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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第二章 해남검법(海南劍法)(2)
‘죽으면 무공 수련을 못하지.’
그것이 바로 흑의인의 살고자 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정파의 무공을 익히기에는 늦었다. 마공을 익히다 다시 정파의 무공을 익힌다면 오히려 주화입마에 걸릴 수 있지. 그리고 자랑스러운 마도인이 무슨 정파의 무공이란 말인가. 그럴 시간에 마공을 더 연성하는 게 낫지. 또한 내가 마룡지체인가 뭐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정파의 심법은 익힐 수 없지.’
생각이 깊어질수록 흑의인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마공은 연성 속도가 빠르지만 절정의 벽을 넘기에는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힘이 주어지지만, 그만큼 절정의 벽을 깨는 것이 배는 어렵다고 알려져 왔지. 지금도 빠르게 늘어가는 무공 성취에 놀라울 정도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정파 놈들에게 따라잡히겠지.’
현재 흑의인이 익히는 마공은 혈천팔룡마장(血天八龍魔掌)과 흑살검법(黑殺劍法), 그리고 악마혈천심법이었다.
모두 이류 마공에 불과했지만, 삼급 살수인 흑의인에게는 감지덕지였다.
천마신교에는 모두 세 개의 무고(武庫)가 있었다. 무림에서 수집해 온 비급이나 마공들을 보관해 놓는 무고였는데, 들어갈 수 있는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
흑의인의 서열은 형편없을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하급 무사들이 들어갈 수 있는 지마무고(地魔武庫)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암형대의 삼급 살수로 뽑힌 덕분에 두 개의 무공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고, 그나마 나은 두 개의 마공을 익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순간, 가부좌를 튼 채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던 흑의인의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흑의인은 조용히 눈을 뜨고는 주위를 훑더니,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서서히 기척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의를 입은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의 복부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벌어진 입을 통해 연신 선혈이 뿜어져 나왔고, 백의는 혈흔으로 진득거렸다. 검집에 꽂혀 있어야 할 검도 보이지 않았다.
“헉헉.”
지쳐 보이는 백의 중년인이 바위에 기대었다.
그 와중에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듯 보였다.
흑의인은 조용히 백의 중년인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무공을 익힌 자가 맞거늘,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수가 분명했다.
평상시였다면 흑의인의 위치를 발견하고 처리했을 테지만, 부상 상태가 워낙 심각했다.
순간, 백의 중년인이 각혈했다.
“커헉!”
내상이 심각한 듯 땅에 떨어진 피는 검붉었다.
백의 중년인은 자신의 복부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대충 치료하여 나을 만한 상처가 아니었다.
시야도 흐릿해져 갔다.
‘……숨겨야 한다.’
백의 중년인이 품속에서 낡은 서적을 꺼내려던 찰나, 재차 피를 토하면서 손에서 떨어뜨렸다.
무심하게도 서적은 그대로 폭포수 아래로 빠져들어 갔다.
“이, 이런 젠장.”
백의 중년인이 급히 서적을 잡아채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일단의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흐흐. 이거, 매우 반갑구려.”
백의 중년인이 꾸짖듯 외쳤다.
“이놈들, 이 사실이 해남검파(海南劍派)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그러는 것이더냐!”
“해남검파? 하하하하! 그들이 무슨 수로 오늘의 일을 알겠는가. 쓸데없는 걱정 말고 잘 가게나.”
순간, 복면인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백의 중년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복면인이 검을 털어 내자 피가 휘날렸다.
“저놈의 몸을 뒤져 해남검법(海南劍法)이라고 쓰인 비급을 찾아라.”
“옛!”
명에 따라 한 복면인이 백의 중년인의 몸을 뒤적였다.
그렇게 한참을 뒤지던 복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한숨을 내쉬며 백의 중년인의 몸을 직접 뒤졌다.
하지만 몇 개의 금창약과 쓸모없는 빈 종이밖에 없었다.
복면인이 눈매가 일그러졌다.
“이런 젠장. 아까 그 객잔에 숨겨 놓았을 것이다. 두 명은 이곳에서 남아서 시체를 처리한 후 주위를 수색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른다. 가자!”
복면인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야말로 뛰어난 경신술이었다.
나무에서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던 흑의인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대단한 경신술이군. 잔혹한 손속과는 달리 정파의 무리들 같은데.’
그러는 사이, 남은 두 복면인은 백의 중년인의 시체에 커다란 바위를 묶은 후 폭포에 빠뜨렸다.
폭포수가 연신 떨어지고 있었기에 서적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덕분에 시체와 함께 가라앉는 것을 두 복면인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복면인 두 명은 한 시진여 동안 주변을 수색하다가 그제야 포기한 듯 모습을 감추었다.
흑의인은 조용히 한 시진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폭포로 다가갔다.
옅은 혈향이 남아 있는 그곳에서는 깊어 보이는 폭포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흑의인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어느새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된 흑의인이 폭포로 뛰어들었다.
첨벙.
폭포수에 뛰어든 흑의인은 주저없이 물속으로 잠수했다.
암형대의 살수들은 뛰어난 수영 실력과 잠수 실력을 자랑했다.
살수란 어느 장소에서든 뛰어난 은잠술을 펼쳐야 했기에 수영과 잠수는 기본이었다.
백의 중년인의 시체를 발견한 흑의인은 다리를 더욱 힘차게 저었다.
그런 뒤, 시체 위에 올려져 있는 바위를 밀친 후 등 뒤 쪽을 살폈다.
과연 그곳에는 복면인들이 찾아 헤매던 서적이 있었다.
흑의인은 서적을 낚아채고는 물 위로 부웅 떠올랐다.
“푸하!”
땅 위로 올라선 흑의인이 머리에 묻은 물을 털어내면서 겉면이 흠뻑 젖은 서적을 조심스레 살폈다.
해남검법(海南劍法).
화려한 필체로 쓰여진 제목.
다행히 서적은 기름으로 칠해 놓았는지 물에 얼마 젖지 않았다.
흑의인은 옷을 걸치고는 서적을 품 안에 넣었다.
잠시 주위를 훑어보던 흑의인은 경신술을 사용해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흑의인이 서적의 앞장을 천천히 넘기자 하나의 글귀가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
순간, 흑의인이 눈이 커졌다.
남해삼십육검!
검으로 유명한 명문 해남검파에서 일대 제자 이상만이 전수받는다는 유명한 검법 중 하나였다.
단숨에 삼십육방을 찌르는 가공할 만한 쾌를 자랑하는 검법으로, 진정한 해남검파의 매서움을 보여 주는 검법이었다.
이 남해삼십육검 하나만으로 해남검파는 가볍게 구파일방에 오르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흥분에 젖은 흑의인은 조심스레 비급을 한 장씩 넘겼다.
그러던 중 점점 비급에 빠져들다가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을 발견했다.
그랬다.
해남검파는 매서운 좌수검으로 유명했던 것이다.
‘좌수검과 마룡지체. 무언가 조각이 맞춰지는 것 같군.’
좌수검은 진기를 돌리는 방법이 정반대였다.
흑의인이 비급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오직 한 가지였다.
‘나를 위한 검법이다!’
그랬다.
흑의인, 독고천은 마룡지체라는 특별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고, 혈도지로가 반대로 되어 있는 특이한 체질을 타고났다.
결국 진기의 길[路]이 반대라는 좌수검을 우수검으로 펼칠 수 있는 체질을 갖고 있는 셈이었다.
독고천은 남해삼십육검을 한 번 훑어보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본 교에서 만들어진 검술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매섭고 빠르며 날카롭군. 좌수검으로 펼칠 수 있는 남해삼십육검을 우수검으로 펼친다면 어느 누가 내가 그것을 펼친다고 생각하겠는가.’
독고천이 조용히 명상을 시작했다.
검로가 천천히 그려지며 구결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급에는 구결의 뜻을 쉽게 풀이해 놓은 설명이 적혀 있었다.
풀이를 적어 놓은 사람은 절정검객(絶頂劍客)인 듯 자신의 심득을 매우 쉽게 풀이해 놓고 있었다.
스승이나 선배의 존재가 원래 이때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암호처럼 어려운 구결을 풀이하고 알려 주는 것이 스승의 역할인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친절히 구결이 풀이되어 있다면 굳이 스승의 존재가 필요없었다.
거기다 비급에 적혀 있는 구결의 풀이는 본래의 남해삼십육검이 지향하는 모습과는 살짝 어긋나 있었다. 더욱 패도적이고 묵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천마신교의 검술과 흡사한 점이 많았다.
머릿속에서 검로를 그려 가던 독고천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고는 검을 뽑았다.
스릉.
맑은 검명과 함께 칼날이 빛을 발했다.
독고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색 마기는 어느새 한층 더 짙어져 있었다.
검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갑자기 매서운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갈랐다.
주위에 있던 나무들이 상처를 입고, 어떤 것은 베어지기까지 했다.
독고천은 무아지경인 상태에서 계속 검을 휘둘렀다.
빠르고 패도적이며 매우 매서웠다.
허공을 가르면 공기가 흔들렸고, 허공을 찌르면 공기가 찢어졌다.
그리고 검초 하나하나에서 자색 마기가 흘러나왔다.
얼핏 보기에는 남해삼십육검 같았지만, 독고천이 펼치는 검술은 남해삼십육검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마검(魔劍)과도 같이 잔인하고도 매섭게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독고천은 검을 휘두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새로운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마룡지체라는 그만의 특유한 체질이 그의 몸을 한층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진기가 부글부글 끓으며 그의 검은 더욱 빠르고 매서워지고 있었다.
쿠웅!
굉음과 함께 나무들이 쓰러졌다.
파파팟.
이어 나뭇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독고천이 문뜩 정신을 차리고 검을 내려뜨렸다.
주위에는 큼지막한 공터가 생겨 있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던 독고천이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옅은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기(劍氣)는 분명 아니었다.
순간, 독고천의 뇌리에 비급에서 읽은 구결이 떠올랐다.
남해삼십육검을 익히게 되면 진기의 유통을 통해 일정한 기운이 검을 감싸게 된다.
그 기운은 시전자의 기운임으로 일정한 정의는 내릴 수 없다.
온화한 자라면 온화한 기운이, 급한 자라면 급한 기운이 검을 감싸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검초를 더욱 강맹하고 빠르게 해 줄 것이다.
독고천의 심법은 마공이었다.
때문에 마기가 흘러나온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에서 흘러나오던 마기가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윽고 없어졌다.
독고천은 검집을 풀어 옆에 놓고는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 뒤 머릿속으로 검로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렇게 나흘이 흘렀다.
독고천이 눈을 떴다.
새벽이슬로 젖은 어깨 뒤로 어느새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독고천의 검술로 깨끗해진 공터에 새싹들이 조금씩 자라나 있었다.
‘얼마나 지난 거지? 슬슬 귀환해야겠군.’
어깨에 묻은 이슬을 털어 낸 독고천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검집을 허리춤에 다시 차고는 주위를 훑었다.
고요한 숲 속에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독고천의 신형이 숲 속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독고천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색 마기가 아주 진해졌다는 것을.