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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제7장 드리우는 어둠(5)
털썩!
“큭!”
균형을 잃은 무천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 순간 흑의인들의 눈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살!”
흑의인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무방비 상태의 무천에게 검을 내질렀다. 무천은 그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와락!
포근한 무언가가 얼굴을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그것이 들썩였다.
무천은 코를 간질이는 향에 서서히 눈을 떠 고개를 들었다. 그런 무천의 앞에는 그녀를 껴안고 있는 호연애린의 얼굴이 들어왔다.
무천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호연애린은 무천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애……린?”
“다, 다치지 마. 당신이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 쿨럭!”
가까스로 입을 열던 호연애린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가슴 언저리에 얼굴을 두고 올려다보던 무천은 그 선혈을 그대로 맞고 말았다. 하지만 무천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알아요? 나…… 정말 당신을…….”
호연애린의 고개가 천천히 꺾였다. 몸을 꿰뚫은 검의 고통에 정신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무천은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천의 몸이 쉴 새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미친!’
흑의인들의 우두머리가 혼절한 호연애린을 보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를 살려오라는 명을 받았건만 결국 그녀에게 중상을 입히고 말았다. 지금 당장 의원으로 데려간다 하더라도 그녀를 살리지 못할 만큼의 중상을 말이다.
그녀에게 검을 겨눈 것도 단순히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날려 무천을 감쌀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시발! 완전히 좆됐군.’
우두머리는 자신에게 어떤 벌이 떨어질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벌을 피해 도망갈 수도 없었다. 자신이 속한 단체는 그런 곳이었다. 중원 어디에 숨어 있던 그들은 자신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다 저놈 때문에!’
그의 시선이 멍한 눈으로 호연애린을 붙들고 있는 무천에게 향했다. 애꿎은 분노가 그에게 향한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저놈이라도 확실히 죽여야겠다.’
마음을 굳힌 우두머리가 수하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흑의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천에게 다가갔다.
“아…… 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말을 내뱉지 못하는 무천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탓!
흑의인들의 신형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들의 검에서는 푸른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강렬한 검기가 실린 검이 무천을 향했다. 그리고 그때 고개를 추켜든 무천의 입에서 절망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소리 없는 비명. 무천은 분명 비명을 질렀건만 아무런 소리도 퍼지지 않았다. 그런 무천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 갔다. 그 순간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흑의인들의 검이 무천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삐익―!
움찔!
어두운 밤하늘을 뚫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운휘가 눈을 빛냈다. 그는 그 소리가 들려온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바닥을 박찼다.
이유를 생각할 것도 없다. 피리 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분명 무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
‘음?’
산길을 타고 달리던 운휘가 아미를 구겼다. 흑풍의를 걸친 세 명의 인물이 길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운휘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향해 살기를 내보일 이유가 없었다.
‘뚫는다.’
결정을 내리자 운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평소에 무천과 웃고 떠들던 장난스러운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절정의 무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운휘의 몸놀림이 달라지자 흑의인들 역시 그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즉시 자세를 잡고 운휘에게 몸을 날렸다.
번쩍!
운휘의 검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갔다.
흑의인들을 스쳐 지나간 운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그런 그의 뒤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운휘를 쫓던 흑의인들이 고꾸라졌다.
단 일격으로 셋 모두를 베어 버린 것이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는 암흑 세계에서 암운향(暗雲香)이라 불리던 운휘의 진정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운휘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방금 그들이 펼친 일수가 결코 어중이떠중이들이 배울 수 있는 합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이들이 무천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빌어먹을!
악다문 운휘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무천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본래 있던 자리가 무천이 있는 장소와 그렇게 많이 떨어진 거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타다닥!
길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운휘의 온몸을 때렸다. 그 덕에 몸 곳곳에 생체기가 생겨났다.
‘조금만 더!’
수풀이 끊어지는 곳이 보이자 운휘는 바닥을 더욱 힘껏 박찼다. 운휘의 신형은 빠르게 수풀을 빠져나갔다.
“공자님!”
달려오던 탄력으로 허공에 몸을 띄운 운휘는 곧바로 무천을 찾았다. 그런 그의 검에 가공한 공력이 모여들었다.
쉬악!
그때 운휘에게 한 흑의인이 날아들었다. 운휘는 검을 그대로 휘둘러 흑의인을 갈라 버렸다. 너무도 깨끗하게 양분되는 시체의 틈으로 무천의 모습이 드러났다.
“……!”
운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크아아아!”
꽈앙!
들판에 피어 있던 꽃들이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지며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달려들던 흑의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천의 주위에는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고깃덩이가 십 수 개나 너저분하게 널려져 있었다.
꽉!
“크악!”
또다시 굉음과 함께 한 명의 흑의인이 뭉개지며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순식간이었고 설령 알 수 있다 하더라도 피해 내지 못할 죽음이었다. 그런 흑의인을 잡고 있는 것은 검은 안개로 만들어진 흑룡이었다.
털썩!
흑룡이 다물던 입을 벌리자 고깃덩이로 변한 흑의인이 떨어져 내렸다. 흑룡이 다른 표적을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으아아!”
한 흑의인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흑룡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강렬한 검기가 쏘아지며 흑룡을 꿰뚫었다. 하지만 안개처럼 흩어지던 흑룡은 곧바로 다시 뭉치며 흑의인을 향해 쏘아졌다.
턱!
흑의인의 발이 흑룡의 입에 들어갔다. 급히 자리를 피했지만 그만 발목이 잡혀 버린 것이다. 그 순간 흑의인이 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컥!”
흑의인의 입에서 각혈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의 위로 흑룡이 빠르게 내리꽂혔다.
운휘는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부릅떠야 했다.
흑룡이 이어지는 끝에는 검은 기운에 휩싸인 무천이 있었던 것이다.
칠흑보다 검게 물든 두 눈으로 흑의인들을 바라보는 무천.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는 공간이 찢어진 듯 이질적인 틈이 나 있었고 그곳에서는 흑룡이 튀어나와 있었다.
천사백 년 전. 그 힘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입으로조차 언급하기를 금했던 자.
현 천하 사패 중 하나인 사마련주 기태천조차 그 기운을 이겨내지 못해 익히길 포기했고 과거 무림혈전이 일어난 이유이자 중원의 운명을 좌우할 신공.
암천무제(暗天武帝).
바로 그의 독문무공인 암천여래신공(暗天如來神功)의 재림이었다.
제8장 멸문(1)
쩌정!
“크흡!”
종리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순간 그의 장포가 부풀어 오르며 강렬한 기파가 그를 중심으로 터져 나갔다.
쌍검으로 종리우를 압박하던 호연중은 그 기파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마철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연중과 대화를 나누던 바로 그였다.
마철강이 손을 펼치자 강력한 장력이 그에게 쏘아졌다.
“흥!”
코웃음을 친 종리우가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뿌려진 검기가 마철강이 뿌린 장력을 찢는 것도 모자라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큭!”
마철강이 급히 몸을 뒤로 젖혀 검기를 피해냈다.
“과연 염화대성이라 불릴 실력입니다.”
호연중이 진정 감탄했다는 듯 말하자 종리우는 아미를 구겼다.
“자네가 이럴 줄은 몰랐군.”
“원래 무림이 이런 곳이지 않습니까?”
“대체 무엇이 자넬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무엇이 자네의 눈을 멀게 했는가!”
종리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최대한 분노를 잠재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 종리우의 심정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엄태화의 서찰에 따라 첩자가 나타날 자리에서 숨어 기다리던 그는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과 호각 소리에 급히 호연세가로 향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춰진 것은 호연세가와 천살문, 혈풍문의 무사들에게 기습을 당해 쓰러지는 자신의 수하들이었다.
곧장 그곳으로 난입하려던 종리우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호연중과 흑풍의를 걸친 마철강이 그를 막아선 것이다. 그렇게 종리우는 그들과 격돌했고 지금도 이렇다 할 승부를 보지 못한 채 대치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대협과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실력을 얻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마연향(麻煙香)에 중독되신 분이 이렇게까지 버티실 줄은 몰랐습니다.”
호연중의 말에 종리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공력은 물론 몸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내공은 반으로 줄어 버린 것 같고 몸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마치 며칠 동안 무공을 펼친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아무리 사파라 불리는 우리라지만 이런 더러운 수까지 쓸 줄 몰랐네.”
“실력이 부족하니 꼼수라도 부려야지요. 하지만 이제 슬슬 한계이신 듯하군요.”
종리우는 실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솟구쳤다. 그 기도를 정면으로 맞서던 호연중과 마철강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이런 기운이 아직도 그의 몸에 남아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종리우를 감싼 화기가 극에 달한 듯 머리칼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눈동자는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