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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제8장 멸문(2)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하나의 불덩이와도 같았다.
진정한 염화대성의 모습인 것이다.
“오너라!”
절대자의 기운을 뿌리는 종리우가 호기롭게 외쳤다. 하지만 호연중과 마철강은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꾹!
세검을 쥔 호연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그의 실력은 이미 짐작한 바였다. 거기에 어차피 거사가 시작된 것.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호연중이 고개를 돌려 마철강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살짝 빠졌다. 그리고 그 순간 호연중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어리석구나!”
종리우가 세차게 검을 뿌렸다.
그의 검에서 뻗어 나간 화기가 전방을 휩쓸며 호연중에게 날아갔다. 호연중은 이를 악물고 그 화기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런 그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연비군도.
호연애린이 펼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위력이었다.
만년설삼까지 섭취한 그가 내공을 십 할 끌어 올려 펼친 것이다. 그 덕에 화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종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때 뒤로 빠졌던 마철강이 어느샌가 호연중의 옆으로 나타나 그의 앞에 섰다.
종리우와 정면으로 마주한 마철강이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빠르게 던졌다.
무엇이든 삼켜 버릴 듯 진한 어둠이 종리우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것을 본 종리우가 기합을 터트리며 검을 내려쳤다.
퍽!
“……!”
종리우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주변을 불태워 버릴 듯 타오르던 화기는 그 기세를 잃고 누그러들었고 그의 기운 역시 빠르게 사라졌다.
“이건……?”
종리우가 묻자 마철강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이때를 위해 준비한 물건이오. 그대 같은 초절정고수를 위해서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만들었다오.”
“……마물(魔物)이로군.”
“신물(神物)이오.”
마철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종리우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왼쪽 가슴에 박힌 비수를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손바닥만 한 비수는 생긴 것과는 달리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강기와 호신강기를 뚫고 심장에 틀어박힌 것이다.
“허허!”
종리우의 입에서 맥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칼 밥 먹고 사는 인생. 목숨에 미련은 없었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갈 줄은 몰랐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시구려. 미리 가서 주군을 기다리는 것 역시 신(臣)의 예의가 아니겠소?”
마철강의 말에 종리우가 눈을 부릅떴다.
“설마…….”
마철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사마련은 이 무림에서 사라졌을 것이오.”
“……!”
종리우의 신형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씹어 먹을 개잡놈들!”
팟!
* * *
끼익!
어두운 대전의 문을 열고 사무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사 복을 걸친 그의 몸에는 어울리지 않게 핏물이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또한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은 일대종사 못지않았다.
저벅!
대전을 가로지르던 사무언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시야에 태사의에 앉아 있는 기태천이 보였다.
나태한 얼굴을 손으로 받치고 있는 기태천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척!
사무언이 부복하며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
어찌 보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과도 같았다. 하지만 기태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사무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사파의 지존 혈성이시…….”
“개소리 집어 치우고.”
기태천이 그의 말을 끊고 불쑥 말했다.
사무언은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거추장한 것을 싫어하고 단도직입적인 것을 좋아하는 그다운 반응이었다.
“그럼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뭐지?”
“암천여래신공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제야 감고 있던 기태천의 두 눈이 뜨였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 두 눈이 사무언을 직시했다. 그의 시선에 사무언이 순간 움찔거렸다.
일순간 거대한 태풍이 온몸을 강타하는 기분이었다.
‘과연 련주! 이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구려.’
사무언은 진심으로 탄복하며 속마음을 감췄다. 그것은 수십 년간 기태천의 수발을 거들어 온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했다. 다 죽어가는 그에게조차 밀리고 싶지 않았다.
“글쎄?”
“이미 사마련에 암천여래신공이 있다는 정보는 입수했습니다. 련주께서도 참으로 치사하십니다. 그런 걸 혼자만 가지고 계시다니.”
“그럼 자네와 나눴어야 했나?”
“그럼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겠지요.”
“크큭!”
기태천이 웃음을 흘렸다.
사실 그로서도 설마 사무언이 배신을 때릴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간 사마련에서 마음을 터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사무언 단 한 명뿐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나?”
언제 자신을 배신했는지 묻는 말이었다.
“련주님을 만나던 순간부터였지요.”
그의 대답에 기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만나는 것 자체가 이때를 위한 계획이었다면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야만 지금 갑작스레 변한 그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때를 위해 수십 년을 참아왔군.”
“그렇지요.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자네에게 별의별 소리를 다 늘어놨고 말이야.”
“그 신임을 얻기 위해 꽤나 고생했지요. 하지만 암천여래신공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안 하더군요. 좀 서운했습니다.”
그 말에 기태천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내가 그냥 당할 것 같나?”
“어차피 몸도 성치 않잖습니까? 그냥 좋게 좋게 가지요.”
사무언의 말대로 기태천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눈은 자꾸만 감기고 사무언의 모습조차 흐릿하게 보였다. 정순한 그의 내공을 생각하자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단전을 충만하게 채우던 내공은 어디로 갔는지 한 줌도 느껴지지 않았고 몸에는 고개를 제대로 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태천에게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내공의 유무를 떠나 절대자들만이 지닐 수 있는 기도였다.
“자. 이제 슬슬 말씀해 주십쇼. 암천여래신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묻는 사무언을 기태천이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뒤로 젖혔다. 태사의 깊숙이 몸을 파묻은 그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없네.”
“그럼?”
“그럼은 뭐가 그럼인가?”
“그럼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겁니다.”
“쯧쯧.”
기태천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더니만 머리가 나빠진 모양이군. 내가 그걸 말할 것 같나?”
“…….”
그의 말에 사무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결코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 누가보다도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럼 할 수 없지요. 전부 뒤지는 수밖에.”
“한번 잘 찾아보게나.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몰라.”
“걱정 마시죠. 이 잡듯 뒤질 테니 말입니다.”
저벅!
사무언이 걸음을 옮겨 상전에 올랐다. 그가 점차 가까워짐에도 태사의에 앉아 있는 기태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사무언이 그의 앞까지 도달했다.
“그럼 가시지요.”
“…….”
짧게 읍을 한 사무언이 검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검은 두부에 박히듯 기태천의 가슴을 파고들어 갔다. 그 순간 기태천이 눈을 떴다.
‘흡!’
기태천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에 사무언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진짜 이런 말은 하기 싫었는데 말이야…….”
말을 끊은 기태천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지옥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그 목. 잘 씻고 오도록.”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숨이 끊어진 것이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절대자의 최후 치고는 초라한 최후였다.
‘빌어먹을!’
사무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이 날만을 기다리며 참아왔다. 그렇기에 거사가 끝나면 개운할 줄 알았다. 하지만 기분은 더럽기 짝이 없었다.
휙!
싸늘히 식어 버린 기태천의 심장에 박혀 있는 검을 빼 든 사무언이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앞에는 피풍의와 흑풍의를 걸친 사내를 대동한 마희운이 부복하고 있었다.
“사마련의 모든 장소를 샅샅이 뒤져라! 개집도 놓치지 말고 뒤지란 말이야! 암천여래신공은 꼭 찾아야 한다!”
“존명!”
마희운과 사내들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사무언이 손에 힘을 준 채 다시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뚫려 죽은 사람치고는 편안한 미소가 그의 입에 걸려 있었다. 그 미소를 직시하던 사무언은 얼굴을 구기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 * *
운휘는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피어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미 흑의인들은 흑룡에 의해 모두 죽임을 면치 못했고 그럼에도 흑룡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바닥에 너부러진 시체들을 찢고 뭉갰다.
핏물과 살점이 비산했다.
이미 사 년 전의 임무에서 지옥을 맛보았던 운휘조차 눈을 감고 싶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대체 저건 뭐란 말이야.’
자신에게조차 화가 튈까 숨을 죽이고 무천을 바라보던 운휘는 흑룡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저런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흑의인들의 검에서 피어난 검기가 흑룡을 가르고 지나가도 안개를 벤 것처럼 곧바로 재생되어 상대를 짓눌렀다. 그야말로 마공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 큰 의문점은 무천이 언제 저런 것을 손에 넣었냐는 것이다. 지금 무천의 모습은 절대 내공을 잃은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꽈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흑룡이 바닥을 내려치면서 생긴 여파였다.
그 충격에 상념에서 깨어난 운휘는 눈을 부릅떴다.
점점 색이 옅어지던 흑룡이 갑작스레 무천을 향해 쇄도한 까닭이었다.
‘위험!’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손이 무천을 해하려 한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운휘는 본능적으로 검을 쥐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