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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제7장 드리우는 어둠(4)
바스락!
‘응?’
호연애린을 안아 달래던 무천은 갑작스런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수많은 인영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당신들은?”
무천은 얼굴을 구기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호연애린 역시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을 깨달았는지 무천의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무천은 자신의 물음에도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그들을 보자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흑풍의를 걸치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들을 주시하는 그들에게서 살기를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순간 무천은 호연애린의 앞을 막아섰다.
“다시 한 번 묻자. 당신들은 누구지?”
무천은 손이 촉촉하게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풍기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방금 전 발소리를 낸 것도 사실 그들이 이 지형을 잘 알지 못한 탓에 난 실수였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바로 등 뒤에 다가올 때까지 무천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그들은 고수였다.
“사마련의 대공자 무천?”
가장 앞에 서 있던 흑의인이 물었다. 무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살기가 어린 섬뜩한 미소였다. 그러고는 호연애린을 바라보았다.
“소저는 빠지시오.”
“……?”
“이는 호연세가주의 의지라오.”
“서, 설마…… 아버님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생포해라!”
그의 외침과 동시에 흑의인들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런 그들의 손에는 달빛을 반사시키는 날카로운 철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런 미친!”
무천이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설마 정체를 밝히자마자 살수를 펼칠 줄은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그 순간 무천의 등 뒤에 있던 호연애린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녀의 손에는 어디에 감춰뒀던 것인지 두 자루의 세검이 들려 있었다.
차앙!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흑의인의 검으로 호연애린이 팔을 휘둘렀다. 그동안 자신을 속박하던 구속감을 잊기 위해 무공에 힘을 쏟았는지 그녀의 무공은 무천이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단번에 흑의인의 검을 튕겨낸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적잖은 충격을 입은 듯 잠시 멈칫거렸다.
“애린! 옆!”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는 다른 흑의인을 본 순간 무천이 외쳤다. 그러자 그녀는 고운 아미를 구기며 뒤로 몸을 날림과 동시에 세검을 휘저었다.
연비낙천(燕飛葉穿).
날아오르는 제비가 떨어지는 낙엽을 뚫는다는 호연세가의 쾌검술이었다. 그런 연비낙천을 연달아 세 번 펼친 호연애린은 흑의인의 검을 튕겨내자마자 몸을 회전시켰다.
스아악!
그녀의 검이 대지를 훑으며 흑의인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우연비(雨燕飛).
비가 오는 날 제비가 대지를 날아가는 모양을 본뜬 초식이었다. 호연세가의 일반 문도들도 배울 수 있을 만큼 쉽고 기본적인 초식이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반격할 줄 몰랐던 흑의인은 그녀의 검을 간단하게 허용하고 말았다.
푸학!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흑의인의 가슴을 꿰뚫은 호연애린은 곧바로 그의 복부를 발로 차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또다시 다가올 공격에 대비해 자세를 낮췄다.
“…….”
설마 이렇게 어이없이 동료가 당할 줄 몰랐던 그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호연애린을 주시했다.
호연애린은 긴장한 얼굴로 세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방금 전은 그야말로 우연에 가까웠다는 것을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저들의 실력은 자신과 비등했고 숫자는 월등했다.
‘아! 피리!’
어떻게든 그녀를 도울 길이 없을까 고민하던 무천은 운휘가 건네주었던 피리를 떠올렸다. 무천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품에 손을 집어넣어 피리를 꺼내 힘차게 불었다.
삐익―!
일순간 모두의 시선에 그에게 쏠렸다.
“결국 사지를 택하는가.”
우두머리로 보이던 흑의인이 말했다. 그러자 흑의인들에게서 풍겨져 나온 기도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무천이 피리를 분 이유를 깨달은 순간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내공을 더욱 끌어 올린 것이다. 그리고 호연애린의 실력상 아무런 상처 없이 끝내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한 그들이었다. 어쭙잖게 상대했다간 또다시 동료를 잃고 말 것이다. 그것은 사양이었다.
그 기도를 정면으로 받은 호연애린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과 호각일 줄 알았던 그들이었건만 지금 보니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흑의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 순간 앞에 서 있던 다섯의 흑의인이 몸을 날려 호연애린에게 달려들었다.
“흡!”
빠르게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에 숨을 들이켠 호연애린이 내공을 십 할 끌어 올렸다.
그녀가 입고 있던 비단 옷이 기파에 휩쓸려 너풀거렸다. 그리고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그 순간.
펑!
갑작스런 폭음이 정자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폭음이 들림과 동시에 달려들던 흑의인 중 둘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 모습에 눈을 빛낸 호연애린이 쌍검에 가득 실어둔 내공을 떨쳐 냈다.
“연비군도(燕飛群道)!”
나는 제비가 무리를 이뤄 길을 만든다!
그녀의 세검이 순간 둘에서 넷이 되고 여덟이 되며 끝내는 정면을 가득 메웠다.
쩌저저정!
호연애린의 검과 흑의인들의 검이 허공에서 만나자 불꽃이 튀기며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꺄악!”
호연애린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모든 내공을 끌어 펼친 비기지만 워낙 경지가 낮은 탓에 제대로 된 초식을 펼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초식은 흑의인들의 내공에 밀려 깨져 버렸다. 하지만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는지 검을 내지르던 흑의인들 역시 뒤로 튕겨 나갔다.
덥썩!
“윽!”
날아온 호연애린을 받아든 무천이 그 충격에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입가에 작은 선혈이 맺혀 있는 것이 무리한 내공 운용으로 내상을 입은 듯했다.
“괘, 괜찮소?”
“괜찮아 보여요?”
“음…….”
걱정 어린 말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표독스러운 말이었다. 무천을 한 번 흘겨본 호연애린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상당히 어두웠다.
“그런데 애린. 검은 왜 가져온 것이오?”
“헛소리하면 찔러 버리려고 가져왔어요. 왜요?”
“…….”
“바쁜데 계속 말 걸지 마요.”
방금 들린 폭음에 의문을 품었지만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무천의 말을 일축시킨 그녀는 다시 내공을 끌어 올렸다. 단전이 따끔거리는 것이 역시나 적잖은 내공을 입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검을 놓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검을 놓는 순간 자신은 살겠지만 무천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으득!”
한편 그녀의 등을 바라보던 무천이 이를 악물었다.
운휘에게는 그녀의 등 뒤에서 숨어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막상 그렇게 되니 기분이 더러워도 여간 더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힘이 없다지만 사랑하는 여자의 뒤에 숨은 것은 사내로서 최악이었다.
“여길 벗어나시오!”
“에?”
호연애린의 등에다 속삭인 무천은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정자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그녀가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지키려고 했고 흑의인들은 자신을 죽이고 그녀를 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와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오히려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꼴이었다.
“잡아!”
우두머리가 소리치자 흑의인들이 몸을 날렸다. 몸이 성치 못한 호연애린은 갑작스런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무천을 포위하고 섰다.
무천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비록 내공을 잃었다만 무천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폭뢰비.
조금 전 호연애린에게 달려들던 다섯의 흑의인 중 둘을 날려 버린 것이 바로 무천의 폭뢰비였다. 그 위력은 절정고수도 날려 버릴 만큼 위력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쏜 것은 작은 쇳덩이. 아직 큰 쇳덩이는 폭뢰비 안에 잠들어 있었다.
“각오!”
무천을 둘러싼 흑의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들을 주시하던 무천이 빠르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목표는 가장 중앙에 있는 흑의인.
꽝!
아까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섬광과 함께 폭뢰비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무천을 중심으로 퍼지는 순간 목표가 되었던 흑의인의 상체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거기에 그 옆에 있던 다른 이들 역시 여파에 휩쓸려 함께 튕겨져 나갔다.
그 엄청난 위력에 달려들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발을 멈췄다. 굉음이 들린다고 느낀 순간 동료 하나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
폭뢰비를 쏜 무천조차 멍하니 사방으로 흩어지는 육편을 바라보았다. 한번 쏴보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위력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암기다! 암기를 조심해라!”
우두머리가 외쳤다. 그런 우두머리의 눈은 부릅떠져 있었다. 저런 위력의 암기는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우두머리의 외침에 정신이 든 무천은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흑의인은 모두 무천의 오른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쾌살진(快殺陣)을 펼쳐라!”
우두머리가 다시 외쳤다. 그러자 흑의인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암기의 특성상 상대방을 조준하고 쏘아야 했기에 이런 쾌 속성을 지닌 진법에는 취약했다. 거기에 내공까지 잃어 행동이 무림인들보다 느린 무천의 경우 진법의 효과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무천은 침을 삼키며 애써 흑의인들의 움직임을 잡기 위해 눈을 굴렸다. 설령 움직임을 잡았다 하더라도 몸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지도 의문이었다.
탓!
그때 한 흑의인이 대열에서 이탈해 무천에게 쇄도했다. 그는 검을 가로로 눕히고 그대로 무천을 가로질렀다.
“크흡!”
무천이 급히 몸을 비틀어 옆으로 피해냈다. 그러나 완벽히 피해내지 못한 흑의인의 검이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베인 옷깃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무천은 이를 악물고 허리를 비틀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지나쳐 가는 흑의인의 등으로 뻗었다.
펑!
이번엔 전과 소리가 달랐다. 하지만 무방비로 지나치는 흑의인의 숨을 끊는 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흑의인은 그대로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달려가던 그대로 엎어졌다. 설마 무천이 검상을 입으면서도 암기를 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는 말이 무인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긴 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무인은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