과 혈풍단이 이미 자리를 잡고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다오.”
“종리우. 그는 약한 사람이 아니오.”
“알고 있소. 그렇기에 저녁에 초대한 것 아니오? 그리고 우리 흑풍단과 혈풍단 역시 만만치 않소.”
호연중은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흑풍단과 혈풍단은 그가 있는 세력에서도 알아주는 단체였다. 모두가 일류를 넘어서는 정예였고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이도 절정을 넘어선 인물이었다. 아무리 종리우라 하더라도 영약을 섭취한 자신과 그가 합공한다면 결코 당해내지 못하리라.
“지금 그는 어디에 있소?”
“몰래 세가를 빠져나가더니 뒷산 언저리에 있소.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늦은 것 아니겠소?”
호연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야밤에 세가를 벗어난 것이 의문이기는 하나 마철강의 말대로 종리우가 이 계획을 알아차렸다 해도 이미 늦었다.
오늘 밤. 사마련에서 온 모든 이들을 비롯한 모든 중원인이 죽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무천. 그는 꼭 죽여야 하오.”
“그건 걱정 마시오. 이미 흑풍단의 삼대와 사대를 보냈으니. 그만한 전력이면 웬만한 중소 문파는 하루아침에 멸문시킬 수 있지. 만족하시오?”
소 잡는 칼로 닭을 치는 격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모르겠으나 내공을 잃은 무천은 평범한 무인 하나도 상대하지 못하리라. 그런 그에게 흑풍단 두 개의 대를 보냈다. 설령 천우가 닿았다 하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좋소.”
마음을 굳힌 호연중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두 자루의 세검이 들려 있었다.
“시작하시오.”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던 마철강은 하얀 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